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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2)화 (3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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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선 채, 아킬레우스는 여종이 막사를 나가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하지만 곧장 막사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영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의 정체가 파트로클로스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를 부른 것이 아킬레우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르미돈 군대를 이끄는 이들 중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근처를 지나던 병사를 시켜다가 진작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던 파트로클로스를 도로 그가 있는 곳으로 불러내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 불렀어?”

아킬레우스의 부름에 답해 그의 앞에 선 파트로클로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기껏 하루 일정을 다 끝내고 휴식을 취하려는 마당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갑작스레 자신을 부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해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잊었지만, 아킬레우스는 변함없는 아킬레우스였다.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킬레우스는 당당했다.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이 피치 못한 사정이 아니라면, 보호해야 할 대상의 안전을 위해 해인의 근처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일을 지양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아킬레우스가 짧게 답했다.

“침대 때문에.”

“침대? 그게 왜? 다리가 부서져 있기라도 해?”

파트로클로스가 의아한 듯 연속해서 질문을 내뱉었다. 아킬레우스는 작게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두 명이 있는데 침대는 하나뿐이잖아. 지금 당장 하나 더 들여올 수는 없나?”

“응?”

파트로클로스는 예상 못 한 말에 급격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제 와서 막사의 침대가 하나인 것을 문제 삼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도 그럴 게 팀블레 왕궁의 내실에도 침대는 하나였으며, 해인과 아킬레우스는 이미 같은 방 안에서 두 번의 밤을 함께 지냈다. 그동안 침대의 개수와 관련해서는 둘 모두 아무 말이 없었고, 해인을 대하는 아킬레우스의 태도도 믿기지 않을 만큼 유했으므로 파트로클로스는 혼자서 적당히 상황을 넘겨짚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련히 한 침대를 썼으려니 여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발언은 그의 짐작을 아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그게 문제라니, 그럼 팀블레에서는 어떻게 지냈는데?”

“내가 양보했지.”

황망하게 묻는 목소리에 아킬레우스가 덤덤히 답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한참 침묵하다가, 도저히 의심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내뱉었다.

“……네가?”

“눈빛이 불손하군.”

“예……. 부관으로서 감히 보여서는 안 될 태도기는 하지요. 그런데 제 주군이 맞기는 하십니까?”

아킬레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으면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래서 지금 들여올 수는 없다는 건가?”

“어, 뭐, 아무래도 그렇지.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지 않을까 싶은데.”

얼떨떨하게 입을 연 파트로클로스가 다소 망설이는 투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그냥 같이 쓰면 안 되는 일이야?”

“내가 이걸 말 안 했나…….”

아킬레우스는 팔짱을 끼며 조용히 답해 주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손을 대기라도 하면, 포세이돈 님께서 날 두 조각으로 나눠 버리겠다 엄포를 놓고 가셨거든.”

“……음, 그걸 진작 말해 줬으면 내가 미리 두 개를 준비했을 텐데. 아무튼 알았다. 내가 뭘 오해하고 있었군.”

파트로클로스는 금세 납득했다. 당황스러움이 가라앉자 다시 오랜 시절 아킬레우스를 보좌해 온 경험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부터 챙겼다.

“내일 날이 밝으면 내가 따로 일러둘게. 오늘은 뭐, 알아서 적당히 보내고.”

“그럴 거야.”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알아.”

“……좋아, 그럼 난 이제 간다? 또 날 부를 일은 없겠지?”

“그래. 부르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가.”

확답을 듣고서 파트로클로스는 절로 새어 나오는 약한 헛웃음과 함께 등을 돌렸다. 아킬레우스는 이번에는 그 멀어지는 등을 굳이 지켜보지 않고 본인도 몸을 돌려 막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천을 걷고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온기가 훅 끼쳐 왔다. 그와 동시에 아킬레우스는 내부를 둘러보며 해인을 찾았다. 발견은 금방이었다. 해인은 화로 근처에 놓인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물이 담긴 대야도 함께 놓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케 그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 테이블 끄트머리에 걸쳐 불편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편하게 자도 될 텐데.”

살짝 혀를 차며 아킬레우스는 조용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위로 그림자가 졌음에도 해인의 눈꺼풀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늘의 일과는 곱게 자란 아가씨가 버티기에 혹독한 게 사실이었으니, 해인이 이런 불편한 자세로도 깊게 잠든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의 대야를 들어 다른 쪽으로 옮기고 혼자 몸을 씻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중에도 해인은 깰 기미가 없었다. 사실 그건 팀블레에서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므로 아킬레우스는 세안을 끝낸 뒤 대야는 바깥에 대충 내놓고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하도 곤히 자고 있어 깨우기 안쓰러운 나머지 씻는 동안은 내버려 뒀지만, 그렇다고 저대로 불편하게 계속 두면 내일은 아예 앓아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해인의 어깨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해인.”

