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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0)화 (41/149)

해인의 답을 들은 파트로클로스가 웃음기 남은 얼굴 위로 조금 더 짙게 미소를 그렸다. 마치 어린 누이동생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뒤이어 그들은 막사 앞에 의자를 끌어와 나란히 앉았고, 파트로클로스는 잠깐의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이 어떻게 시작될지에 대해 물으셨지요. 적은 성벽 너머에 있고 우리는 그 바깥에 있으니, 당연하게도 공성전에 들어갈 겁니다.”

“공성전이요?”

“예, 성을 넘어야만 적을 마주할 수 있으니까요.”

천천히 말을 골라서 설명을 이으면서도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전쟁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일종의 변덕으로 여겼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났던 여성들은 전쟁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탓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남편, 혹은 연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할 뿐 전쟁의 흐름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해인은 다소 특수한 상황에 있으니 다른 여성들과 달리 전쟁에 대해 조금 더 깊이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그 호기심이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공성전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해 주면 해인이 금세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성껏 설명을 하는 건 잠깐이나마 해인이 무료하지 않다면 그걸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도 해인의 흥미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수준의 질문 몇 개가 되돌아왔다. 질문에 얼떨떨하게 답해 주던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해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빠르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적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하고 있던 설명을 우선적으로 모두 끝마치고 생긴 잠깐의 틈을 타, 자신의 의문을 꺼내 들고 말았다.

“그, 아가씨. 실례지만 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흥미가 있어서요.”

해인은 별다른 이유는 없는 척, 단순한 호기심인 척 답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이유가 존재했다. 들어 두면 혹시 귀환에 있어 도움이라도 될까 싶은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시대로의 귀환’ 같은 이야기를 파트로클로스에게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인의 대답에 파트로클로스가 신기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보통 여성분들은 전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시던데, 의외로군요.”

“……글쎄요.”

해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이 아주 뚜렷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연회에 참석조차 불가능한 시대인 만큼 상대가 틀린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무려 삼천 년을 거슬러 온 현대인이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낫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 생각한 해인이 느린 어투로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질문을 하면 답을 해 주는 분이 곁에 있지만, 다른 여성분들은 궁금해도 답해 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관심을 돌린 걸 수도 있겠죠.”

“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아테나 님도 여성이시잖아요.”

“그건……. 그렇군요.”

군신(軍神)은 아레스이지만, 아테나가 자신이 참여한 대부분의 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둬들이는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는 지혜의 여신이며, 지혜는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아테나라는 이름에서부터 도출된 이 논리에 대해 파트로클로스는 반박할 말도, 이유도 찾지 못했다.

하여 그의 납득 이후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해인이 묻는 것에 꼬박꼬박 답해 주던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해인의 태도에 힘입어 점점 진심으로 상대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테베 공성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 사이 병법의 기초는 물론이고 응용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갔다.

근처를 지나가거나 주변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그들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는 묘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미 상황에 몰입해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해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분명 처음에는 단순히 귀환에 대한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 요구했던 설명이었으나, 듣다 보니 예상외로 상당히 흥미로웠던 것이다. 원래부터 언변이 좋았던 파트로클로스가 화자인 탓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그들은 반나절 내내 전쟁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대화가 마무리된 것은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제법 기울었을 때가 되어서였다. 둘 모두 이렇게까지 진지할 생각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한참이 흐른 후였다. 물론 중간에 식사를 하기도 하고 잠깐 쉬기도 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대화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아킬레우스가 처음 병법을 배웠을 적보다 더 이해가 빠르신 것 같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감탄 섞인 어투로 찬사를 보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자신이 아침에 들었던 그의 뜬금없던 발언을 거의 잊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의도는 아니었으나 해인에게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킬레우스의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른 그의 의미심장했던 말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놓으며 대강 답했다.

“처음 배웠을 때면 어릴 때셨겠죠. 하지만 지금 저는 어른이니까요.”

“그렇더라도 처음 듣는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까?”

파트로클로스는 웃는 얼굴로 해인을 추켜세웠다.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과장해서 칭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이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했기에 결국 해인도 작게 웃었다. 이전보다는 확연히 편안해진 낯이었다. 몇 시간 내내 대화를 나눴다 보니, 마음속의 벽도 낮아져 상대를 보다 더 친근하게 여기게 된 탓이기도 했다.

흐뭇한 얼굴로 해인을 보던 파트로클로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해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건 시간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반쯤 습관과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해의 위치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오고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을 발견한 파트로클로스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아킬레우스가 오는군요. 회의가 끝났나 봅니다.”

그의 표정이 바뀐 순간부터 그 이유를 본능적으로 짐작했던 해인은 자신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정보에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아킬레우스가 없는 동안은 뜻밖에도 다른 일에 집중하며 보낼 수 있었지만, 그 당사자가 돌아온 이상 마음의 평화와 안정은 포기해야 했다.

만약 손위의 사촌 형제가 있다면 꼭 이 사람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부담 없는 파트로클로스와는 달리, 아킬레우스는 함께 있으면 거의 항상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이상 그는 언제까지고 편하게 대할 수만은 없는 상대였다.

