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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24)화 (25/149)

chap.4 거리

지난밤 말했던 대로 출발은 이른 아침이었다.

비록 잠을 좀 설치긴 했지만, 어제도 그랬듯 신체적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밤을 새우게 되더라도 지치는 건 정신이지 몸은 아닐 것이다. 크로노스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보내며, 해인은 묘하게 각성 상태에 이른 것 같은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왕궁 주변이 조용한 탓이었다.

출발일이니 오히려 시끄러울 만도 한데 뜻밖의 일이다. 속으로 의아해하며 그녀는 아킬레우스와 함께 왕궁 바깥으로 나왔다.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히 걸어 도착한 계단의 바로 앞에는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낯선 사람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이번만큼은 발을 헛디디지 않겠다는 각오로 눈앞을 가리고 있던 천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던 해인은, 낯선 사람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떨어져 걷던 이의 시선을 느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짓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아우토메돈. 파트로클로스와 마찬가지로 내 부관이고, 말들을 다루는 데 뛰어나지. 때문에 전차를 탈 때는 주로 그에게 맡기는 편이야.”

테베까지 가는 길의 이동 수단은 전차라는 것을 나오기 전 이미 들었다. 그러나 어제 잠시 외출했을 때는 아킬레우스가 직접 전차를 몰았기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난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해인은 새로운 사람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으로 눈앞의 이를 응시했다. 그는 해인과 키는 엇비슷했지만 체격이 단단했고 굳센 인상이었다. 아우토메돈이 딱딱한 얼굴로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오레스의 아들, 아우토메돈입니다.”

“안녕하세요. 해인이라고 합니다.”

짧은 인사가 오갔다.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 아우토메돈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먼저 내려가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답을 들은 아우토메돈은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별다른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혹시 자신이 무언가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해인이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파트로클로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우토메돈은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의 아니게 오해를 많이 사는 편이지요. 저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교적으로 굴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어디든 사람들의 성격은 다양한 법이다. 해인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출발 준비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병사들은 예정대로 성벽 밖에 집합했어.”

“그래, 왕궁 앞이 이렇게 좁으니 어쩔 수 없지.”

“원체 작은 도시이긴 했으니까.”

파트로클로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그들의 대화에 해인은 오늘따라 유난히 왕궁 주변이 조용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병사들이 모두 성벽 밖에 미리 나가 정렬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대단히 궁금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문이 해소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 후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대화도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아우토메돈이 기다리고 있을 계단 아래로 향했다. 아우토메돈은 전차에 매인 말들을 돌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어제 외출할 때 썼던 전차가 아니었고, 말들도 다른 말들이었다.

해인은 거대한 말 두 마리를 보고 약간 감탄했다. 며칠 전 보았던 포세이돈의 전차를 끌던 흰 말들과 비교해 봐도 그리 뒤처지지 않는 크기였다. 그들 중 하나는 짙은 고동색 털에 검은 갈기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갈색 털과 황갈색 갈기를 가지고 있었다.

색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잘 관리된 듯 털과 갈기에서 윤기가 흘렀고 균형 잡힌 몸은 박력 있는 동시에 우아했다. 마치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아 보이는 말들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해인의 곁에 있던 아킬레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색이 짙은 녀석이 크산토스, 그 옆이 발리오스야.”

이름을 들었을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작스러운 상식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분이 그 포세이돈 님의 따님이시군!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

“……어?”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해인은 얼어붙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전의 목소리는 크산토스라는 이름의 말이 낸 것이었다. 해인은 이 거짓말 같은 상황에 아연해진 채 크산토스를 응시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크산토스 옆의 발리오스마저 신난 기색이 만연한 목소리로 끼어든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서풍의 신이시지만 포세이돈 님께서는 모든 말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시니, 그분의 자식이라면 이미 우리 마음속의 형제나 다름없다네!>

“말, 아니, 무슨…….”

해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그들의 마음속 형제라 주장하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쓰게 웃었다. 어린 시절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공감되는 마음이었다. 말없이 서 있던 아우토메돈 대신 아킬레우스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를 진정시켰다.

“예의를 지켜. 갑자기 말을 거니 놀랐잖아.”

<우리는 말이라서 인간의 예의는 모른다만.>

“헛소리하지 말고.”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파트로클로스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들의 말대로, 둘 모두 서풍의 신이신 제피로스 님의 자식들입니다. 하르퓌이아(여자의 머리와 새의 몸을 가진 괴물)인 포다르게에게서 태어났는데, 비록 말이지만 불멸을 갖고 있지요. 아킬레우스의 아버지인 펠레우스 님이 테티스 님과 결혼하실 적, 포세이돈 님께서 펠레우스 님께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끌고 있죠.”

