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4)화 (35/149)

chap.5 고민

아킬레우스가 깨어났을 때는 최근의 십 년간 언제나 그러했듯 이른 새벽이었다. 전쟁터로 오고 난 이후부터 그는 내내 지금처럼 이른 시간대에 일어나고는 했다. 하지만 일부러 일찍 일어나려 애쓴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스키로스에서 마치 탈출하는 것처럼 뛰어나와 처음 전쟁터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아킬레우스는 고작 열다섯이었고,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숨어 있기만 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자신은 끝없는 영광으로 꾸며진 삶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어떻게든 인정받고자 했다. 그를 위해서는 쉬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였으니 잠도 오질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나 포이닉스 정도가 되어야 그를 억지로나마 눕혀 놓을 수 있었고, 그토록 어렵게 재워 놓은 게 무색하게도 쉽게 깨어났다. 물론 그 무모한 짓을 계속하면 제아무리 여신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몸이 버티지 못해 손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으며, 이후 적정선을 지키는 법을 배우기는 했다.

다만 최소한의 수면 후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그의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토록 오랜 습관에 힘입어 일어난 시간이 같은 것과는 별개로, 아킬레우스는 평소와는 달리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는 눈만 뜬 채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앞의 풍경을 확인했다. 어제 본인이 한 행동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변함없이 품속에 안겨 있는 타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꽤 한참 동안 잠든 이의 얼굴을 살폈다. 약하게 혈색이 도는 뺨이나, 간혹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따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막사 바깥에서 조금씩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잠든 사람을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물론 아무리 조심해 봤자 침대의 흔들림은 막을 수 없었으나 다행히 해인은 깊이 잠들어 깰 것 같지는 않았다. 추운 듯 약간 웅크리는 모습에 그는 모포를 턱 밑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전날 밤 했던 생각은 분명 일부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은 없었다.

그런 만큼 깨어났을 때도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늘은 어제에 이어 또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태양이 하늘 한 가운데 위치하기 전까지는 모여 달라던 말이 기억났다.

그렇게 애써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치고 과연 의미 있는 발언이 얼마나 나올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나, 지휘관으로서 무작정 불참을 선언할 수도 없었다. 어릴 때는 몇 번 그랬던 것도 같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로 약간의 무례가 용납될 시기는 이미 오래전 지난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준비를 끝낼 때까지도 해인은 깨지 않았다. 허리에 검을 차고, 마지막으로 겉옷까지 걸친 후 아킬레우스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잠시 선 채로 해인을 내려다보다 이내 한쪽 무릎을 침대에 대며 몸을 낮췄다. 손끝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준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짧은 인사였다. 그것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아킬레우스가 몸을 돌렸다. 옷자락이 작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으며,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

해인이 잠에서 깼을 때는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머릿속이 나른한 탓에 해인은 눈만 몇 번 깜빡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잠기운이 옅어지고 정신이 명징해지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지난밤의 기억이었다.

“……아.”

반사적인 탄식이 흘렀다. 해인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 결국 잠들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몹시 잘 잤던 것 같다……. 해인은 왠지 모를 자괴감을 느꼈다. 창문조차 없는 막사라도 두꺼운 천 너머의 바깥이 이미 환하게 밝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지쳐 있던 것도 아닌데 오래 잤네……. 정신적으로 피곤한 거랑 연관이 있나?”

실제와 일치하는 추론을 중얼거리며 해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사 안에 있는 것은 본인 한 명뿐이다. 아킬레우스가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팀블레에서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깨어났을 때나마 혼자 있을 수 있어서 혼란스러운 심정도 어떻게든 수습할 만했다. 해인은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 침대 옆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신발을 신은 다음 가만히 걸터앉은 채 잠시 귀를 기울이자 바깥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걸어 다니는 소리,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난 기색이 어린 대화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말을 하는 이들 중에는 파트로클로스로 짐작되는 목소리도 끼어 있었다. 그렇지만 굳이 바깥으로 나가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해인은 잠시 그대로 멍하니 앉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천 하나로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바깥세상과 유리된 것 같은 묘한 감각이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막사의 천을 걷고 조심스레 안쪽을 확인하는 누군가의 기척 탓이었다. 천이 흔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해인은 낯선 여성과 눈이 마주치고 눈을 크게 떴다.

“누구…….”

“아, 깨어 계셨군요.”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막사 안에 들어섰다. 손에는 청동 대야를 들고, 팔에는 천을 걸치고 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해인은 그녀가 어젯밤 만났던 이와 같은 포로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이었지만, 짓고 있는 표정만은 놀라울 만큼 비슷했던 탓이다.

해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홀로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어제는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했던 탓에 어쩔 줄 모르고 도와주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으나, 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인은 여종이 얼굴을 씻겨 주려는 것을 조심스럽게 사양하며 혼자 세수를 끝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고개를 들자 곁에서 당황한 채 서 있는 여종이 보였다. 해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도움을 사양하는 건 아니에요.”

