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관람객 한 명이 추가된 가운데, 어느 누군가의 부관답게도 파트로클로스는 권력을 써서 자신이 이기고 있던 판을 그대로 재현해 냈으며, 중간부터 다시 시작해 기어코 승리를 쟁취했다. 상쾌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그의 눈에는 패배한 병사들의 미묘한 표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도 아래의 부하들에게는 상관이었던 것이다.
“자, 그럼 진영을 한번 둘러보러 갈까요?”
해인에게 다가온 파트로클로스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 두셔서 나쁠 게 없으니까요.”
“네, 그렇죠.”
맞는 말이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말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해인은 빙긋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고,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걷는 도중 부관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돌발적인 일이 없었으므로 순조롭게 진영을 돌아볼 수 있었다.
대놓고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경계선을 따라 걷다가, 간혹 다른 것보다 크기가 큰 막사 등이 나올 때면 파트로클로스는 그것이 무슨 장소이며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를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해인은 아주 진지한 태도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청자의 태도가 진지하다 보니 화자인 파트로클로스의 설명도 점점 더 자세해지고 있었다. 그는 원래도 아주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지만, 진영을 절반 이상 돌았을 때는 이미 본인도 모르는 사이 몹시 열정적인 안내자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와 함께하는 진영 구경이 거의 끝났을 때쯤 해인은 처음 출발할 때의 목적대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만큼은 확실히 알게 된 채였다.
진영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아킬레우스의 막사 근처로 돌아왔을 때는 출발했을 시점인 정오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저 돌아보기만 했는데도 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넓게 만든 진영은 아니지만,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기도 하고 내도록 침묵만 할 수는 없으니 걷는 도중 소소한 대화까지 주고받기도 한 탓이었다.
그러나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쪽으로 제법 기울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막사 주변에는 병사들 몇 명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막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해인이 막사 앞에 그대로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있는 사이 파트로클로스는 근처를 순찰하던 병사를 붙잡아 아킬레우스가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답을 들은 후 다시 막사 앞으로 되돌아온 파트로클로스가 다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안 따라가서 좋은 것과는 별개로 신경을 완전히 쓰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 같습니다.”
파트로클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매번 자신이 하던 일로부터 갑작스레 손을 뗀 것일 테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인으로서는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보지 않는 시간이 길수록 마음이 편한 게 사실이었다. 때문에 파트로클로스에게 달리 대꾸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그녀는 슬쩍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저, 그런데.”
“네?”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것 말인데……. 벌써 모든 병사들에게 이야기를 다 전한 건가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진영을 돌아다니는 내내 그런 의문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진영을 돌아보는 내내 마주치는 병사들은 모두 해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눈을 아래로 뜨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파트로클로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했다. 구경거리처럼 힐끗거리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그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으려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의 물음에 파트로클로스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예, 바로 오늘 아침에 각 부대장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게 좋을 거라고 일러두었거든요. 원래도 목숨 아까운 줄 알 만큼은 기강이 잡혀 있었으니, 전부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해인은 무심코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목숨까지?”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파트로클로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요. 포세이돈 님의 분노는 무섭죠. 특히 전쟁이 끝나면 모두 프티아까지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하니까요.”
프티아는 익숙한 지명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해인은 어제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대화 중 프티아를 언급했던 것을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왕으로 있는 바로 그 나라다. 파트로클로스의 말로 미루어 아킬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프티아 출신인 모양이었다.
왕자가 자국민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문장만으로도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해인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파트로클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겁을 좀 주기도 했습니다. 포세이돈 님께서 아가씨를 몹시 아끼시니 무례하게 군 순간부터 고향에는 영영 못 돌아갈 거라고, 어쩌면 가까운 섬에 사는 아가씨의 형제자매들에게 던져질지도 모른다고요……. 그 정도의 과장은 포세이돈 님도 양해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아닐까요?”
“아, 네. 아마도……. 그런데 제 형제자매요?”
반사적으로 답하던 해인은 불현듯 단어에 대한 낯섦을 느끼며 되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한국식으로 스물세 살, 만으로는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외동으로 자랐다.
반신이 아닌 신으로 범위를 넓히면 포세이돈의 유일한 적자 트리톤이 존재했지만, 그는 영생의 지루함을 못 이겨 거의 근대부터 잠든 채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스스로 깨어나지 않았다. 그 탓에 그의 존재만 알고 있을 뿐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다소 이상해 보이기 직전에서야 기원전인 이곳에서는 자신의 형제자매가 꽤 많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트리톤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굳이 잠들어 있을 이유가 없으니 잘 지내고 있을 테고, 그 외에도 수많은 포세이돈의 자식들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아, 형제나 자매가…….”
