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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로클로스의 막사에서 이루어진 회의는 순조로웠다. 역할이 정해진 이상 그것을 수행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수행 과정에서 어떻게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며 적은 손해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지휘관의 역할이었는데, 아킬레우스를 지휘관으로 섬기는 이들 모두는 자신의 상관이 아카이아 연합군 최고의 장군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그런 만큼 아킬레우스를 향한 신뢰가 굳건했기에 회의는 몇 시간 만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막사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진 후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곁에서 수행하며 그의 막사까지 가는 길에 함께했다. 사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 만큼 굳이 나란히 붙어서 데려다줄 필요는 없었으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것을 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그 보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해인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파트로클로스는 오늘 내내 고생했을 지휘관 겸 친우를 위해 이 정도의 수고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해인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털어놓았다.
“……병법?”
“응. 전쟁에 흥미를 보이시더라고. 간단하게만 이야기해 드릴 생각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이해가 빠르셔. 지겨워하지도 않으시고…….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전쟁 이야기만 했지.”
하루 종일이라는 단어가 별수 없이 거슬린 아킬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꽤 친해진 것처럼 보이더군.”
연합군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적,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그를 발견하기 전부터 파트로클로스와 해인을 보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어쨌든 해인이 웃고 있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파트로클로스는 단번에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질투임을 눈치채고는 막을 틈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너무 좋은 학생이셔서 그래. 이것저것 알려 드리는 재미가 있더라. 왜 스승님이 널 가르치는 데 그렇게 신경을 쓰셨는지 이해가 되더라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좀 몰입한 거야. 그것 말고는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날 경계할 필요는 없는데…….”
이럴 때가 아니면 상관을 놀려 볼 기회가 없다. 말끝을 흐리며 파트로클로스가 겨우 웃음을 삼켰다. 그 모습에 인상을 쓴 아킬레우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그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침묵하며 걸음을 옮기던 아킬레우스가 문득 혼잣말을 내뱉었다.
“전쟁에 흥미를 보인다라…….”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전쟁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못했다.
아마도 해인은 아킬레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도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 혼자 진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곁에 둔 이를 활용해서 무엇이든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표정이 갑자기 무거워지자 파트로클로스는 의아하여 그를 살폈다. 직전 그가 했던 혼잣말의 내용도 들렸던 탓에, 그는 아킬레우스가 해인이 전쟁 같은 살벌한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걱정하는 것이라고 짐작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잔인한 이야기는 안 했으니 걱정 마. 철저하게 이론에 치중했어. 당연한 일이지.”
“……그랬겠지.”
마침 아킬레우스의 막사 근처에 도착한 참이었기에, 파트로클로스는 손을 들어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쨌든 어느 정도 알게 된 이상 내일부터 개전이라는 걸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가서 대화나 좀 나눠 봐.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그래.”
아킬레우스는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에게 빙긋 웃어 보인 뒤 자신의 막사로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아킬레우스도 이내 뒤돌아 그의 막사 문에 손을 올렸다.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보다 한결 따뜻한 공기가 끼쳐 옴과 동시에 주황빛으로 물든 내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속에서 해인은 화로 근처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려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드물게도 표정이 꽤 잘 보였다.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해인은 거의 항상 담담한 낯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대놓고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다. 일렁이는 불꽃으로 살짝 물든 짙푸른 색의 눈을 마주하게 되자, 직전까지의 복잡했던 심경을 뒤로하고 아킬레우스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할 말이 있다고 해 놓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아니에요.”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해인은 솔직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지 조금 의심 중이었다.
애초에 아침에도 굳이 나가기 직전 말을 꺼내고 나갔던 것을 떠올려 보면 아주 틀린 생각만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지휘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온 것에 대고 오래 걸렸음을 토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랬다간 투정 부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짧게 답한 해인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아킬레우스는 바깥에서 묻혀 온 차가운 공기와 함께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젯밤과 같은 구도가 만들어졌다. 아침부터 의미심장하게 할 말이 있다며 예고를 했던 만큼, 진지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얼마든지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마주 앉은 상대를 바라보며 해인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심코 손끝을 매만지며 해인이 눈을 내리떴다.
