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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반나절도 안 될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가 되었을 즈음 아킬레우스의 군대는 테베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테베의 성벽이 보이는 들판 위, 그들이 진영을 세울 장소였다.
도착과 동시에 병사들과 시종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인의 체감상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듯했는데 이미 천막 여러 개가 세워져 진영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곁에서 해인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몇 시간 전 잠시 쉬어 갈 때 있었던 그 감정적 사고가 이제 겨우 수습된 기분이었다. 사실 미묘한 공기는 이미 진작 흩어진 지 오래였지만, 당사자인 해인은 그렇게 쉽게 긴장을 풀 수 없었음이 문제였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감정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던 것을 당사자가 눈치채 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떠올릴수록 그 생각에 더 매몰되는 것 같았기에 그녀는 애써 생각을 끊어 내며 괜스레 주변 풍경을 살폈다.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해인은 물론이고, 대화를 나누던 둘도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저 멀리서 사람을 태운 말 한 마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들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춰 세우고는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곧장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와 아킬레우스의 앞에 멈춰 섰다.
“아킬레우스 님.”
달려오는 말을 발견했을 때부터 몸을 슬쩍 틀어 해인을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아킬레우스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지?”
해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혹은 방금 전 파트로클로스와 대화를 나눌 때와는 확연히 결이 다른 어조였다. 그러나 병사는 당연하다는 듯 한쪽 무릎을 굽혀 땅에 대고 몸을 낮춘 뒤 예의 바른 어투로 답했다.
“저는 아가멤논 왕의 휘하에 있는 전령으로, 왕께서 저를 보내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셨습니다. 곧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마침 아킬레우스 님께서 도착하셨으니 가능하시다면 참석하여 지혜를 나눠 주시길 왕께서 요청하셨습니다.”
“아, 아가멤논 왕이…….”
아킬레우스가 낮게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는 어조였다. 그 기색이 다소 노골적이었던 탓에 흠칫 놀란 전령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내키지 않는 듯 인상을 쓴 아킬레우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알았다. 곧 가겠다고 전해.”
아킬레우스의 무위가 다른 장군들 여럿을 합친 것보다도 대단했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연합군의 거대한 축을 맡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명예를 가졌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도 따라왔다. 회의에 참석하기 싫다고 해서 정말 안 갈 수는 없었다.
“예! 감사합니다.”
전령은 혹여나 젊은 장군의 마음이 바뀔 것을 우려하는 듯 다급하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 세워 둔 말을 향해 달려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사이 아킬레우스가 뒤돌아섰다.
“잠시 가 봐야겠군.”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해인은 평소처럼 차분한 어투로 답했다.
“네, 들었어요.”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다시 시선을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바다 같은 새파란 눈은 아주 평화롭고 침착했다. 그 속에서는 무엇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꿔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눈짓한 뒤 다시 해인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회의는 아마 오래 걸릴 거야. 팀블레의 왕궁 안에서는 혼자 있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그때 말했던 것처럼 파트로클로스를 곁에 두고 갈게. 가급적이면 파트로클로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
해인이 답하기도 전에 파트로클로스가 빙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잘 살피고 있을 테니까.”
해인은 파트로클로스가 신나 있음을 그의 목소리로부터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파트로클로스를 올려다보았고,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을 마주 보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가 좀 더 인상을 썼다. 하지만 뱉은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믿고 다녀오지.”
그것을 끝으로 아킬레우스는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갔다. 푸른색 옷자락이 크게 한 번 펄럭였다. 해인은 잠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늦은 오후의 짙은 색 햇살이 금빛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자 마치 광물 같은 반짝임이 일었다. 정말로 더없이 화려한 색이다. 어떻게 염색하지 않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저런 색을 가질 수 있는지, 절로 감탄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 해인은 다소 길게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파트로클로스가 줄곧 조용히 서 있었음을 그제야 겨우 눈치챘다.
멈칫하며 곁으로 고개를 돌리자 파트로클로스는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해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인은 그 표정이 시사하고 있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걸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까, 그냥 모른 척해야 할까…….’
주어를 꺼내기도 애매했지만, 주어 없이 이야기를 하면 지레 찔려 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해인은 어쩔 도리 없이 어색해졌다.
“저…….”
머뭇거리며 해인이 입을 뗐다. 하지만 뒤로 이어 갈 말이 곧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난처해하는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파트로클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활기차게 말했다.
“네, 아가씨. 아킬레우스는 일하러 갔군요. 그럼 저희는 잠시 한가함을 즐겨 볼까요?”
“……한가함을요?”
해인이 되묻자 파트로클로스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예, 사실 저는 이렇게 아킬레우스를 보좌하는 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가 아주 드물거든요. 게다가 회의에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니 정말……. 좋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줄곧 느껴지던 신난 기색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뱉어 낸 문장들에 해인은 그가 신이 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물론 깨달았다뿐이지 이해한 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의 곁을 벗어났다고 한들, 해인의 곁에 붙잡혀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차피 완전한 자유 시간도 아닌 것이다.
해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사자인 본인이 느끼는 바는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런가요.”
게다가 사실은 파트로클로스가 곁에 있는 편이 해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홀로 낯선 곳에 있는 것보다는, 그리 친하지 않더라도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 곁에 있는 편이 마음이 놓이는 건 당연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파트로클로스는 가장 적격인 사람이었다. 오히려 편한 정도로는 아킬레우스보다 이쪽이 더 나았다.
한편 파트로클로스는 겉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속으로도 신나 있었다.
물론 해인의 생각대로 완전히 혼자 남겨져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킬레우스를 따라 회의에 가는 것보다는 해인의 곁에서 그녀를 살피는 게 몇 배는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지금쯤 아킬레우스가 참석했을 회의 분위기와는 이미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평화로웠고 한가했다.
아킬레우스가 또 회의 도중 제 성질을 못 이겨 소소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건 이번에 자신을 대신해 부관 자격으로 참석했을 다른 누군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 표정의 침착하고 차분한 아가씨가 떠나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는 모습까지 목격했으니 수확도 없잖아 있었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다른 장군들의 헛짓거리에 열 받은 채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가 본 것을 넌지시 알려 주면 어울리지 않게 착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예, 그렇습니다.”
속으로는 남의 연애를 즐기면서도 겉으로는 예의를 차려 답한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아직 막사가 완성되려면 멀었고, 해가 지기도 전이었으니 해인에게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되는 곳은 어디까지인지 알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피곤하시겠지만 막사가 완성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잠시 근처라도 좀 돌아보시겠습니까?”
해인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굳이 돌아다니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으나, 근처에 딱히 쉴 만한 곳은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또한 팀블레의 왕궁 안과는 달리 이곳은 상대적으로 트여 있는 공용 공간의 느낌이 강했다. 그런 장소에서 얼마나 오래 있게 될지 모르니, 안전과 편리성을 위해서라도 주변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네, 그럴게요.”
“좋습니다. 그럼 저쪽 방향으로 먼저 가 보죠.”
파트로클로스는 빙그레 웃으며 앞장섰다.
“지금부터 제가 안내해 드리는 곳은 전부 저희 미르미돈족 병사들이 지내는 아킬레우스의 진영입니다. 오늘 이후로는 아가씨에 대해서 병사들에게도 간단하게나마 일러둘 예정이니, 무례하게 구는 자들은 없을 것이고요. 혹시나 있다면 그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겁니다. 그러니 너무 멀리 가지만 않으신다면 어느 정도는 혼자 다니셔도 됩니다.”
앞장서기는 했지만 사려 깊게 속도와 보폭을 조절했으므로, 해인은 이내 어렵지 않게 그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