깨달음 섞인 짧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해인은 파트로클로스의 말속에서 나온 가상의 형제자매는 아마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 뒤늦게나마 알아차렸다. 해인은 포세이돈을 비롯한 신들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열심히 알아본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포세이돈의 자식들 대부분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역시 분명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존재했다.
“혹시 만나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면 동복의 형제자매가 있으실 수도 있겠군요.”
두 번의 연이은 깨달음 끝에 겨우 파트로클로스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한 해인의 사정을 모르는 파트로클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갑자기 없던 형제자매가 수없이 많이 생긴 해인은 묘한 기분에 속으로 헛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만나 본 적은 없어요. 동복의 형제자매도 없고요. 사실 그래서 아까 전의 말도 곧장 이해해지 못 했네요.”
“아, 그러셨나요? 그럼 줄곧 혼자 자라신 거군요. 무료할 때도 많으셨겠습니다.”
“……어릴 때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자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킬레우스도 그랬지요. 프티아에서 내내 혼자 자라서 그런가, 낯선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일상이 지루했던지 정말 끝까지 밀어내지는 못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친해졌었죠.”
“아, 네…….”
나름대로 평화롭던 중 또다시 들려온 내면의 평화를 깨는 이름이었다. 기껏 주제를 돌렸던 것이 소용없어진 해인은 어색하게 대답하며 괜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선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문득 발견한 것이 있었다. 해인은 저 멀리서부터 조금씩 밀려오는 먹구름을 보고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어?”
“왜 그러십니까?”
“그게, 저쪽 하늘만 흐려 보여서…….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는 비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아, 정말이군요.”
해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파트로클로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흐린 하늘을 살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해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염려하듯 말을 건넸다.
“밤이나 저녁쯤에는 확실히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법 추울 테니 화롯불을 잘 피우고 계세요.”
“그럴게요.”
해인의 답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마저 편안할 사이까지는 아니었으나 해인은 드물게도 파트로클로스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조금씩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먹구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히려 길어지는 침묵에 약간의 불편을 느낀 것은 파트로클로스 쪽이었다. 그는 해인을 부탁받았다는 사실이 아킬레우스의 자신을 향한 신뢰를 증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해인이 무료해하지 않게 잘 살피고 있어야 된다는 묘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지내기가 편하지는 않으시죠?”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음을 꺼냈다. 여기에 온 이후부터 늘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던 다양한 고민을 관성적으로 곱씹고 있던 해인은 금세 그 목소리에 붙들려 생각 바깥으로 끌려 나왔다.
편의에 대해 묻는 질문에 자연히 하나뿐인 침대 생각이 났지만, 해인은 전쟁터에서 과연 그런 것까지 챙길 여력이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신분과 지위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크기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또한 병사들은 바닥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몸을 의탁하는 입장에서 이것저것 요구하기는 다소 눈치가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눈치를 준 적은 없지만, 어디서나 예의를 잃지 않으려는 입장에서는 별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요.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곳도 아니니까요.”
“의젓하시네요.”
파트로클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말 한마디에 의젓하다는 표현을 들을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 해인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지만, 갑작스레 나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상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파트로클로스는 혼자 몹시 앞서 나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인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의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릴 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제멋대로인 아킬레우스의 성격이 한결 더 누그러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이 생각의 주요 골자였다.
언젠가 아우토메돈이 했던 생각과 몹시 유사한 내용으로, 그건 그들이 같은 상관을 모시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작 주체가 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해인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시대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건 공상에 가까웠으나, 파트로클로스로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미 그런 조짐을 목격한 탓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 다소 늦은 시간에 막사 바깥으로 나온 아킬레우스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아 보였음을 떠올렸다. 그건 어젯밤 다짜고짜 자신을 호출하더니 침대를 하나 더 준비하라던 모습과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킬레우스는 지난밤 했던 지시를 철회했다. 침대는 굳이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며 말을 바꿔 버린 것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입장에서는 분명 무언가 잘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해인도 오늘 내내 침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신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일 뿐으로, 해인은 침대를 구하고자 하면 곧장 구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행하지 않았으니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의 불편한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덕분에 그의 공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