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쯤 더 걸어 막사가 작게 보일 만한 거리에 이르자 자연히 막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긴 했지만,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워낙에 눈에 띄는 데다 남들보다 체격이 크기도 한 탓에 멀리서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해인이 그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그녀의 곁에서 파트로클로스가 반가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와 있었군요. 잘됐네요.”
해인은 그게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깐 잊고 있던 불편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갔고, 파트로클로스는 별생각 없이 해인의 보폭에 맞춰 주었다.
그렇게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아킬레우스가 불현듯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둘을 발견했다. 파트로클로스가 손을 몇 번 흔들며 아는 척하는 사이, 해인은 몇 시간 만에 보는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 곁에 또 다른 낯선 사람이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있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세월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아킬레우스의 곁에 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왜소해 보였지만, 따로 두고 보면 젊었을 적에는 상당히 체격이 좋았을 법한 풍채였다.
해인은 그의 빛바랜 머리카락을 보고는 파트로클로스가 부관들과 이야기하며 몇 번 언급했던 이름을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는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곁에 계시는 저분이 포이닉스 어르신이라고 부르시던 분인가요?”
“아,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잠시 말했던 게 전부인데 금방 짐작하시다니 영민하십니다.”
“어, 네……. 고마워요.”
고작 이런 일로 듣기에는 지나치게 후한 칭찬이었다. 해인은 파트로클로스의 흐뭇해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머뭇거리는 어조로 답하며 눈을 피했다. 그녀를 보며 파트로클로스는 다시금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 막사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져, 어느덧 막사 앞에 서 있던 아킬레우스의 바로 앞이었다. 자연스럽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해인과 파트로클로스는 나란히 걸음을 멈췄다. 파트로클로스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아킬레우스, 돌아와 있었네. 그리고 포이닉스 어르신도 계셨군요.”
기실 이미 멀리서부터 누구인지는 알아봤지만, 그것과 인사는 별개인 법이었다. 포이닉스가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는 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불현듯 파트로클로스를 힐끗 응시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지척에 두는, 그의 측근들 중에서도 가장 믿을 만한 부관을 보는 눈길이라기에는 갑작스럽게도 살갑지 않았다. 물론 평소라고 그리 살가웠던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다른 시선이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파트로클로스가 멈칫하며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해인에게 눈길을 돌린 뒤였다. 아킬레우스는 꼭 무언가를 살피는 것처럼 해인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물었다.
“진영을 돌아보고 온 건가?”
처음 목적은 그것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것은 파트로클로스에게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기에, 예상 못 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 해인은 몇 초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아, 네. 실은 부관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그분들과 인사를 나눴어요.”
“부관?”
되물음에 파트로클로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거야. 그리고 최소한 그들 정도는 얼굴을 익힐 필요가 있는 게 맞잖아.”
파트로클로스는 아주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듯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건 꼭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새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목소리에는 기막혀하는 투가 섞여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킬레우스를 쫓아다니며 그를 보좌한 지도 어느덧 십 년이 한참 넘은 바, 파트로클로스는 원하지 않아도 아킬레우스의 얼굴만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지 오래였다.
바로 방금 전의 그 평소 같지 않은 눈길과 저 태도를 보면, 아킬레우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짐작하면서도 설마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명했다. 질투한 것이다. 파트로클로스가 해인과 나란히 걸어온 것부터 시작해, 자신이 없는 사이 제 부관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게 틀림없었다.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실에 애써 웃음을 참는 파트로클로스를 본 아킬레우스가 잠시 멈칫했다. 그 얼굴을 보자니 불현듯 정신이 든 탓이었다. 그는 직전까지 자신이 보였던 태도가 평소와 다소 달랐음을 알아챘고, 파트로클로스의 반응을 이해했으며, 자신이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도 금방 깨닫고 말았다.
‘……초조해서.’
오늘 낮, 해인의 눈을 보며 알아차린 현실 탓이다.
그저 단순히 가지고만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사람을 곁에 두고 가능한 길게 지켜보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마음을 본인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하던 해인의 기색을 눈치채서다. 때문에 무작정 초조해진 마음이 그를 평소 같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게 다인가?”