아킬레우스가 두 번째 회의를 하러 떠나고 이 순간까지는 정말 그의 말대로 아킬레우스의 생각만 났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다 흠칫 놀라며 손을 내리길 몇 번이나 반복할 정도였다. 결코 바란 적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몇 시간 내내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예고를 거창하게 하는 건지에 대해 생각했더니, 이왕이면 부정하고 싶은 가정 하나가 떠올라 더욱 기분이 혼란했다. 아침부터 느낀 불안감이 그저 막연하던 것에서부터 점차 어떠한 형태를 갖춰 가는 것 같았다.
애써 초조함을 감추려는 해인과는 달리 아킬레우스는 침착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며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고는 첫마디로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내게는 어린 시절 내려진 예언이 있어. 죽음을 이야기하는 예언이었지. 날더러 전쟁에 나서 명예를 얻으면 단명할 거라더군.”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에 문득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해인이 먼저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으니 저쪽도 비밀을 등가 교환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했을 정도로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끝을 잠시 흐리더니 선언하듯 내뱉었다.
“나는 예언을 믿지 않아.”
무어라고 답을 돌려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해인은 어딘가 미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운명은 내가 개척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언제나 믿어 왔고, 내 이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쟁터로 직접 뛰어든 것도 그런 내 믿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지.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내 앞길을 스스로 선택해 왔어. 그리고 그걸 언제나 당연하게 여겼고.”
아킬레우스의 목소리는 선명하고 느리게 막사 안을 채웠다.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원동력 삼아 인생을 채워 온 사람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으나, 동시에 해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언제고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서. 아득한 미래에까지 전해질 그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
줄곧 진지한 표정이던 아킬레우스가 말을 맺으며 해인의 표정을 잠깐 살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피곤함은 간데없고, 무엇 때문인지 심각함마저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집중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는 비슷한 어투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데 그대가, 그런 내 삶의 지향을 정면으로 반박한 거야.”
“……제가요?”
말의 맥락은 언제나 잘 찾아내는 편이었으나 이번은 아니었다. 해인은 그의 예언과, 그 예언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자신이 대체 언제 반박한 것인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기색에 아킬레우스가 쓰게 웃었다.
“설명해 줄까.”
물음이었지만 답을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그는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여기부터 시작해야겠군.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대에게 끌렸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기에 해인이 반응하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찰나의 순간 후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해인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었다.
사실 짐작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포세이돈과의 거래 내용이 마음에 든 게 아니라, 자신이 마음에 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팀블레에 있을 때부터였다. 그 가정은 팀블레에서 보냈던 마지막 날 밤 확신이 되기까지 했으니, 이제 와서 아킬레우스의 감정에 놀라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해인을 당황하게 한 건 그가 너무 대놓고 그 사실을 밝혀 버렸다는 점이었다. 직접 듣게 된 이상 해인은 더는 아킬레우스의 감정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약간의 긴장감을 얹은 채 이어지던, 아슬아슬한 평화의 종식이었다.
“……사실 그대도 정말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닌가?”
심지어 확인 사살이 뒤따랐다.
속삭이듯 덧붙여진 물음은 긴장감과 함께하던 그 평화조차 사실은 상대의 함구로 이루어졌음을 알려 오고 있었다. 해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깐의 생각 후, 그녀는 시선을 조정해 아킬레우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렇다고 하면요?”
긍정을 함의한 질문이었다. 해인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상대에게 부정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질문의 답으로 되돌아온 질문에, 아킬레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웃었다.
“역시나 싶을 뿐이지. 끝까지 들어 봐. 그런 후에 판단하면 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