“네? 그러면…….”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일을 못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안 할 테니까……. 누가 이 안에서 뭘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하세요.”

상대의 팔에 걸려 있던 천을 걷어 가 얼굴을 닦으며 해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혼자 하는 게 좋아서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물기를 없애고 해인은 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잠옷 같으니 옷도 갈아입기는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 입으면 또 팀블레에서처럼 어설픈 티가 날지도 몰랐다. 해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여종을 돌아보았다.

“옷 갈아입는 것만 좀 도와주세요. 이왕이면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 좋겠어요.”

“저, 마, 말을 낮춰 주세요.”

“……네, 아니, 음…….”

해인은 말을 맺지 않고 괜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너무 어려운 시대였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여종으로부터 옷의 매듭을 묶는 방법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천천히 보게 되자 별다르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기는 해도, 어설프게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성취이기는 했다. 무심코 존댓말로 감사 인사를 했다가 상대를 또다시 눈치 보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종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간단한 식사거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떠났다. 그것을 끝으로 다시 혼자 남게 된 막사 안에서, 해인은 음식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의자에 앉아 깊이 숨을 내쉬었다.

막사 안은 공기가 탁했고, 심지어는 약간 덥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의자 바로 옆의 화로에는 회색빛 재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곁에 놓여 있던 부지깽이로 몇 번 뒤적여 보자 불씨가 남아 있었다. 가뜩이나 답답한 와중에 불씨까지 확인하자 괜히 더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해인은 막사의 문 위로 드리워진 두꺼운 천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여종이 나간 후로는 왜인지 바깥이 다소 조용해진 것 같기도 했다. 홀로 고개를 갸웃한 해인은 잠시 바람도 쐴 겸 바로 앞까지만 나가 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사의 천을 걷은 뒤 한 걸음 바깥으로 나와 처음 본 것은, 병사 몇 명과 둘러앉아 주사위 같은 것을 굴리고 있는 파트로클로스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은 막사의 문을 지키듯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해인과 눈이 마주친 건 이름도 모르는 젊은 병사였다. 그는 해인을 보자마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하게 파트로클로스를 불렀다.

“파트로클로스 님! 뒤! 뒤!”

속삭이고 싶었던 것 같지만 누가 듣더라도 속삭임 수준은 한참 넘어선 목소리였다. 해인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병사의 다급함을 확인한 파트로클로스는 들고 있던 주사위를 내던지더니 얼른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마주하게 된 익숙한 얼굴이었다.

“앗,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아침이라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같았지만 해인은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는 어색하게 웃더니 몇 걸음 다가왔다.

“아킬레우스는 방금 전에 어제처럼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오늘은 에우도로스가 따라가더군요. 저는 마찬가지로 어제처럼 아가씨 곁에 있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오랜만에 한가롭다 보니 좀 들떠서 병사들과 잠시 어울린다는 게 그만…….”

놀다 보니 몰입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머쓱해하는 표정에 해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부터 회의에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으니, 오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얼마나 신났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네, 놀 수도 있죠. 저한테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제가 의무를 잊은 건 사실이니 용서를 구해야죠. 아까 여종이 오가는 걸 봤는데, 혹시 저희가 시끄러워서 깨신 건 아니셨나요?”

“아니에요. 이미 해가 중천이고…….”

말끝을 늘리며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해인은 다시 시선을 내려 파트로클로스의 등 너머를 확인했다. 병사들이 눈을 내리깔고 주섬주섬 놀던 흔적을 수습하고 있었다. 해인은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여종이 오가는 모습을 봤으면 해인이 일어난 것은 진작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계속해서 주사위를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진행 중이던 판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제가 판이 끝나기 전에 나와서 재미없어진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괜찮…….”

“이기고 있던 중이어서, 만약 제가 밖으로 나올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그 전까지 판을 끝내려 하셨다거나…….”

파트로클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해인의 말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사실이었던 탓이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마음을 읽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능력은 없어요. 하지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제 말이 전부 맞은 모양이네요.”

해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그냥 계속 이어 하셔도 괜찮아요. 별일도 없는걸요.”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혹한 표정이었다. 의무감으로 눌러 놓기는 했지만, 기껏 이기고 있던 판을 그만둔 아쉬움과 충족되지 못한 승부욕이 남아 있기는 했던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던 것까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저한테 허락을 받을 이유가 없죠……. 네, 얼마든지요.”

“그다음에는 어제 못 했으니 진영을 둘러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제가 안내하지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어제는 그리 내키지 않았던 것 같지만, 오늘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 두면 혹시 돌아가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을 때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알아 둬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것이다. 해인의 대답에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상쇄시킨 듯 파트로클로스는 밝아진 얼굴로 답했다.

“그럼요. 제가 할 일이 바로 그런 건데요.”

뒤이어 파트로클로스가 이제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 바깥에 나와 있어도 된다며 근처에서 의자를 끌어다 주었기에, 그 성의를 받아들여 해인은 의자에 앉아 게임을 구경했다. 이 시대부터 주사위를 쓰는 게임이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흥미로웠기에 나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