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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로클로스는 눈앞의, 익숙하지만 낯선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휘관으로서 전쟁터에 나온 이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킬레우스는 아까부터 줄곧 군 내부의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시선은 계속해서 한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끝에 누가 있는지 아는 파트로클로스는 지난밤과 같은 복합적인 기분을 느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기했다. 대화 상대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이 솔직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시선이 향하는 끝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는 해인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 앞에 앉아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신난 건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뿐이고 해인은 홀로 차분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크산토스의 말을 듣던 해인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찬사를 섞어 묘사하자면, 섬세하게 잘 깎아 놓은 조각상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저 정도는 되어야 본인 잘난 맛에 살던 아킬레우스가 반하는 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여러모로 너무 인상적이었던 나머지 이성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흔하지 않은 외관에 대해서만큼은 순수하게 감탄할 만했다. 속으로 납득하던 파트로클로스는 불현듯 문제 하나를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저 얼굴을 보고 감탄하면 안 되는데?’
해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우선 장교 몇 명에게만 언질해 둔 상태였기에 그 아래 병사들은 그녀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팀블레에서는 전군에 말을 전달하기 쉽지 않으니 해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테베에 도착한 이후로 미루어서다.
원래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특이했다. 전쟁터에 여성이 있다면 그건 전리품으로 붙잡힌 포로거나, 진영에서 잡일을 하는 하녀, 혹은 지위 높은 자의 몸종뿐이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는 해인에 대해 아무 말조차 없으면 그녀의 명예와 관련된 헛소문이 돌 것이 분명했다.
포세이돈이 그토록 아끼던 자식에게 감히 무례하게 굴었다가 신의 분노를 정통으로 마주하지 않게, 알아서 행동을 조심하게끔 기강을 잡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테베에 도착할 때까지는 얼굴을 가리고 있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아킬레우스에게 맡겨 놨었는데, 바람에 의해 넘어간 것인지 본인이 무심결에 벗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잠깐 탄식하다가 다시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그는 아까부터 가관이던 아킬레우스를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로 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으니, 나머지는 후에 결정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킬레우스.”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역시나 제대로 안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파트로클로스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살짝 찌푸려진 아킬레우스의 미간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계속 저쪽을 힐끗거리고 있었으니 빤한 일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마 해인의 히마티온이 벗겨진 게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고 쉽게 짐작했다. 그런 거라면 더욱 보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시간을 더 끌어 봤자 그의 집중과 인내는 닳기만 할 뿐일 것이다.
“아킬레우스!”
목소리를 키워 다시 부르자 그제야 아킬레우스의 시선이 돌아왔다.
“……미안.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니, 집중 안 되는 것 같으니 그냥 가 봐.”
“뭐?”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고, 배려의 차원에서 하는 소리야. 본인이 모른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아가씨에게서 눈을 못 떼잖아.”
파트로클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정말로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해인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던 스스로를 뒤늦게 알아차린 그는 드물게도 약간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아, 그랬군. 내가…….”
정말로 몰랐다가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차린 모습이다. 파트로클로스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까부터 줄곧 생각했지만, 저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아킬레우스는 정말로 처음이라 낯설 정도였다. 그는 새삼 감정이라는, 형태조차 없는 무언가에 대한 경외를 느꼈다.
어쨌든 파트로클로스가 지금과 같은 아킬레우스를 처음 보듯이, 아킬레우스 본인도 그 자신을 저렇게 뒤흔드는 감정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리라고 파트로클로스는 감히 짐작했다. 물론 하는 행동을 보면, 그 감정을 거부하기보다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내키는 대로 알아서 잘 행동하는 모양이니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새삼스럽다는 것처럼 중얼거리지 말고, 나머지는 테베에 도착한 뒤 결정하자. 그때는 집중하겠다고 약속해.”
“……알았어.”
아주 어릴 적, 그들이 아직 상하 관계 속에 끼워지지 않았을 때처럼,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손위 형제라도 된 듯 웃었다.
“어차피 약속하지 않아도 그때는 일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래, 가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한번 끼어들어 봐.”
평소 같지 않은 스스로는 이미 여러 번 느껴 보았다. 그런 만큼 구태여 부정할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해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 뒷모습을 알 수 없는 흐뭇함과 함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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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인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와 함께 정말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해인은 거의 청자에 가까웠고, 주된 발화자는 크산토스와 발리오스 쪽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이후 어떻게 자랐는지, 포세이돈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포세이돈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들을 신나게 늘어놓았다. 해인은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들어 주었기에 둘은 점점 더 흥이 오르고 있었다.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이제 아킬레우스의 아버지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인 펠레우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여신 테티스와 어떻게 하여 결혼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포세이돈이 자신들을 펠레우스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을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을 들으며 해인은 작게 침음을 냈다.