파트로클로스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해인의 시야에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멀리서도 금빛 머리카락은 선명하게 눈에 띄어 알아보기 쉬웠다. 그 곁에 있는 이의 정체 역시 짐작이 갔다. 아킬레우스보다 다소 옅은 금색 머리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에우도로스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지척에 다다랐다. 해인의 짐작대로 일행은 에우도로스가 맞았다. 파트로클로스가 몇 걸음 나서 둘을 맞이했다. 해인은 주변의 모두가 서 있는 마당에 혼자 의자에 앉아 있기는 머쓱할 것 같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앞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으므로, 해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고생했어. 어제보다는 그래도 표정이 괜찮아 보이네.”

“아무렴, 오늘은 좀 생산적이었거든.”

씩 웃으며 대꾸한 에우도로스가 파트로클로스의 등 뒤에 있던 해인을 발견했다. 테베에 도착한 첫날 대화를 나눈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이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소리 없이 친근한 태도로 아는 척을 해 왔다. 해인은 잠시 멈칫하다 빙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로 얼굴을 보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시대에 떨어졌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비슷한 나이대의 친척인 것이다.

해인이 인사를 받아 주자 에우도로스는 다시금 마주 웃어 보인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눴다.

그사이 해인은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던 아킬레우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주 보게 된 이상 시선은 순식간에 끌려가듯이 그에게 향했다.

반사적으로 긴장해 숨을 들이켜는 해인을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살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굳는 것을 봤을 때 아침에 하고 갔던 말을 어쨌거나 잊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만 내도록 그의 생각만 한 것은 또 아닌 것 같았다. 해인이 내내 아킬레우스의 생각을 했다면 아까까지 그랬던 것처럼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바깥에 나와 있을 시간도, 에우도로스의 인사를 받아 줄 여유도 없을 터였다.

해인은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으면 적어도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는 내내 그 생각에 파묻혀 있는 성정인 듯했다. 되짚어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잦았다. 아마 그동안 하던 고민은 어젯밤 말해 주었던 그 비밀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짐작일 뿐이지만,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저 정도나마 여유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했는지는 몰라도 파트로클로스가 그녀를 제법 잘 상대했다는 말이 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만 뜻밖에도 그게 아킬레우스에게는 아쉬움이 되었다는 점이 모순이었다.

“아킬레우스, 이제 따로 회의에 들어가야지.”

아킬레우스의 사색은 해인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듯 시선을 피하며 끊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파트로클로스가 그를 불렀으므로 하고 있던 생각을 이어 갈 수도 없었다. 그는 숨을 한번 내뱉은 뒤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러잖아도 오는 길에 호출해 뒀으니 곧 모일 거야. 내 막사는 안 되니, 네 막사를 좀 써야겠다.”

원래라면 지휘관의 막사에서 회의가 진행됐겠지만 해인이 지내고 있으니 그럴 수 없는 건 파트로클로스도 아는 사실이었다. 포세이돈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이상, 그의 삼지창에 의해 몸속으로 한꺼번에 세 개의 구멍이 뚫리고 싶지 않거든 이 정도의 주의는 당연하게 기울여야 했다. 아킬레우스의 명령을 수긍한 파트로클로스가 순순히 답했다.

“그럼 먼저 가서 준비해 둘게.”

“그렇게 해.”

답을 들은 파트로클로스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그는 잠시 해인을 돌아보더니 빙긋 웃으며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오면, 연합군 회의 결과를 토대로 해 진영 내에서 따로 회의가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은 해인도 반나절 내내 파트로클로스와 대화하며 이미 들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갑작스럽게 바뀌어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해인에게 건넨 무언의 인사를 끝으로 파트로클로스는 에우도로스를 이끌고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로 인해 해인은 몇 시간 만에 비로소 아킬레우스와 단둘이 남겨졌다. 물론 실내가 아닌 탁 트인 바깥이고 병사 몇몇도 멀찍이 서 있기는 했다. 그러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긴장감은 그런 사소한 요소들을 모두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잊어버리지는 않은 것 같네.”

그때 아킬레우스가 짧게 한마디 말을 던졌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해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던 듯 또다시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킬레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인이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몇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둘 사이의 거리가 한 발자국 남았을 때, 해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막아서듯 아킬레우스가 손을 뻗는 게 먼저였다. 다만 정작 그 손이 잡은 것은 팔이나 손이 아닌 해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었다. 몹시 주의를 기울이는 손짓으로 머리칼을 들어 올린 그는, 해인이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해인은 지나치게 예상외의 상황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물론 이틀 연속으로 그와 같은 침대를 썼고, 그도 모자라 끌어안긴 채 잠들기는 했다. 그렇지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보다 더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머리카락이라고 하기에는 다시 고개를 들고 해인을 정면으로 바라봐 오는 아킬레우스의 눈길이 더없이 선명했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감출 생각이 없는 수준을 떠나, 대놓고 확실히 알아채라며 소리치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이게 무슨.”

“기다리는 김에, 이번에는 정말로 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군.”

머리카락을 흘려보내듯 손에서 놓으며 아킬레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해인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정말 그의 바람대로 될 것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먼저 잠들어 버리지 않는 한,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내내 그의 말과 방금 전의 행동이 떠오를 것이다. 아침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심지어 파트로클로스의 도움으로 그 예상을 잘못된 것으로 회고할 수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상이 아니다. 약간의 부정조차 불가능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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