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6)화 (37/149)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파트로클로스의 눈빛이 묘하게 부담스러웠던 해인은 고개를 슬쩍 돌려 또다시 시선을 피했다. 별 이유 없이 올려다본 하늘은 마침 먹구름이 떠 있는 방향이었다.

해인은 그 어둑한 색을 바라보다 고민을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에 대한 것은 가급적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계속 그 이름을 꺼내다 보니 별수 없이 떠오른 게 있던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에서 온 건지 이야기하겠다고 결심해 놓고 아직도 말을 못 했지.’

분명 팀블레에서의 마지막 날, 혼자 방 안에 남아 있을 때 그런 결심을 했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 신들이 구해다 준 조력자를 활용해야겠다고, 신의 이름을 들먹여서라도 자신의 말을 믿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을 채웠다.

심지어 그날, 그런 생각을 한 직후 아킬레우스가 예상보다 일찍 돌아오기까지 했다. 때문에 그날 아침 그가 했던 질문에도 답할 겸 귀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었다.

……정작 말을 못 한 게 문제였지만, 그건 해인의 잘못이 아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돌아온 뒤로 이어졌던 일들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떠올리고 말았다. 뺨을 감싸 오던 손바닥의 체온, 코끝을 스치던 주향, 어렴풋하던 들꽃 향기,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던 무형의 감정 같은 것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그 기억을 애써 밀어냈다.

다시 눈을 뜨자 아까 전과 변함없는 풍경이 보였다. 흐려지고 있는 하늘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 기분 탓일 것이다. 무릎 위로 올려놓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매만지며, 해인은 떠오른 김에 오늘에야말로 결심했던 것을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사무적인 관계가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 아킬레우스가 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그리고 들어 하고 있는지 해인은 알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 생긴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 신기했을 수도 있고, 표정이 바뀌고 말을 하는 것이 흥미로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전부 짐작일 뿐이다. 그리고 굳이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에게 이 신과 연관된 비밀을 풀어놓는 것은 다른 의미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걸 알릴 수 있어.’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아득하리만치 거대한 시간의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신조차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시간을 관장하는 크로노스 역시 그 흐름을 방해할 수 없어서, 고작 해인 한 명의 이탈을 큰 균열로 간주하고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해인이 귀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그 조건을 달성하기만 한다면, 시간의 신께서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관장하는 흐름 속의 균열을 보수해 해인을 현대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예정되어 있는 귀환은 함께 있는 미래를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테니까.’

아킬레우스의 감정이 그렇게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해인이 그와 만난 것은 고작해야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으나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특별한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생긴 것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하다못해 단순히 스쳐 지나가다 우연히 손끝이 부딪혀서, 이처럼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누군가에게 문득 호감을 품을 수는 있는 일이다. 그 호감이 커져서 사랑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깊어지려면 분명 무언가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체온을 나누고, 상대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고, 더 깊이 이해하고, 그럼에도 자신이 눈앞의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로 끝까지 함께한다면, 모든 게 완전하겠지만…….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해인과 아킬레우스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확신하게 되더라도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어차피 완성되지 못할 테니, 아직 작을 때 쳐내는 게 어느 쪽으로든 좋은 일이었다.

해인으로서도 남의 감정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다. 손댈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건 생산성 없는 일이고,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 할 수 있는 것과 지금 손에 넣은 것들에 집중해서, 그로부터 만족을 찾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합리적이었다.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흘러갔다.

그사이 먹구름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 마차는 마침내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 마침내 아킬레우스가 돌아왔다. 해인은 진작 막사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일어나 그를 반겼다.

“왜 이렇게 늦어졌어?”

“말하기도 싫군.”

질린 낯의 아킬레우스가 중얼거렸다. 무언가가 싫다 못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릴 적이라면 저런 얼굴을 할 것도 없이 이미 한바탕 뒤집어엎었을지도 몰랐다. 파트로클로스는 괜히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뒤따라온 에우도로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에우도로스가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글쎄, 특별한 건 없어. 다만 아가멤논 왕이 초조해 보이더군. 지위는 가장 높지만 그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공훈을 얻지는 못한 탓이겠지.”

회의에 따라가지 않았으므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아가멤논이 무엇을 했는지 파트로클로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우도로스의 말속에 들어 있던 것처럼 아가멤논 왕은 아카이아 연합군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였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이에게는 최소한 그만큼의 존중을 보여야 했다.

