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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8)화 (3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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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장막이 아직 온 하늘을 빽빽이 채우고 있을 시간이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가장 끝에 위치한 장막부터 천천히 걷어 내기 시작할 무렵, 아킬레우스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애초에 깊이 잠들어 있지도 않았으니 잠에서 깼다기보다는 그저 눈을 뜬 것에 가깝기도 했다.

어제와는 달리 해인은 꽤 오랫동안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규칙적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아킬레우스도 잠들었지만, 눈을 뜬 지금 그는 느낌상 그때로부터 시간이 그다지 오래 흐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잠든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소리 내지 않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러내린 모포를 해인의 몸 위로 다시 덮어 주고, 그는 기척 없이 막사의 천을 걷고 바깥으로 나갔다.

당연하게도 근처에는 경계를 서는 병사 몇 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깨어 있는 이상 크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잠시 어디로든 가 있으라며 쫓아내 버렸다. 그리고 막사 앞에 언제부터인지 놓여 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올려다본 하늘은 그새 비가 그쳐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해인이 잠들기 직전까지는 비가 계속 내렸는데, 지금은 심지어 구름마저 제법 흩어져 틈새로 달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기 섞인 공기의 서늘한 냄새가 온 세상을 채웠다. 어딘가 먼 곳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조용히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지난 십 년간의 전쟁 동안 자신을 이끌었던 예언을 떠올렸다.

「전쟁에 나가 영광을 얻으면 단명할 것이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아무런 명예 없이 장수할 것이다.

예언의 당사자인 그는 예언 따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모두가 그 예언을 믿었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에게해의 네레이데스,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예언을 가장 확고하게 신뢰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그녀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스키로스의 공주들 틈에 가뒀고, 아무도 그녀의 그 행동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오로지 아킬레우스만 바라지 않는 보호였다.

원치 않는 평화 속에서 몇 년을 보낸 그는 이러한 삶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런 명예 없이, 아무것도 증명해 내지 못하고,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늙어 죽는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테티스가 표현하는 모성의 방식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킬레우스가 열다섯이 되었을 해였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스키로스로 찾아왔다. 그는 공주들 틈에 섞인 아킬레우스를 단번에 알아보고 그에게 대화를 청했다.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현명한 이타카의 왕은 사람 좋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에게해 너머 그가 내디뎌 본 적 없는 땅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이기기 위해서는 그가 필요하다고……. 그러니 부디 참전해 달라고 권유해 왔다. 아킬레우스는 그 권유의 다른 이름을 알았다.

그것은 기회였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기회, 명예를 얻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있는 기회!

아킬레우스는 인간의 마음과 같이 운명 또한 그 주인의 몫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짓겠노라 스스로 다짐했다. 그는 정면으로 운명과 마주할 것이고, 이겨 내서 그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자 했다. 아킬레우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아들이자 프티아의 왕자인 아킬레우스는 명예와 삶 모두를 얻을 자격이 있었다.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내고 싶었다.

결심과 함께 그는 스키로스에서 탈출하듯 뛰쳐나왔다. 배에 올라 에게해를 건너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쟁에 참전했고, 그로부터 어느덧 십 년이 흘렀다.

세월 덕에 아킬레우스는 어릴 때보다 노련해졌고 아는 것이 늘었다. 수없는 무훈을 쌓아 연합군 중 최고의 무력을 가진 장군임을 인정받았다. 그러고도 여전히 살아 있으니,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해 이겨 내겠다는 생각 역시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의 증명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이든 하고자 하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반드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곱씹듯 중얼거렸다.

어릴 적부터 아킬레우스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미래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일은 그 생각을 정면에서부터 반박하고 있었다. 해인은 이곳에 왔기 때문에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이 땅에 발을 딛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지면, 경계를 풀고 의지하고 기대게 되면, 그렇게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곁에 머무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은 소용없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낀 것, 그것이 단순한 호감으로 그치지 않고 커진 것은, 따져 보면 난생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처음 겪는 일이 이토록 순탄치 않을 줄은 예상치 못한 바였다. 인간이라면 그 앞일이야 원래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이번 것은 괜히 다가오는 감상이 더 컸다.

꽤 오랜 시간 침묵하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점점 걷히고, 세상을 비추던 달이 조금씩 자리를 비켜 준다. 그와 동시에 끝에서부터 새벽의 여신이 장밋빛 손가락으로 밤의 장막을 점점 더 빠르게 걷어 내기 시작했다. 어스름히 밝아 오는 하늘을 지켜보다 그는 짧게 내뱉었다.

“어쨌거나 미래를 생각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이후, 아킬레우스는 갑작스레 혼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그건 꽤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처럼 앉아서 생각에 침잠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항상 순간 이후의 일을 꿈꿨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했다.

비록 전자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혔을지 모르나, 후자는 여전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는 이상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현재를 살았고,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을 증명해 내기를 원했다.

그러니 늘 하던 것처럼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눈앞의 일에 충실하면 될 일이었다. 사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해인을 곁에 두고 싶었다.

처음에는 전리품처럼 생각했지만, 햇빛 아래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이름을 물어 왔을 때, 혹은 어느 들판에서 보낸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의 작은 순간들을 거쳐 지금에 이르러 있었다. 이게 지나온 과거의 결과라면 그는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마침내 밤의 장막이 모두 걷히고, 동쪽 하늘로부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오다 그친 탓에 여전히 서늘한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아킬레우스는 깊이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막사로 들어갔을 때, 다행히도 해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어차피 아킬레우스는 평상시에도 이와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고는 했으므로, 굳이 다시 잘 생각 없이 테이블 앞의 의자를 빼내서 침대 옆으로 돌렸다.

그는 그 위로 앉아 잠든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막사의 두꺼운 천 너머로도 태양이 완전히 동쪽 하늘 위로 떠올랐음을 알리는 햇빛이 느껴질 때까지,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질 때까지.

그는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새소리가 묻혔을 때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오늘이 삼 일째의 마지막 회의다. 옷을 갈아입고, 허리띠 위로 검을 매고, 겉옷을 걸쳤을 때였다.

줄곧 조용하던 침대 쪽으로부터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늦게 잠들었음에도 결국 그리 편하지는 않았던 탓인지, 해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속으로 살짝 혀를 찬 아킬레우스는 침대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 기척에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포 위를 빤히 내려다보던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에 비해 약간 흐릿한 푸른색 눈동자를 본 순간, 아킬레우스는 불현듯 자신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해인.”

해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아킬레우스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혹은 결심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해인은 아주 뜬금없게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는 감각이 긴장감과 비슷하게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 탓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으나 아킬레우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해인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예고했다.

“오늘은…….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감정을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아킬레우스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최소한 자신을 다른 외부의 어떠한 이유 없이 그저 정면으로 봐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해인이 말하기도 전에 눈치챘다는 이유로 언어를 사용해 꺼내지 않으면, 그것에는 결국 명확한 이름이 붙을 수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말을 지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순간 든 생각에 아킬레우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걱정해도 좋고 기대해도 좋았다. 아마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아 아쉽지만 어느 쪽이든 반나절 내내 그를 생각한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어떤?”

깨자마자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은 해인은 황망해져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아킬레우스는 곧장 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는 웃음기 남은 얼굴 그대로 나직이 속삭였다.

“돌아오면 이야기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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