손에 잡힌 어깨가 지나지게 얇게 느껴져 그는 의식적으로 힘을 더 뺐다. 아주 가볍게 몇 번 토닥이자 그제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뒤이어 해인이 느리게 눈을 떴다.

“아…….”

해인은 자신을 깨운 이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상체를 세웠다.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를 보며 아킬레우스가 힐끗 눈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여기서 졸고 있지 말고 저쪽 침대에서 자.”

“……음, 침대요.”

자다 깬 탓에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였고 어조도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머뭇거리며 눈을 짧게 문지른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더니 질문해 왔다.

“제가 저걸 쓰면 당신은요?”

“이렇게 피곤해하면서 날 신경 쓸 정신까지 있군.”

아킬레우스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팀블레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같이 쓰기 싫으면 그쯤 해 두라는 말을 하고서야 입을 다물던 해인을 떠올리며 그녀를 일으키려는데, 또다시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는 그냥 당신이 쓰는 편이 낫지 않나요.”

“왜 그렇게 싫어해? 편하게 지내라는 건데도.”

“마음이 불편해서…….”

“흠.”

말로써 들은 것은 처음이지만 역시 이유는 짐작한 그대로였다.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것은 몸이 힘들지 않더라도 심적으로 부담된다는 소리다. 신께서 그토록 아끼는 자식이니 안하무인으로 자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데, 이 정도로 타인을 신경 쓸 줄 안다는 것은 확실히 신기했다.

작게 침음하며 아킬레우스는 침대를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자 문득 아까 전 파트로클로스의 반응이 떠올랐다. 팀블레에서부터 이미 같은 침대를 써 왔다고 오해한 기색이 역력했고, 여기서도 그냥 같은 침대를 쓰면 안 되는 일이냐고 묻던 표정 따위가 뜬금없이 생각난 것이다.

이제야 자세히 본 침대의 크기는 확실히 작지 않았다. 내일은 침대를 하나 더 준비해 놓으라고 불과 직전에 말을 전하고 오기는 했고, 또 받아 두었던 경고도 있기는 했으나…….

불현듯, 아킬레우스는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의 속삭임을 들었다.

“……뭐, 그래. 그렇다면 알았어.”

아킬레우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할 표정으로 해인의 말에 답했다. 그러고는 해인이 무어라 답할 틈 없이 팔을 뻗더니, 다음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이를 그대로 휙 안아 들었다.

“자, 잠깐, 뭐 하는……!”

바로 전까지도 상체만 세우고 있었을 뿐 여전히 잠기운에 취해 있던 해인은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찰나에 높아진 시야와 자신을 단단히 안아 든 팔의 체온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본 중에서 가장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듯 밀어내는 손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며, 아킬레우스는 그리 멀지 않은 침대로 태연히 걸어갔다.

“아마 기억날 거라고 생각하는데, 팀블레에서 분명 이런 대화를 이미 한번 했었지.”

아킬레우스가 미약하게 웃음기 섞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해인은 잠깐 멈칫했다. 그 말대로 기억은 확실히 났다. 해인은 팀블레의 내실에서 보낸 첫날 아킬레우스와 했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환청처럼 재생되는 것을 느꼈다. ‘같은 침대에 눕고 싶은 게 아니면 이쯤 하는 게 좋을 걸’ 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정확한 문장이 아주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니, 그렇지만……!”

해인이 반박하려는 사이 침대 바로 옆에 도착한 아킬레우스는 몸을 숙여 해인을 그 위로 내려놓고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힘을 더 가할 수는 없어서, 그대로 얹어 놓고만 있는 채로 크게 뜨인 새파란 눈을 마주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차라리 몸이 불편하고 말겠다는 생각인 건 알겠어. 그래서 침대는 내가 썼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잘 알겠고……. 그러니 그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지.”

그 말이 기묘하게도 논리적인 탓에 해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침대 위에 무릎을 올려 몸을 기울이며 해인의 위로 모포를 덮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해인의 곁에 몸을 눕혔다.

해인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꼭 그것까지 예상한 듯 찰나의 순간을 두고 아킬레우스의 팔이 해인을 붙잡듯 끌어안았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해인을 가두듯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아선 그가 씩 웃으며 짧게 덧붙였다.

“안 그래?”

이미 전부 행동으로 옮겨 놓고 의견을 묻는, 그 누가 봐도 의미 없는 덧붙임이다.

심지어 그 말을 한 사람은 불과 몇 분 전 포세이돈이 자신에게 어떤 협박을 했는지 제 부관에게 낱낱이 알려 주었던, 신으로부터 협박당한 당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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