“에우도로스.”

“여긴 어차피 우리 진영이잖아, 파트로클로스. 주변에 듣는 귀가 있더라도 미르미돈족 사람이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지. 말은 전해지기 쉬우니까.”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끝까지 투덜거리는 어투였다. 그런 에우도로스의 태도를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회의 꼴이 잘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정말 별다른 건 없었고?”

“없었지. 차라리 뭔가 있었다면 그게 나았을걸.”

아킬레우스가 냉소적으로 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쓰게 웃었다. 방금까지 나눈 대화를 종합해 보면 회의에서 의미 있는 발언은 별달리 나오지 않았고, 아가멤논 왕은 초조해하며 다른 장군들을, 특히 연합군 중 가장 높은 공훈을 세운 아킬레우스를 유독 견제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로 알아 둬야 할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에우도로스는 몇 마디 더 투덜거린 후 아킬레우스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가 멀어지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혹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나?”

“흠.”

단순히 자신이 없는 사이 진영 안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를 묻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부재 시 그를 대행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부관이므로, 대부분의 일은 그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가 정말로 물어보는 건 자신이 없는 사이,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뒤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었지. 아가씨께 진영 내부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드렸어. 더 이상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녀도 되는 것에 대해 물어보시기에 답해 드렸고…….”

“그리고?”

“비가 올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었군. 그러더니 좀 피곤해하는 기색을 보이시다가, 안으로 들어가셨어. 지금은 뭐, 쉬고 계실 걸.”

말을 끝낸 파트로클로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나도 오늘의 임무는 끝이군. 설마 오늘도 어제처럼 날 밤중에 다짜고짜 부르지는 않을 거지?”

아킬레우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답했다.

“그래, 부르지 않을 테니 가서 쉬어. 그게 그렇게 싫었는지는 몰랐네.”

“너도 부관의 입장이 되어 봐야 그 기분을 알 텐데…….”

말끝을 흐리며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걸쳐 둔 겉옷을 챙겨 들었다. 뒤돌기 전,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마지막으로 알려 주었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기분이 좀 안 좋아지신 것 같기도 하더라. 뭔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표정이 어두워지시더라고. 여자들 속을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어쨌든 네가 나한테 바라는 건 이런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걸 테니까. 안 그래?”

“……그래.”

계속 곁에 있을 수 없을 때는 가장 믿는 사람이라도 곁에 둬서, 가능한 한 곁에 없던 시간까지도 알고 싶은 게 맞다. 아킬레우스는 순순히 수긍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파트로클로스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 역시 등을 돌려, 반나절 만에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한 발을 들였을 때 곧장 보인 것은 의자에 걸터앉아 화로를 가만히 지켜보는 해인이었다. 문과 테이블이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러지 않았더라도 가장 먼저 찾고자 했을 사람이 거기 있었다.

“오셨네요.”

인기척을 들은 해인이 고개를 들고는 아킬레우스를 보며 뜻밖에도 먼저 인사했다.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해인의 맞은편에 앉아, 대답과 함께 질문했다.

“그래. 별일 없었나?”

파트로클로스에게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궁금했던 당사자의 입으로 한 번 더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진영 안을 둘러보고 왔어요. 그것 말고는 오늘 달리 한 일이 없네요.”

“그래서 지금 피곤한 건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곧장 대답하지 않고 해인은 잠시 침묵했다. 묘한 얼굴로 질문을 한 사람을 응시하던 해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은 그런 이유도 있고요.”

그 말뜻은 다르게 보자면 피곤한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과 같았다. 아킬레우스는 그 사실을 기민하게 눈치챘고, 당연하게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해인이 빨랐다.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건 당신에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직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거든요.”

“……정리가?”

“지난번에 당신이 물어봤던 것에 대해서예요. 다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요. 많이는 아니고, 밤이 될 때까지만요.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음, 제가 요구할 때 저랑 대화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사실 저건 요청보다는 지시와 더 비슷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높은 지위에 서서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얻어 왔던 아킬레우스에게는 신선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무엇보다 알아내고 싶은 것을 먼저 알려 주겠다는 것이었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흥미를 감추지 않은 채 느릿하게 물었다.

“자리라도 비워 줄까?”

“……그건 원하는 대로 하세요.”

확연히 다른 온도의 답이 돌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