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며칠 동안 회의가 이어질 텐데, 그동안은 제가 곁에 있겠지만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는 저도 전장에 나가게 됩니다. 물론 그 때부터는 또 다른 믿을 만한 자들을 아가씨의 호위로 붙일 것이고, 또 진영 안은 대부분 비어 있을 테니 크게 걱정하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걸음을 옮기며 해인을 힐끗 돌아본 파트로클로스가 설명했다. 말을 이어 가며 그는 근처를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쭉 훑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하더니, 해인을 돌아보며 권했다.
“마침 저쪽에 아킬레우스의 다른 부관들이 있군요.”
“다른 부관들이요?”
“예, 부관이 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들에게는 제가 앞서 언질을 해 놨기 때문에 아가씨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사라도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해인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무료해할까 봐 이것저것 권하는 티가 났다. 이럴 때는 그의 체면을 신경 써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해인은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수락했다.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두 사람은 부관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방향을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부관들 역시 다가오는 둘을 발견했다. 부관들은 곧장 자신들끼리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다가오는 파트로클로스와 해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잖아도 실은 해인의 정체와 그녀를 대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더 이어 갈 수도 없었다.
파트로클로스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고, 아킬레우스의 심상치 않은 태도도 불과 반나절 전에 먼발치에서나마 잠깐 목격했으니, 그들은 대놓고 해인을 빤히 쳐다보는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그들은 힐끗거리며 해인을 슬쩍 바라보다가, 이내 조심히 시선을 비꼈다. 그러고는 파트로클로스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봐……. 음?”
가까이 다가가며 자연스레 부관들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에게 꽂혀 드는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하나같이 모두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은 눈빛이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이내 부관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눈길을 보내는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아니,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어차피 인사 나누게 해 주려고 온 건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렇게 눈을 빛낼 만큼 해인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짧게 언질을 해 주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의문을 충족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 그 자신조차 아킬레우스가 보이는 낯선 모습에 놀라고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아킬레우스와 별다른 대화조차 못 하고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을 테니 두 배로 신기해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파트로클로스의 곁에 있던 해인 역시 눈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관들이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부터 이미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풍경이었기에,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곤두세우고 있던 긴장을 내려놓았다.
“파트로클로스.”
“그래, 에우도로스. 다들 뭐 하고 있었어?”
그들 중 하나가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아 주었다. 에우도로스라고 불린 이는 파트로클로스보다 키가 제법 컸고, 아킬레우스보다 조금 더 색이 옅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의 곁에 선 채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지길 기다리며 해인은 에우도로스를 비롯해 다른 부관들도 가만히 살펴보았다. 총 네 명이었고, 이런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두 남자였다.
“이럴 때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다들 대화나 나누고 있었지.”
에우도로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들 한가해 보이기는 하더라.”
마주 웃으며 대답해 준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에우도로스의 표정에서 ‘그러니까 지금 네 옆에 있는, 어쩌면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자비로 모셔야 할지도 모르는 분을 빨리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읽어 냈다.
어차피 해인에게 먼저 부관들을 소개시켜 주겠다 약속하고 온 참이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 인물에 대해 먼저 질문했다.
“그런데 포이닉스 어르신은? 설마 멀쩡한 젊은 사람 넷을 두고 그분이 아킬레우스를 따라 회의에 참석했나?”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또 다른 이였다.
“그분께서 직접 가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로서는 말릴 수가 없죠. 무엇보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분 정도는 되어야 숙부님을 무사히 보좌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인은 그의 말 중간에 들린 단어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문맥상 방금 저 사람이 언급한 숙부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아킬레우스를 뜻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를 숙부라고 부른다면, 그건 그의 손위 형제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몇 시간 전 불사의 말들로부터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 이야기를 들었던 해인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들 부부에게 자식은 아킬레우스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저 사람의 부모는 누구이기에 아킬레우스를 숙부라고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던 탓이었다.
“나이 드신 분을 너무 고생시키는군.”
그사이 파트로클로스는 홀로 혀를 찼다. 부관들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포이닉스 어르신을 무시하면 안 돼. 그분은 아직 정정하셔.”
“그래. 그러니까 파트로클로스, 이제 그쯤 하고 우리한테 네 곁에 있는 분의 귀한 이름을 들을 기회를 줄 생각은 없나?”
