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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7)화 (3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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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고, 잠들 준비를 끝마쳐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우면 될 것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해인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아킬레우스에게 대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무언으로 했던 약속을 지켜 그에 응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아킬레우스의 선명한 눈을 마주하며 해인은 주변의 고요함을 느꼈다. 막사 안은 물론이고, 바깥 역시 몹시 조용한 탓에 화로의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만 작게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해인이 침묵을 깼다.

“제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던 적이 있죠.”

가는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무심코 두드렸다. 세게 치지 않았기에 아주 작았지만, 마치 심장 박동의 속도를 나타내듯 다소 초조한 기색이 어렴풋이 서려 있는 소리였다. 그 끝에 해인은 자신이 내내 고민했던 것의 핵심을 내뱉었다.

“저는……. 미래에서 왔어요.”

당연하지만 그건 그 문장 자체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예언이 되지 않도록 깊이 신경 쓰며 해인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포세이돈의 도움과 크로노스의 수고에 대해, 그리고 귀환 조건에 대해 한마디마다 고심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설명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밤이 깊어 갔다. 아주 깊은 밤, 모든 생명체가 잠들었을 시간에 이르러서야 해인의 말이 끝났다. 그로부터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지난 며칠간 알고 싶었던 것들을 더없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해인의 고향은 어디인지부터 시작해, 갑자기 말이 통하게 된 일과 같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사실은 물론이고, 왜 지엄하신 지중해의 신 곁이 아닌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하는지, 그 모든 것을 비로소 이해하고 납득한 것이다.

해인의 말이 끝난 시점부터 얼마간 이어진 침묵을 깨고, 아킬레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생각한 것 이상의 이야기군.”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답했다.

“반신인 그대가 신의 이름이 갖는 무게를 모를 리 없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대가 신의 이름까지 끌어들여 설명했음은 물론이고…….”

말끝을 흐리며 아킬레우스는 불과 며칠 전이지만 어쩐지 꽤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는 한때를 떠올렸다. 해인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을 때, 정확히는 잠든 해인을 포세이돈으로부터 넘겨받았을 때였다. 그때 포세이돈이 건넸던 말을 아킬레우스는 이제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돌아가야 할 몸이다. 이건 너를 위해 충고하는 것이기도 하니, 잘 기억해 두어라.

그는 포세이돈이 왜 해인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첫마디로 강조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자신을 위한 충고이기도 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 순간, 자신의 자식 말고는 중요한 게 없어 보이던 지중해의 신께서는 뜻밖에도 진짜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도 있으니.”

말을 맺으며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건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곁에 둘 수 있다고 하여 낙천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잠시간 곁에 두게 된 것만으로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존재였다.

난이도의 문제를 떠나 애초에 잡지 못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해인이 아킬레우스의 곁에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크로노스의 말에 반하더라도 그는 신이고 해인은 반신인 이상 신의 뜻대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해인은 굳이 크로노스의 뜻에 반대할 것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해인의 모든 것이, 이곳과 연결되어 있으나 감히 닿을 수는 없는 아득한 어딘가에 있으므로.

“그렇다면 제가 이제 뭘 부탁드릴지도 짐작하시겠군요.”

해인은 눈을 아래로 뜨고 테이블 끝을 응시했다.

“저는 이곳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아니……. 사실 아는 게 없어요. 전쟁과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배워 본 적 없고, 배울 필요를 느껴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크로노스 님께서 저를 여기로 보내셨으니 저는 여기서 뭔가 할 일이 있을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저를 도와줄 누군가가 절실해요.”

“……돌아가야 해서?”

“돌아가야 해서.”