“그래, 그게 다야. 무엇보다 깨닫고 보니 에우도로스가 아가씨의 꽤 가까운 친척이잖아. 그래서 아가씨는 에우도로스와, 나는 나대로 다른 녀석들과 대화를 좀 나눴는데 어느새 해가 지더라고. 결국 진영은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왔어.”
“에우도로스……. 아, 그렇군.”
잠깐의 생각 끝에 에우도로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떠올려 낸 아킬레우스가 납득했다. 에우도로스의 아버지는 헤르메스이고, 그는 해인의 아버지인 포세이돈의 조카였다. 확실히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그사이 파트로클로스는 겨우 웃음기를 가라앉혔다.
“아킬레우스, 이제 포이닉스 어르신을 아가씨에게 소개해 드려야지.”
그러자 줄곧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노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제 차례로군요.”
그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시선을 돌려 해인을 바라보았다. 아킬레우스는 그를 힐끗 바라본 뒤 수긍했다.
“그래…….”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해인을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그 순간 우연히 해인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다와 같은 짙푸른 눈동자가 순간 동요한 듯 잘게 파문을 일으켰다. 그 색채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아킬레우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포이닉스를 소개했다.
“이쪽은 들었다시피 포이닉스. 이번 전쟁에서는 부관으로 참전했지만, 원래는 어릴 적 내 스승이셨지.”
아킬레우스의 말이 끝나고 포이닉스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어 왔다.
“포이닉스입니다. 늙은 몸이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전쟁터에 따라왔지요. 헌데 뜻밖에도 이렇게 귀한 아가씨를 뵙게 되는군요.”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으로부터 존댓말을 들은 해인은 당연하게도 불편해졌다. 그녀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뵙게 되겠지요.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볼 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해인은 수용적인 태도로 온화하게 답했다. 연장자를 대할 때는, 그리고 그 연장자가 심지어 먼저 정중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을 때는 마땅한 존경을 보이는 게 옳다고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 답을 끝으로 서로 간의 인사가 마무리된 듯하자 파트로클로스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이로군요.”
그 말에 해인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막사 앞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주홍빛이 더 많이 남아 있던 하늘은 어느새 부드러운 남청색으로 반 이상 물들어 있었다. 깨닫고 보니 기온도 어느새 제법 내려가서,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찼다.
“아킬레우스, 내일 보자. 난 이만 내 막사로 돌아가야겠어.”
“나도 그래야겠군.”
파트로클로스와 포이닉스가 나란히 중얼거렸다.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아킬레우스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아가씨도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파트로클로스가 해인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남기고는 포이닉스와 함께 등을 돌렸다. 별다른 말 없이 빙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던 해인은,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침내 아킬레우스와 둘이 남겨졌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각한 순간 미약한 긴장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다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팀블레 왕궁에서도 같은 방에 있었을 정도였으니, 왕궁보다 안전하지 않을 야외에 세워진 막사라면 굳이 말할 것도 없이 그와 함께 써야 될 것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약간 아득한 기분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때, 난데없이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해인은 뺨을 스치는 서늘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러자 파트로클로스와 포이닉스가 등을 돌린 순간부터 줄곧 해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던 아킬레우스가 직전까지의 침묵을 깨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들어가자. 안은 따뜻할 테니.”
옷감 위로 닿았음에도 커다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선명했다. 해인은 그를 힐끗 올려다봤다가, 닿은 손을 어색하지 않게 떨쳐 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이끄는 힘과 함께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의 역할을 하는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바깥보다 한결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차단된 데다 막사 안에서 선명히 타오르는 화로 탓이었다. 해인은 막사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팀블레의 왕궁 안 내실보다는 확연히 좁았다. 그러나 막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심코 상상했던 것에 비해서는 지내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현대와 비교하면 왕궁 안 내실의 시설도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휘관의 거처인 탓인지 여기저기 신경 쓴 티가 났다.
바닥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침대도 있었으며, 긴 의자와 스툴, 작은 테이블 등 왕궁의 내실에도 있던 대부분의 가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해인은 그 가운데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건 아주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블레에서부터 해인의 신경을, 혹은 양심을, 다르게 말해서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건드리던 문제였다.
멀쩡히 누워 잘 수 있을 만한 침대는 또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