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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9)화 (40/149)

속삭임은 공기 중으로 마치 습기처럼 퍼졌다. 그 말을 끝으로 아킬레우스는 등을 돌려 성큼성큼 막사의 문으로 향했다. 본인은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듯 망설이지 않는 태도였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천을 걷으며 막사 바깥으로 나섰다.

천을 걷은 탓에 잠깐 크게 들리던 막사 외부의 소리는 천이 가라앉으며 금세 다시 차단되었다.

조용해진 막사 안에서 해인은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였다. 눈을 뜨자마자 난데없는 이야기를 들은 상황이었다. 잠은 깼어도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됐다. 그리고 비로소 완전히 이성이 돌아왔을 때, 방금 전의 일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재생해 본 해인은 그만 멍하니 중얼거리고 말았다.

“뭐지……?”

중얼거림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린 해인은 다소 구겨져 있는 모포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의 흔적이라기엔 다소 넓은 면적에 지난밤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탓이었다.

“아…….”

해인은 탄식하며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한참 눈을 뜬 채로 잠 못 이루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결국에는 아킬레우스에게 끌어안긴 채로 잠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은 것이다.

잔물결처럼 밀려오는 자괴감에 한동안 고개를 파묻은 채 침묵하던 해인은 얼마 후 침착하려 애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난 일도 문제였지만, 방금 전 아킬레우스가 나가며 건네고 갔던 말도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할 말이 있다고?”

아킬레우스의 말을 떠올리자 잠이 덜 깼을 때 뜬금없이 느꼈던 이유 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등 뒤를 덮쳤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할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당장 짐작 가는 바가 없었으므로, 그저 근거 없는 기분이라며 일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느껴지는 이 무형의 경고를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그 순간 해인은 자신이 오늘 내내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달갑지 않은 예상을 하고 말았다. 아킬레우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의 말은 과연 무엇과 관련된 내용일지에 대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고민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에 허탈하게 한숨을 쉰 해인이 허공을 올려다볼 때였다.

막사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천을 걷으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세숫물을 든 여종이었다. 상대를 확인한 해인은 짧게 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정말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마침 사람이 왔으니 생각에 잠길 틈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게 나을 듯했다.

곁에 항상 붙어 있지는 않는 만큼 몇 번 사람이 바뀔 수도 있다던 말대로 이번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전날 아침 만났던 여종으로부터 소문이라도 퍼진 것인지, 해인이 도움을 거절해도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공손한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 은연중 느껴졌다. 그것을 모른 척하며 해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의 매듭을 묶었다.

‘뭐, 이상한 사람이라 뭐든 혼자 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게 나였으니까…….’

본인 입으로 그런 발언을 했으니 이제 와서 시선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해인은 매듭을 다 묶고 자신이 이상하지 않게 묶었는지 확인받았다. 여종은 조심히 다가와 옷자락을 정리해 주더니, 끈을 당기며 짧게 조언했다.

“여기를 이렇게 당기시면 조금 더 자연스러워요.”

“아, 그렇군요.”

해인이 기분 나빠 하지 않음을 확인한 여종은 몇 마디 설명을 더하며 옷의 형태를 조금 더 정리해 주었다. 해인은 다듬어지는 옷의 형태를 가만히 지켜보았고, 이내 정리를 마친 여종이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그 말에 멈칫한 해인은 잠깐의 생각 끝에 그녀를 붙잡았다.

“……저, 지금 입맛이 없어서 아침은 거를까 하는데요.”

먹을 필요도 없는 마당에 굳이 무언가를 먹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해인의 말을 들은 여종은 두 번 권하지 않고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신가요? 그럼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대야와 천을 챙긴 여종이 다시금 고개를 숙인 뒤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다시 혼자 남게 되자,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게 아킬레우스의 말이 머릿속을 점령하려 들었다.

해인은 고개를 저으며 혼자 막사 안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고자 했지만, 정작 이 시대에 도착한 이후 내내 고민하던 것을 바로 어제 아킬레우스에게 전부 털어놓은 이후였다. 결국 끝의 끝으로 떠오르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해인은 불씨가 약간 남은 화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생각을 꺼내 태울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막사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침대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툴 위에 놓인 보라색 히마티온이나, 침대 반대편 기둥에 기대어 놓은 청동 방패 같은 것도 모두 아킬레우스의 물건이었다.

막사를 세 번 정도 돌았을 때 해인은 이 안에 있는 건 스스로에게 있어 전혀 도움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깥으로 나간다 한들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해인은 미간을 좁히며 천을 걷고 바깥으로 나섰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바닥은 축축했지만 공기는 아주 깨끗했다. 원래도 오염되지 않았던 공기가 더 깨끗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올려다본 하늘은 어제와 달리 흐린 곳 없이 완전히 맑았다. 해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폐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깊이 들어왔다. 아침부터 타의로 복잡해졌던 기분이 다소 정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나오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인기척을 들은 듯 막사 뒤에서 돌아 나온 파트로클로스가 해인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해인은 천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 아침에도 평소에 비해서 다소 늦은 시간에 나왔던 아킬레우스의 얼굴이, 전날과는 다르게 마냥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던 탓이다.