“흠.”
<왜 그러시는가?>
“아니, 그냥……. 이야기를 잘하는구나 싶어서.”
<칭찬이군!>
“응, 칭찬이야.”
해인은 적당히 대답해 주며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댔다.
현대에서도 이 시대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는 없었다. 포세이돈에게 ‘이 이야기 진짜인가요?’하고 물어봤다간 그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런 만큼 실제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부터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미래의 포세이돈이 알았더라면 손을 떨었겠지만, 이미 들어버린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결혼식이 끝난 후 자신들이 프티아에 처음 도착하여 펠레우스의 말로 지내다가, 아킬레우스가 태어나고,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맺었다.
물론 침묵은 잠시였다. 금세 주제가 바뀌어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우리 등에 타 보는 건 어떠신가?>
<흔치 않은 기회라네! 지금까지 우리가 태워 준 건 펠레우스와 아킬레우스가 전부이니까.>
해인은 말들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이 많을 수 있는 건지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그녀는 어이없는 나머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의 말에 답했다.
“그건 팀블레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잖아.”
<하지만 그때는 아킬레우스가 막았으니까!>
“제안은 고맙지만 그가 맞아. 난 안 되겠어.”
<어째서?>
해인은 지금이 기원전 십이 세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 시대에는 등자가 없었다. 안장 비슷한 것은 있지만, 현대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인체공학적으로 만든 튼튼한 재질의 안장은 아니다.
모든 말들은 해인에게 순종적이고, 지금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도 해인이 포세이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친근하게 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허술한 안장만 깔린 말의 등 위에서 등자도 없이 기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해인은 승마를 대단히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균형을 잘 잡을 자신이 없으니까.”
물론 자세한 이유는 적당히 생략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했을 때, 파트로클로스의 배려로 되돌아온 아킬레우스가 가까이 와서 해인의 곁에 섰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너무 활발한 나머지 그들에게 신경이 다 쏠려 아킬레우스가 다가오는 기척을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해인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 등에 타 보지 않겠냐고 다시 권했지.>
<포세이돈의 따님이시니까! 잘 타실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해인이 입을 열었다.
“거절했어요. 위험할 것 같아서요.”
말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하고 있었음에도 아킬레우스는 줄곧 해인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말을 하자마자 곧장 반응했다. 아까 전 팀블레에서 자신이 위험하다며 말을 잘라 냈기 때문에 해인이 거절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말을 슬쩍 철회했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만약 그대가 원한다면 타도 괜찮아.”
“아니요. 정말로 자신이 없어서요.”
말들의 신인 포세이돈을 아버지로 두었음에도 저렇게 확고히 말한다면 정말인 모양이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혼자서는 말을 타 본 적이 없나?”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온 아킬레우스를 힐끗 곁눈질한 해인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있기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끝을 흐리던 해인이 이내 덧붙였다.
“……잘 타는 편은 아니에요.”
물론 그 덧붙임은 엄밀히 따졌을 때 반 정도 기만이었다.
해인은 그저 즐기지 않을 뿐,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잘 타는 편에 속했다. 어릴 적부터 주위 환경이 준비되어 있던 탓일 것이다. 딸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은 일이라면 과하게 반응하는 포세이돈도 승마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아주 너그러웠고, 오히려 권장하기까지 했다. 딸의 생일 선물로 좋은 말을 엄선하여 줄 정도였는데, 사실 본인부터가 말들의 신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말들은 해인에게 납작 엎드렸고, 절대로 그녀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사실은 감히 신의 자식을 떨어트릴 수 없는 쪽이었을 것이다. 말의 사정이 그러한 와중에 해인도 언제나 말에게는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서로 간의 호흡이 안 맞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현대의 일이었다. 해인은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고, 모든 장비를 갖추고 안전하게 승마를 즐기는 것과 등자도 없는 허술한 안장에 몸을 맡기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반쯤 거짓인 정보를 들었지만 아킬레우스는 그 정도에서도 적당히 납득했다. 혼자 타 본 적은 있어도 잘 타는 편은 아니라는 말과, 포세이돈의 과보호를 함께 떠올려 보면 충분히 전후 사정이 그려진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군.”
느릿하게 대꾸하며 그는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