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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27)화 (28/149)

아킬레우스의 경고 섞인 눈길에 은근히 그들이 있는 곳을 힐끗거리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곧장 와르르 흩어졌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들의 호기심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히마티온을 뒤집어쓰고 있던 정체 모를 이가 여자였는데, 그 여자와 지휘관이 함께 있으니 충분히 궁금해할 만한 일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다. 이해와 허락은 늘 별개였다.

파트로클로스의 짐작대로 그는 저 멀리서 파트로클로스와 대화할 때부터 해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히마티온이 벗겨진 것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줄곧 답답해하는 기색이었으니 아마 본인이 무의식중에 벗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얼굴을 가려야 하는 이유를 정작 당사자인 해인에게는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음이 한발 늦게 떠올랐다.

물론 그 이유란 것이 별다르게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으니, 일부러 감추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옷을 입혀 주는 과정에서 그녀가 옷 입는 방법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다른 의문을 꺼내 들다가 그만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수는 실수였다. 시선을 전부 쫓아 놓고 다시 해인을 돌아본 그는, 해인의 등 뒤로 늘어져 있던 히마티온 자락을 살짝 잡아 들며 말을 돌렸다.

“꽤 불편했던 모양이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 말에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전 별생각 없이 거슬리는 천 자락을 머리 뒤로 치웠음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뒤늦게 생각난 사실에 약간 당황하며 해인이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보고 있는 이의 얼굴은 해인의 예상보다 훨씬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해인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유지했다.

아침에는 분명 어색하게 굴었지만, 몇 시간이 흐른 지금은 해인 역시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에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의문도 있어서, 해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꼭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하나요?”

히마티온으로 얼굴을 가리고 바깥으로 처음 나가게 되었을 때부터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여기면서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놀랍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을 깨닫자 이제 와서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스스로에 대한 의문과는 별개로, 어쨌든 해인은 이제라도 자신이 왜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시대적인 이유로 여성이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만 하는 것이라면 해인으로서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아우토메돈이나 아킬레우스가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으니 그런 이유는 아닌 듯했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지.”

과연 돌아온 답도 해인의 예상과 비슷했다.

별다른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은 아킬레우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방금까지 그 일과 관련된 생각을 했기에 답이 빨랐다. 그는 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것 같은 동작이다.

눈앞으로 내밀어진 단단한 손이 이제는 익숙할 정도였다. 해인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우선은 순순히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조심히 손을 뻗어 해인의 히마티온 끝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몸에서 천을 완전히 걷어 내지 않고, 다만 이리저리 잡아당겨서 옷의 형태를 조정하려는 듯했다. 모양을 바꿔 가는 천은 이번에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 형태를 갖추었다.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다만 테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가리고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해서 그랬던 거야.”

“어째서요?”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눈을 마주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 불편을 감수하게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에 대해 물어 온다면 자세히 대답해 줄 용의가 있었다.

“팀블레에서는 전군에 그대의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대도 군대에서 여자가 흔치 않은 건 알고 있겠지?”

“음, 네.”

“그러니 혹시 그대가 남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그대의 명예와 관련된 헛소문이 퍼지거나 무례를 저지르는 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건 큰 문제가 될 테지.”

맞는 말이었다. 명예와 관련된 헛소문이라고 하자 며칠 전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있었던 일이 자연히 떠올랐다. 포세이돈이 크로노스에게 화를 내던 광경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러니 그 분노의 원인이 된 일도 당연히 기억이 났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차마 이해할 수 없는, ‘밤 시중을 드는 노예’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포세이돈이 크로노스의 말을 오해하여 벌어진 일이었지만, 어쨌든 아킬레우스가 말하는 헛소문도 아마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 듯했다.

해인도 그러한 헛소문에 근거하여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포세이돈에게 알려진다면 큰 문제가 되리라는 것도 확실했다. 크로노스에게도 그렇게 화를 냈으니, 인간에게는 상상 이상의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가는 이쪽 군대 전체에 저주를 내릴지도 모른다.

해인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구는지, 그리고 그의 실제 성격이 어떠한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알았다. 해인이 납득한 듯하자 아킬레우스가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테베에 도착한 뒤 그대에 대해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언질을 해 둘 생각이었어. 얼굴을 드러내도 함부로 구는 자가 없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더라면 방금 전에도 히마티온을 벗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해인은 멀뚱히 아킬레우스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앞서 미리 알려 주셨더라면 지금도 벗고 있지 않았을 텐데요.”

“그랬겠지. 그 부분은……. 미안하군.”

아킬레우스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다만 그는 사과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만 웃고 말았는데, 그건 뜬금없게도 은은하게 책망하는 것 같은 그 어투가 귀엽게 느껴진 탓이었다. 해인은 거의 항상 차분한 얼굴이다 보니 이렇게 보통 때와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은 매번 흥미로웠다.

“……네, 괜찮아요.”

표정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빠른 인정과 사과의 속도가 마음에 들었기에 해인은 그 이상 일을 끌지 않고 수긍했다.

처음 불편하다고 생각했을 때 진작 물어봤더라면 지금의 태도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킬레우스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말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겠거니 싶었다. 적어도 의도하고 감춘 것은 아닌 것 같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자신을 바라봐 오는 눈이 웃고 있는 것을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웠던 탓도 없잖아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려 눈을 피한 해인은 아킬레우스가 방금 고쳤던 자신의 옷자락을 잠깐 바라본 뒤 질문했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아직 테베가 아니니 다시 얼굴을 가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뭐, 주변에 있는 자들은 이미 그대를 봤을 테니 별 의미는 없을걸.”

그렇게 말하며 아킬레우스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전의 경고가 아직 효과를 발휘하여 대놓고 이쪽을 보는 자는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한번 본 것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약간 당황한 기색의 해인을 본 그는 손을 뻗어 해인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그로서도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이제 반나절도 안 돼서 도착할 거야.”

머리 위로 손이 닿는 것과 동시에, 해인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도착하자마자 이야기할 테니, 그냥 지금부터 편하게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말을 이으며 아킬레우스는 머리칼에 이어 뺨으로 손을 내렸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각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당황한 듯 올려다보는 시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가, 그는 불현듯 자신이 한 생각에 약간 놀라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해인은 비틀거리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젯밤만 해도 이보다 더 가까운 거리감 속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주변이 아주 어두웠던 것에 비해 지금은 빛이 들지 않는 곳이 없는 환한 낮이었다. 미세한 표정 변화마저 자세히 보일 만큼 밝은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상대를 마주하는 것은,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해인은 어젯밤에 느낀 자신의 확신이 견고해지는 것을 자각했다. 뺨에 닿던 손끝에서, 그 행동에서, 그리고 내려다보는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애정은 모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해인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길을 더듬거리듯 피한 해인이 애써 태연한 척 답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도, 그리고 듣는 사람도 그 동요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태연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로 뭘.”

그것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의 감상에 놀란 채로 침묵을 이어 오던 아킬레우스가 천천히 답했다.

그는 해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도록 만들던 무언가의 정체를 비로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해인을 그저 단순한 의미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깨달음도 늦었던 것이다.

정작 눈앞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을 만큼.

아킬레우스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그는 불현듯 초조해져 해인과 시선을 마주치고자 했지만, 해인은 끝까지 그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어도 시선은 한 끗 비껴 나 있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주 보고 서 있었음에도, 서로의 눈길이 미세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어긋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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