오늘 아킬레우스는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심각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혹은 어떠한 결심을 한 것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킬레우스가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고, 매일 그의 표정을 살피며 기분이 어떤지 알아보려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든 사람과 밤을 보낸 사람의 얼굴로 보이진 않았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밤부터 새벽까지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로부터 아킬레우스가 늦은 밤중에 막사 바깥으로 나와, 자신들을 멀리 쫓아내고는 한참 바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 새벽이 밝아서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의 증언 덕분에 파트로클로스는 둘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파트로클로스가 남녀 관계에 끼어들 만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끼어들고 싶은 마음도 전무하긴 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법이었다.

해인은 평상시 표정 변화가 그리 두드러지는 않았었기에 한눈에 보고 기분을 짐작하기는 다소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그것이 크게 느껴지고는 했다.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의 얼굴에서 약간의 피로감, 혹은 무언가에 대한 고민을 읽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알아낼 수는 없었다.

때마침 시선을 느낀 해인이 의아하게 그를 마주 본 탓이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것 같은 눈길에,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아침부터 남에게 실례를 저지르기 직전이었음을 자각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아킬레우스는 오늘도 회의에 불려 갔습니다.”

다소 당황한 탓에 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였다.

“……다만 회의는 오늘로 끝날 테니, 제 자유도 오늘로 마지막이겠군요. 내일부터는 아마 개전하게 될 겁니다.”

개전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며 그는 시선을 올려 정면으로 저 멀리 보이는 테베의 성벽을 응시했다. 말을 맺고 나서야 자신이 필요 없는 말까지 했음을 깨달은 그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그사이 해인은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 함께 성벽을 바라보았다. 황갈색 벽돌과 돌로 만들어진 고대의 성은 전시(戰時)의 긴장감을 한껏 품고 서 있었다.

“그럼 도착한 지 나흘 만이군요.”

테베에 도착한지도 그러고 보면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른 채였다.

해인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으나, 뜻밖에도 그것은 파트로클로스의 마음 어딘가를 찌르는 면이 있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쓰게 웃으며 한숨처럼 답했다.

“예, 사흘 내내 회의만 했다니 사실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가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일 일은 아니었습니다. 각 군의 위치나 역할만 정하면 되었을 테니까요.”

파트로클로스는 전날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아킬레우스와 에우도로스의 표정을 문득 떠올렸다. 에우도로스가 아가멤논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을 제지한 것이 본인이기는 했으나, 사실 그도 아가멤논에 대해서는 그리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해인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회의에는 늘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와 함께 참석했었던 것이다. 아가멤논이 미케네의 왕이기에 말을 가릴 뿐, 그렇지 않았더라면 파트로클로스가 먼저 나서서 아가멤논의 탐욕을 비난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제가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짐작은 갑니다. 틀림없이 반 이상은 탁상공론이었을 테지요. 아직 승리하지도 않았으면서 승리를 통해 얻게 될 명예를 누가 갖느냐로 싸웠을 거고요. 욕심에 실리를 못 읽고 있으니……. 아.”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린 파트로클로스는 바로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해인과 시선이 마주치고는 순간 당황하며 말을 멈췄다. 어제 에우도로스를 말렸던 주제에, 지금은 본인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해인이라는 사실을 짧은 찰나 그만 망각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늘따라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는 실수가 잦았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급히 사과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즐겁지도 않은 이야기를 혼자 떠들고 있었군요.”

“아니요, 괜찮아요.”

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오히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일단 무엇이든 들어 둬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금 전 파트로클로스의 말을 통해 해인은 아카이아 연합군이 그들끼리도 마냥 사이가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트로이는 언젠가 멸망할 테지만……. 어쨌든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분명했으니 나름의 수확이었다.

게다가 이왕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만큼, 무언가 더 듣는다면 귀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놓치기 아까웠던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예?”

“질문이 좀 이상한가……. 그냥 궁금해서요. 아까 어디를 담당하면 될 지만 정하면 될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럼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아, 그게.”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그 짧은 말에서 핵심을 잡아챘다는 것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해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는 해인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는 약간 난처한 기분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전쟁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건가요?”

“네, 곤란하지 않다면요.”

그 말에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곤란함이 언급되자, 그 단어로부터 혹시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력 노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이어진 탓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거기까지는 너무 나갔지.’

해인이 물어본 건 아카이아 연합군의 자세한 전술이 아니다. 그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니, 공성전을 앞둔 만큼 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 등을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군인이라면 아군이나 적군 모두 그 정도의 기초적인 병법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전력 노출까지는 과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다소 예민해진 모양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예, 뭐. 제가 곤란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지루하게 느껴지시지는 않을지.”

다소 고민하던 기색이던 파트로클로스가 이내 가볍게 반응하자, 해인은 안심하며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그녀가 농담처럼 답했다.

“안 그럴 것 같지만, 만약 지루해져도 티 내지는 않을게요.”

늘 차분해서 농담 같은 것은 모를 것 같던 사람의 발언에 파트로클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럼 좋습니다. 약속하셨으니 지키셔야 합니다.”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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