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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까지 가는 길은 별다른 일 없이 평화로웠다. 전쟁터로 향하며 평화롭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날씨 역시 좋았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포장도로 같은 흙바닥 위를 굴러가는 전차의 진동은 예외다.
해인은 바닥에 깔려 있던 양모 위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전차 옆 벽에 등이라도 기대면 온몸으로 충격이 전해졌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꼿꼿하게 세워야 했다. 잠깐이라면 모를까,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으려니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기술의 발전이란.’
현대가 얼마나 살기 편한 곳인지 온 몸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전차에는 그 몇 시간 내내 일어서서 전차를 몰고 있는 사람과, 역시 일어선 채로 주변을 계속해서 둘러보고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있었다. 가끔씩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내려다보며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눈치챘기에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아 하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자동차만큼은 아니지만 꽤 빠른 속도로 주변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산이 없었기에 아주 멀리까지도 시야가 트여 있었다. 해인은 먼 곳의 숲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아우토메돈의 팔 너머로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보였다. 팀블레를 떠난 이후 아직 한 번도 쉬어가지 않았는데도,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전혀 지치지 않은 듯 변함없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 아닐 뿐, 엄밀히 말해 반신이라서 그런 걸까.’
정말로 현대에서는 상상도 못 한 경우였다. 하지만 애초에 현대에는 하르퓌이아 같은 괴물이 없고, 반신의 존재도 드물다보니 생각의 범위가 좁아지는 건 별 수 없는 일이다.
‘불멸까지 가졌다고 했으니 오히려 나보다 더 신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네. 현대로 돌아가서도 만날 수 있으려나…….’
기원전에 떨어진 이후로는 오랜만에 무겁지 않은 생각들이 이어졌다. 해인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 때였다.
“해인.”
가만히 해인을 내려다보던 아킬레우스가 조용히 이름을 불러 왔다. 해인은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앉아 시선을 맞췄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해인이 저도 모르게 멈칫한 사이, 아킬레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아닐 것 같은데.”
해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저렇게 나올 거면 뭐 하러 물어본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색함도 잊고 황당해하는 표정에 아킬레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힘들어하는 티가 났던 것은 아니었다. 히마티온 사이로 보이는 해인의 얼굴은 오히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일 만큼 태연하고 침착한, 심지어 조금 지루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만큼 표정 관리가 지나치게 완벽했던 나머지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져 한번 찔러 본 것이다.
“어차피 이제 잠깐 쉬다 갈 거야. 오래 달렸으니까.”
“……그렇군요.”
“그래, 이쯤 되면 말들부터 사람들까지 다 지치기 마련이거든.”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말들이 크산토스와 발리오스 같은 것은 아니고, 병사들도 이른 아침부터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동해 왔다. 여기서 한 번쯤 휴식해야 도착할 때까지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킬레우스는 내심 해인의 태도가 예상외라고 생각했다. 며칠간 봐 오며 타고난 성정이 침착한 편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생 한번 해 보지 않고 자랐을 아가씨가 저만큼 의연할 수 있다는 건 신기했다.
최소한의 선을 지키기는 해야겠지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가급적 전부 들어줄 용의가 있었는데, 해인은 기대어 의지하거나 혹은 바라는 것을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저 성정에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내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을 테니 당연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이것저것 해 주는 일의 재미를 이미 깨달아 버린 아킬레우스로서는 다소 아쉬운 일이었다.
몸을 일으킨 아킬레우스는 주변의 몇몇과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토메돈이 말들의 속도를 늦췄다. 이동하는 인원수가 많다 보니 완전히 멈춰 서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 가운데 해인은 전차가 속도를 늦춰 몸으로 전달되는 진동도 약해졌다는 점에서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전차가 멈춰 서자 아킬레우스가 훌쩍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잠시 다녀올 테니 가급적 전차 근처에 있어.”
“네.”
