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이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아킬레우스도 같은 것을 발견한 차였다. 다만 그도 이번에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막사에 해인이 쓸 침대를 하나 더 넣어 두라고 파트로클로스에게 미리 언질을 했어야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전령이 온 탓에 곧바로 회의에 참석하느라 그것을 잊었던 것이다.
팀블레에서는 어차피 곧 떠날 터라 적당히 지냈지만, 테베에서는 공성이 끝나고 왕족들을 잡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단언할 수 없었다. 제법 오래 지내야 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해인은 본인 혼자 침대를 쓴다는 것에 불편을 느끼는 모양새였다. 자신 때문에 타인이 불편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아킬레우스를 그만큼은 신경 쓴다는 뜻이니 그 자체에 있어 나쁠 것은 없었다. 다만 테베에서 지내는 내내 그렇게 내버려 두면 그러잖아도 여성이 지내기 힘든 막사의 환경에, 심적으로도 불편하여 더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도 매번 불편하게 잠들 수는 없는 일이고, 침대를 하나쯤 더 들여놓는 것은 별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것으로 해인이 잘 때나마 마음이 다소 편하다면 남는 장사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했었던 만큼, 지금의 이 상황은 적당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것 역시 어려울 건 없었다. 파트로클로스에게 당장 침대를 하나 더 준비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안 된다면 내일까지는 준비해 놓으라고 이야기를 해 두면 되는 문제다. 해인을 힐끗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혹시나 하며 막사의 천을 걷고 바깥을 보았다.
이미 점처럼 작아진 파트로클로스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비로소 쉴 생각에 들떴는지 제법 빨리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막사로 돌아간다 한들 상관이 부르면 나와야 하는 게 부관인 것이다.
“해인.”
다시 막사 안으로 돌아와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돌아보며 이름을 불렀다. 하나뿐인 침대를 보며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던 해인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창문은 없이, 그저 화로와 등잔불만 몇 개 존재하는 탓에 그리 밝지 않은 막사 안에서도 선명한 이목구비는 담담한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우선……. 팀블레에서 잡았던 포로들의 분류 작업이 끝났으니, 그중 하나에게 그대의 시중을 들라는 말을 해 뒀어.”
아킬레우스도 파트로클로스로부터 해인이 시중들 사람을 거부했으며, 그 이유는 아마도 낯선 곳에서 아무나 믿기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장소에서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곁에 붙어 있지는 않을 테고, 그런 만큼 사람은 계속 바뀔 테지만. 어쨌거나 아침과 저녁에 잠시 들러 도와주고 떠날 테니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이런저런 요소들을 전부 고려하여 배려의 차원에서 취한 조치였다. 파트로클로스가 제안한 것이었으니 섬세함에 있어 부족하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 말을 들은 해인은 시중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멈칫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하나하나 모든 일을 수발드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필요하지도 않지만, 확실히 지금처럼 씻을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도와줄 사람이 한 명쯤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멈칫했을 때 무언가 할 말이 있나 싶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말없이 고민하는 얼굴이던 해인은 이내 수긍한 표정을 했고, 그것을 확인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종에게 지금 물을 들고 오게 시킬 테니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군. 난 잠시 나가 있을 거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생긴다면 소리를 질러.”
“네에…….”
옷을 갈아입는 것과 바깥으로 나가 있겠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어젯밤이 생각났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었기에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관련된 생각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 해인은 얼른 떠오른 기억들을 애써서 지웠다.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정말 바깥으로 휙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여성 한 명이 물이 가득 담긴 청동 대야를 든 채 막사의 천을 걷고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막사 안을 한번 둘러본 그녀는 해인과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눈을 내리떴다. 뒤이어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대야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해인은 어색하게 선 채로 그 여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한눈에 보더라도 마음고생을 꽤나 한 티가 났다. 얼굴에는 선명하게 우울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팀블레에서 잡아들인 포로라는 말이 그제야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포로라는 단어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에, 상대를 마주하고 나서야 해인은 그게 어떤 무게를 지닌 단어인지 알 것 같았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자 고개를 들어 해인을 바라본 여종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리 와 주시겠어요?”
“아, 네.”
해인은 당황하며 다가갔다.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우울함이 묻어 나오기는 했으나, 어조만은 아주 사근사근하고 온화했다. 그러나 해인이 다가서자 정작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란 얼굴로 해인을 보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게 존대를 쓰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럼 씻으시는 것을 먼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 음…….”
그 예의 바른 말투에서 느껴지는 체념에 해인은 결국 아무런 답도 못 했다. 존대를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단번에 말을 놓는 것도 심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해인은 일부러 입을 다물어버렸고, 그들은 아주 미묘한 공기 속에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았다.
얼굴과 손발을 씻는 것,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도와준 여종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잠시 나가 대야의 물을 갈아 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 둔 채 완전히 막사를 나갔다. 저 새로운 물은 이 막사를 함께 쓰는 다른 사람의 몫일 것이다.
그로부터 눈을 돌리며 해인은 막사를 나서는 여종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막사의 천이 크게 펄럭였다가 가라앉고, 혼자 남았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비로소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무언가 얹힌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그 행위와 관련해서는 며칠 전과 달리 불편을 미처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해인은 그토록 자신을 혼란하게 만든 것의 기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나칠 만큼 생생하게 와 닿는 그것은, 그 여종이 느끼던 거대한 무력감이었다.
괜히 지쳐버린 해인은 근처 의자에 늘어지듯 걸터앉아 화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어려운 시대네…….”
지금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아득한 과거의 땅이다. 그것도 무려 기원전 십이 세기로, 단순 숫자로만 계산해 보면 해인이 살아가던 세상이 오기까지 삼천 년하고도 몇 백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토록 오래된 옛날이니만큼 현대를 살아가던 해인의 마음으로는 납득 가지 않는 일들도 수없이 많을 게 분명했다.
해인은 문득 저 여종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다음 순간 그것이 값싼 동정은 아닌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솔직해지자면 그저 막연히 드는 생각이었을 뿐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는 게 옳은지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런 만큼 다짜고짜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몰랐다.
‘게다가 시대가 다르니까 내가 누굴 비판할 자격도 없고.’
팀블레를 무너트리고 그곳의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 오고, 그들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부리는 것은 이 시대에서 당연한 일을 한 것에 불과할 터다. 점령지에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달리 할 일이 없을 것은 자명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불과 며칠 전 전혀 다른 시대에서 이곳으로 불시착한 이방인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었다.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쯤 생각했을 때 해인은 눈이 따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눈을 돌리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불꽃을 보고 있던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해인은 테이블에 엎드렸고, 팔에 얼굴을 묻으며 직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을 흘려보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현실적으로 나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그녀는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큰 문제 하나를 이미 떠안고 있었다. 대단한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남의 사정에까지 기웃거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제 팀블레에서부터 테베로 장소를 옮겨 왔다. 이곳에서는 과연 귀환하기 위한 조건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자,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러나 나빠진 기분을 생생히 체감하기 전, 다행히도 조금씩 의식이 흐려졌다.
일단 눈을 감고 있으면 몸이 피곤하지 않아도 잠들 수 있었다.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인은 순순히 밀려오는 잠기운을 받아들였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꽃 소리만이 작게 들려오는 가운데, 해인은 짧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