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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3)화 (34/149)

물론 아킬레우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도 이 뒤로 뭔가 다른 짓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늦은 시간에 하나뿐인 침대를 누가 쓰느냐로 논쟁하며 시간 낭비를 할 바에야, 차라리 같이 쓰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뿐이다. 이 이상 무엇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맨살이 닿은 것도 아니고 그저 옆에 누운 것에 불과하니 대단히 파렴치한 짓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걸 지금…….”

물론 그건 아킬레우스만의 생각이었다. 거의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의미 없는 되물음에 해인은 말문이 막혀 말끝을 흐렸다. 아킬레우스가 소리 죽여 웃었다. 해인은 깨어 있는 동안에는 거의 항상 차분한 낯을 하고 조용한 말투를 쓰지만, 이런 돌발 행동을 마주하면 지금처럼 어이없어하는 티를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재미있던 탓이다.

그는 팔에 준 힘을 약간 풀며 생각했다.

직전 그의 본능이 속삭인 것은 상대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벽을 깨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기회에 대해서다.

해인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종종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침잠하고는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속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침착하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고향이 아닌 곳에 떨어진 사람이 달리 마음 둘 곳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물론 포세이돈이라는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 존재하지만, 지중해를 다스리는 높은 지위의 신과 언제나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돌아가기 위해서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곁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무려 신께서 이야기하고 가기까지 했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그녀가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낯선 장소에서, 아무나 믿고 싶지 않아 시중드는 이조차 거부하는 해인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게 목표였다.

물론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해인과 벌써 며칠째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눴으며,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고, 해인을 지키고자 하며, 또한 분명한 호감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인의 곁에 있을 터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최고의 선택지일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자는 게 좋을걸.”

“일단 놓아주고 말하세요…….”

……물론 상대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인식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못 들은 척하며 괜히 멀쩡한 모포를 한 번 더 끌어 올려 주었다.

몸의 거리는 좁힐수록 좋았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마음의 거리 역시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불편해하니 침대를 따로 쓰게 배려해 주고자 했지만, 방금 전 떠올랐던 생각을 지금 행동으로 옮겼으니 지난 배려심은 그만 폐기할 것이다. 계획을 바꿔서, 차라리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자신에게 익숙해지도록 만들고자 했다.

지금은 고작 이 정도로도 놀라지만 언젠가는 곁에 누워 있는 것쯤은 익숙해져 오히려 기대어 오도록 할 것이다. 상대의 체온에 익숙해지고, 안겨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그리하여 그 끝에는 유일해지도록…….

물론 그것이 쉬울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않았다. 그저 쉽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감정의 문제에서는 상대적인 약자가 해인이 아니라 아킬레우스 본인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낮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해인이 그것을 모른 척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 깨달은 바였다.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닌 것이다. 하여 아킬레우스는 사실 오늘 내내 해인의 정확한 심중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막연하게 그 이유를 짐작이나마 해 보았다.

몇 가지 떠오른 것들 중 하나는 해인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커 보인다는 사실이다. 물론 단순히 그뿐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키지 않는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프티아의 유일한 왕자이자 여신의 아들로서, 어릴 적의 아킬레우스는 만나는 모든 이들로부터 떠받들어지며 자랐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마주하는 세상이 점차 넓어지자, 그도 생을 살아감에 있어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어도 그 누군가는 그의 호감을 달갑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어린 아킬레우스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이들 모두를 똑같이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러했으니, 그 반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은 당연하게도, 오롯이 그 사람 개인의 소유였다.

‘……하지만 그 틈새로 스며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아킬레우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본인이 직접 겪어 본 덕분이다. 그가 가장 신뢰하고 가까이 두는 부관, 파트로클로스가 바로 그 예였다.