고개를 들고, 눈이 마주쳤다. 아킬레우스는 짙은 푸른색의 눈을 보며 찰나의 순간 그를 덮쳐 오는 여러 가지의 감정을, 혹은 말을 삼켰다. 해인의 말대로, 그녀의 말을 이해한 순간 앞으로 무엇을 부탁받게 될지도 금세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어제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언가 요구해 온다면, 가급적 전부 들어주고 싶다고,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해 주는 것은 의외로 재미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이런 형태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들어주려면 못 할 것은 없었다. 전쟁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무언가 특이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그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해인을 전쟁터에 데려갈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최소한의 선은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가급적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고, 들어주고자 했으니 하면 됐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서서히 다른 것도 알아차렸다. 부녀가 비슷한 경고를 했다는 사실이다. 포세이돈은 해인이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방금 끝난, 그 길었던 이야기를 통해 아킬레우스에게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의 감정을 알아차려도 그것을 내내 모른 척한 건 이런 이유에서라고, 반드시 돌아가게 될 테니 어차피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마음의 주인은 오롯이 본인뿐이다.

아킬레우스가 생각하기에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타인이 남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타인이 아닌 주인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가진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해인의 말을 이해했으니, 그녀가 건넨 무언의 권유대로 이쯤에서 그만두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그렇게는 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미 스스로 내달리기 시작한 마음은 붙잡을 수 없었다. 주인 되는 사람이 그것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붙잡아 뛰어나가지 못하게 했더라면 모를 일이었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이제는 늦어 버린 후였다.

무의미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글쎄.”

하지만 그는 거절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당장은 나도 짐작 가는 게 없는데.”

분명하게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거절한 것도 아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수긍했다.

“그렇군요.”

“실망하지 않나?”

“네, 말을 한 것만으로도 지금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서요.”

살피는 것 같은 물음에 해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소감을 밝혔다. 사실이 그랬다. 해인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귀환을 위해 한 발자국 전진한 것과 다름없었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조용히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 얼굴이 드물게도 편안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며, 아킬레우스는 왜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거절하지 못했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부탁을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는지 알았다.

그건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돕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인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해한다면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결코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돕고 싶지 않지만, 그를 아군이 아닌 적군처럼 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은 그보다 더 싫었다. 지금처럼 아주 옅게라도 웃는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끌려갔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래, 그럼 됐지.”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시작한 건 해인이었지만, 그 끝을 선언한 건 아킬레우스였다. 더 할 이야기가 없었던 해인은 굳이 말리지 않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해인을 내려다보다 몇 걸음 다가왔다.

“그럼 됐어.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자.”

“……네?”

힘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가볍게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직전까지 그런 대화를 하고도 갑자기 이쪽으로 주제가 튈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던 해인이 방심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해인은 부지불식간에 그가 일으키는 대로 서게 됐고, 당기는 힘에 그대로 끌려갔다. 다음 순간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해인을 이끌어 침대 위로 눕혀 버렸다.

“잠깐…….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도……!”

타의에 의해 눕혀지자 머리 뒤가 푹 꺼지는 아찔함이 크게 몰려왔다가 찰나에 흩어졌다. 해인은 반사적인 반응으로 곧장 일어나려 했으나, 다음 순간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이런 데 힘 빼지 말자니까.”

일어나려는 몸을 어제와 같이 살짝 눌러 다시금 눕게 만들며 아킬레우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도 잘 자던데. 사실 불편하지는 않았잖아, 아니야?”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애써 침착하려는 어조였다. 아킬레우스는 빙그레 웃었다.

“말했잖아. 금방 잠들었으니까.”

“하…….”

해인이 탄식을 섞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못 들은 척한 아킬레우스는 모포를 당겨 덮어 주고 어제처럼 옆에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단단한 팔이 몸을 감싸 왔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로부터 비롯된 긴장감이 심장 박동을 가속시켰다.

그 속에서 해인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말을 전부 이해했으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이야기까지 알아챘다.

그러나 알아채도, 소용이 없던 것이다.

해인은 이 기나긴 대화를 통해서 조언자를 얻고, 그 김에 자신을 향한 상대의 일방적인 연심은 잘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해인이 고심해서 다듬어 꺼낸 비밀이 그를 그렇게 유도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타인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마음은 오롯이 그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남이 어떻게 손을 대 보려 해도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형태를 바꿀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빗소리가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어제보다도 더 공기가 서늘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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