어차피 멀리 갈 생각도 없었다. 곧장 대답한 해인은 몇 시간 만에 느껴 보는 진동 없는 세상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아우토메돈에게 눈짓으로 해인의 곁에 있으라는 지시를 남기고 멀어졌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사교성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기까지 한 부관에게는 과중한 업무였다. 그러나 부족한 사교성에 반비례하는 고지식함을 갖춘 아우토메돈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법을 몰랐다. 알았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우토메돈은 어색함을 억누르며 해인을 돌아봤다. 파트로클로스가 그에게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기에 그녀가 귀한 사람인 건 알았다. 심지어 아킬레우스의 태도를 보면 조만간 그녀를 왕자비로 모셔야 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만큼 태도를 조심해야 했다.
사실 팀블레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는 게 나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들이닥쳤다. 해인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저기…….”
“……예.”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해인은 파트로클로스의 말을 떠올렸다. 사교성이 없다더니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하지만 해인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는 않았기에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아우토메돈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별 건 아니고, 저를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낯선 사람과 단둘이 침묵 속에 남겨졌을 때 느껴지는 불편한 어색함은 해인으로서도 별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서로 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저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 않거든요. 하실 일이 있으시면 편하게 하세요. 저는 여기서 가만히 있을 생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해인의 기준으로 합리적인 제안은 아우토메돈에게도 통용됐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말 몇 마디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자연히 동작도 직전보다 덜 어색해졌다. 해인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아우토메돈은 전차 바깥으로 나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에게 물을 챙겨 주며 생각했다.
아킬레우스는 훌륭한 지휘관이고 뛰어난 명장이지만 저돌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그의 곁에 해인과 같이 침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점을 누그러뜨려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몹시 앞서 나간 생각이었다.
한편 해인에게 한층 호의적이 된 아우토메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해인은 전차의 끝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었다. 출발할 때는 이른 아침이어서 서늘했지만, 한낮이 된 지금은 기온이 많이 올라가 있었다.
전차가 달릴 때는 바람 탓에 덥다는 생각을 못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히마티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머리 위를 덮은 히마티온을 끌어 내리자 얼굴로 따스한 바람이 닿아 왔다. 그와 동시에, 전차가 멈췄음에도 그 진동의 여파가 남은 것 같던 몸이 갑작스레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바람을 좀 맞았다고 기분이 환기되는 수준의 감각은 아니었다. 순간 멈칫한 해인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반나절이 지난 모양이네.’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되돌아가는 걸 생생하게 느끼게 되자 별수 없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하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킬레우스는 저만치에서 파트로클로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이 들릴 리 없는 거리였지만 지휘관과 그의 부관이니 군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거니 싶었다. 해인은 그들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테베에 도착하기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아우토메돈에게 조심스레 말이라도 걸어 볼까 생각하던 때였다.
<포세이돈의 따님이시여! 무료해 보이시는데, 그렇다면 우리와 대화를 좀 나누지 않겠는가?>
적응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은 멈칫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분명 말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신난 것 같은 감정이 선명히 엿보이는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해인을 보고 서 있었다. 그들의 곁에 있던 아우토메돈은 당황한 듯 말들과 해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성대 구조 확인해 보고 싶다.’
해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물론 수의학과도 아닌 이상 그쪽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없으니 확인한다고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대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가 몹시 궁금했던 탓이다. 해인은 새삼스럽게도 한층 더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러나 저 신난 말들을 차마 외면하지도 못했다.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에 해인은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둘 다 외향적인 성격의 끝을 달리고 있다. 그들을 돌봐 주는 아우토메돈은 한없이 내성적인 것을 생각해 보면, 아우토메돈이 다소 안쓰러워지는 사실이었다.
해인은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아우토메돈에게 괜찮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우토메돈은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 푸른 눈을 마주하자 해인이 포세이돈의 자식임을 새삼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말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신의 자식이니 별다른 일이 벌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인이 지금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고, 본인은 다시 얼굴을 가릴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그는 뒤로 조금 물러나 주변을 지키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