결국 대놓고 튀어나온 요청에 파트로클로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슥 들었다 내렸다. 그는 뒤이어 해인을 돌아보며 직전보다 조금 더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자, 아가씨. 다들 그리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각자 한 사람 몫은 하는 자들입니다. 이쪽은 여럿이고 아가씨께서는 한 명이시니, 먼저 이들에게 아가씨의 이름을 알려 드리는 게 어떨까요?”
“……아, 네.”
해인은 숙부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켜 보냈다. 그녀는 부관들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잠시 신세 지게 되었어요. 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 곁에서 해인이 자신을 보지 않는 틈을 타 파트로클로스가 소리 내지 않고 포세이돈의 이름을 입 모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신께서 몹시 아끼시는 따님이니 알아서 태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이미 반나절 전에 한번 언급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특히나 나이 지긋하고 지혜로운 포이닉스도 없는 마당이었으니 파트로클로스는 주의를 여러 번 주어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포세이돈이 해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본 사람이었고, 때문에 해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해인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파트로클로스는 부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손을 뻗었다. 그는 아주 여상한 태도로 가장 왼쪽에 선 이부터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여기는 순서대로 메네스티오스, 에우도로스, 페이산드로스, 그리고 알키메돈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포이닉스 어르신까지 하여 원래는 다섯인데, 들으셨다시피 그분께서 오늘 저를 대신해서 회의에 가신 탓에 지금은 계시지 않는군요.”
누가 봐도 과보호 중인 파트로클로스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본 것도 잠시, 그가 가리킨 순서대로 부관들은 순순히 차례를 지켜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마침 가장 첫 번째인 메네스티오스는 숙부라는 단어를 사용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저는 테살리아의 강의 신, 스페르케이오스의 아들 메네스티오스라고 합니다. 지휘관께서는 제 숙부님이 되시기도 하는데, 저의 어머니가 그분의 이복 남매이기 때문이지요.”
숙부라는 호칭에 대한 비화를 알게 된 해인은 형제 관계에 있어 이복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기에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다행히 티는 내지 않았지만,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전혀 저어하지 않는 기색이었으니,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인식의 시대적인 차이 같았다.
메네스티오스의 말이 끝나자 그 옆에 있던 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치고 들어왔다. 아까 전 파트로클로스와 대화를 나눈 사람, 에우도로스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에우도로스입니다. 헤르메스 님께서 제 아버지가 되시지요. 그리고 포세이돈 님께서는 제 아버지의 숙부님이시니, 제가 당신의 종질이 되는군요.”
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건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이야기였다. 해인의 어머니는 형제가 없었기에 외가의 어른들은 조부모님이 전부였고, 아버지인 포세이돈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족들을 모르는 존재 취급해 왔기에 친가 쪽의 친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호오.”
물론 놀란 것은 해인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에우도로스와 해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작게 감탄했다. 두 사람의 생김새에서 닮은 구석은 딱히 찾아볼 수 없었고, 처음 뵙는다는 인사말처럼 지금까지 단 한 번 만난 적조차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 정도면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그 뒤로 페이산드로스와 알키메돈까지 소개를 이었다. 그들은 파트로클로스와 같이 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완전한 인간으로, 다른 둘에 비해서는 아침에 보았던 아우토메돈처럼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무예를 단련한 사람들 특유의 기세가 있었다.
네 명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등 돌려 헤어질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잠시 사소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메네스티오스와 페이산드로스, 알키메돈이 파트로클로스와 대화하는 동안 해인은 에우도로스와 어울렸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오촌 정도면 나름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니까요. 기회가 빨리 와서 좋네요.”
“그러셨군요.”
“혹시 저만 들떠 있습니까? 저를 경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에우도로스가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친척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해인에게 퍽 살갑게 굴었다. 그 태도에 눈을 몇 번 깜빡인 해인은 이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붙임성 좋은 상대 덕분에 해인은 크게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에게 해인을 부탁받았던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던 파트로클로스가 그런 둘을 힐끗 보고 안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대화하는 사이에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파트로클로스가 본래 계획했던 진영 안내는 그 시점부터 사실상 물 건너간 것과 다름없었다. 해가 지고 금세 어두워질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아직 주변이 밝을 때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그에 대해서 다른 부관들도 일치한 의견을 보였기에, 그들과 헤어져 막사로 되돌아가며 파트로클로스는 머쓱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결국 진영은 돌아보지 못했군요.”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에우도로스에게 후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어요.”
그가 친밀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덕분에 어색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인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빙긋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