어릴 적 아킬레우스가 아직 프티아에서 지내고 있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모종의 사건으로 파트로클로스가 프티아에 망명했다. 아킬레우스는 먼 친척이라며 다가오는 파트로클로스를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거부를 개의치 않고 살갑게 챙겼으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런 상황이 몇 달째 이어지자, 점차적으로 그들은 자연히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검을 맞대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함께하게 되었다. 함께하는 시간들이 겹치고 겹친 끝에 아킬레우스는 언젠가부터 파트로클로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우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듣기로, 그때의 파트로클로스 역시 단순히 아킬레우스에 대한 호의가 있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졸지에 자신의 나라를 떠나 프티아로 몸을 의탁하게 된 처지였다. 그런 이방인인 자신이 앞으로 운신을 제한받지 않고 지내려면 프티아의 하나뿐인 왕자인 아킬레우스와 잘 지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음을 몇 년이 지난 후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 자신이 파트로클로스에게 건넸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럼 이제 그 판단대로 운신이 자유로워졌으니, 내 부관 자리 말고 달리 원하는 건 없어?

그는 그 뒤로 이어진 파트로클로스의 답도 기억하고 있었다.

십 년 넘게 널 따라다녔더니 정이 들어 버린 건가, 우습지만 다른 건 딱히 생각이 안 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네가 불쾌해져서 날 버리겠다면 할 말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난 끝까지 네 부관으로 남아 있으려고.

달리 말하자면 결국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 둘 모두 처음에는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함께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신뢰하고 아끼게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비록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언정, 서늘했던 아킬레우스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챙기며 따라다닌 파트로클로스의 끈질김이었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로부터 배운 그 끈기를 해인에게 다가가는 것에 사용해 보고자 했다. 효과는 본인 스스로가 입증한 것과 같으니 해인에게도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분명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한다. 그리하여 만약 해인이 정말로 아킬레우스를 어느 순간 의지하게 된다면, 그리고 좋아하게 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참견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해인의 아버지인 포세이돈도 마찬가지다. 설마 지중해의 위대한 지배자께서 그런 성격일 줄은 몰라 의외이긴 했지만, 딸이 원한다면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같았으니 문제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킬레우스가 옛 기억과 앞으로의 미래를 떠올려 보며 계획을 세울 때, 해인은 다른 문제로 심각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기분이 서로 몹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놓아 달라니까요. 눈 뜨고 있으시잖아요.”

해인은 아킬레우스더러 침대에서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인이 나가자니 자신을 끌어안은 팔을 도저히 풀어낼 수 없어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난데없이 놀란 것으로도 모자라, 이어진 상황으로 스트레스까지 받은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나름 피의 반을 신에게서 받은 것 덕분에 현대에서의 해인은 어디 가서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호리호리하고 섬세한 겉모습에 비해서는 힘이 세서 다른 이들을 종종 놀라게 만든 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해인과 같은 반신인 데다 심지어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단련한 무인인 탓인지, 해인이 그를 물리력으로 이기는 건 아무래도 요원한 일 같았다.

또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던 아킬레우스는 슬쩍 시선을 내려 해인의 표정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기어코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것을 본 아킬레우스가 희미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쩌려고? 일어나서 다른 데서 자게?”

“그게 뭐 어때서요…….”

해인은 지금 이 상황이 더 문제라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다음 순간 아킬레우스가 그녀를 품속으로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으며 완전히 감싸 안은 탓에 그만 기회를 놓쳤다. 놓으라는 말에는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하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듯한 태도였다.

막사 안은 바깥에 비하면 바람도 불지 않고 화로도 있어 크게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따뜻하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그 탓에 온몸으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자 이 상황에 대해 경고음을 울리는 머릿속과는 별개로 몸은 나른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하던 두통마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쎄, 나도 신경 쓰여서 그런다고 하면 아무 말 안 할 건가?”

머리 위로 나직이 묻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미처 반대의 경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해인이 머뭇거렸다.

“그건…….”

벗어나려던 기색이 한풀 꺾인 것을 알아챈 아킬레우스가 피식 웃었다. 해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나는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하.”

상대의 말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해인은 아무래도 본인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게 맞는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아까 전 침대에서 자라고 했을 때 별말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혼자서 편하게 몸을 눕혀 봤자, 마음은 그와 반비례하여 하염없이 불편해지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설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지만, 원래 예언을 못 하는 인간은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지친 해인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게 없어지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타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니 그럭저럭 잊을 만했다. 그러자 조금씩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더 깊게 잠들도록 유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일 봐.”

수면 아래로 서서히 잠겨 가듯 의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틈으로, 어렴풋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주변의 공기 중을 맴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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