“……그, 그런가요.”

며칠 전 하늘을 나는 포세이돈의 전차 위에서 이 시대의 비과학적인 면모를 충분히 느꼈다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그보다 더 충격이었다. 이런 시대였으니 신들이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했던 모양이다. 애써 납득하며 해인은 크산토스와 발리오스를 응시했다. 시선을 알아차린 듯 그녀를 돌아본 크산토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포세이돈 님의 따님께서 원한다면 등에도 태워 줄 수 있는데, 어떠신지?>

본인에게 말을 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긴가민가한 마음에 해인은 멍하니 크산토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킬레우스가 굳이 답해 줄 필요 없다는 듯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위험한 권유는 하지 마. 이제 출발할 거야.”

<오늘은 드디어 테베까지 가는가?>

“그래.”

그사이 아우토메돈이 먼저 전차에 올라 매듭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전차를 확인하러 가겠다며 어디론가 떠났다. 아킬레우스는 아우토메돈의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그가 고개를 들자 물었다.

“문제는?”

“없습니다. 타셔도 됩니다.”

아우토메돈이 확답했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돌아보더니 말없이 손을 뻗어 해인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전차 위로 먼저 올려 주었다.

어제 아침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과 달리, 지금 느끼는 기분은 아무래도 다소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놀랐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전차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오늘 새벽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최대한 아킬레우스를 의식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상해 보이지 않게끔 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애를 쓰고 있다는 점, 그런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사실상 이미 실패인 셈이었다.

예고 없이 닿은 온기에 굳은 해인과 달리 정작 아킬레우스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태연하게 전차에 뒤따라 올라탔다. 그러고는 미처 놀란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해인을 내려다본 뒤,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놀랐나? 옷자락이라도 밟을까 봐 그랬는데.”

“……네, 고마워요.”

“천만에.”

어딘지 어색한 인사에도 아킬레우스는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어제에 비해 해인의 표정이나 행동이 미세하게 굳어 있기는 했지만, 원인을 짐작할 수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일 때문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원하던 대로 된 것이긴 하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면 갑작스레 느낀 충동만으로 경계심을 과하게 키운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 역시 생각했던 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이중적인 감정에 아킬레우스는 혼자 헛웃음 지었다.

전차 위는 제법 넓었고 해인의 덩치도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우토메돈은 힐끗 뒤를 돌아본 뒤, 두 사람이 모두 탑승했음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말을 출발시켰다.

포장되지 않은 길 위로 전차의 바퀴가 느리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덜컹이는 진동과 함께 약간의 소음이 울렸다. 해인은 전차 벽을 붙잡고 서서히 멀어지는 팀블레 왕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던 아킬레우스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뒤 고개를 숙여 나직이 속삭였다.

“말했지만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 힘들면 앉아 있어.”

“아, 네…….”

그는 눈짓으로 바닥에 깔린 두꺼운 양모를 가리켰다. 탔을 때부터 왜 저기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물건의 사용처를 깨달은 해인은 중얼거리듯 답했다.

전차가 달리면 당연하게 뒤따라오는 소음이 있어서, 소리치지 않고 말을 전하려면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귓가에 닿는 숨결이나 가까운 거리로부터 느껴지는 체온은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고개를 들고 해인은 눈을 피하듯 시선을 돌려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했다. 과연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조금씩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해인은 들판 위로 서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아킬레우스는 힐끗 해인을 내려다보더니 어제와 같이 그녀의 얼굴을 덮은 천을 살짝 당겼다. 이마까지 오던 천이 눈 아래로 내려와 얼굴을 더 확실히 가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여기서 잠시 멈췄다 갈 거야.”

그 말대로 아우토메돈은 익숙하게 병사들의 가장 앞으로 전차를 몰았고 적당한 위치에서 고삐를 당겨 말들을 멈춰 세웠다. 언제 출발했던 것인지 파트로클로스도 이미 근처에 있었다. 자신의 전차에서 내려와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를 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맞이했다.

아킬레우스는 전차가 완전히 멈추자 땅으로 내려갔다. 파트로클로스에게 가볍게 눈짓한 그는 이내 수많은 시선 속에서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어 그들을 독려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사이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탄 전차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해인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눈에 보이는 이들이 전부 아킬레우스를 따르는 미르미돈족 병사들입니다.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자부할 수 있죠.”

전차 옆에 선 파트로클로스는 말을 이어 가며 해인을 올려다본 채로 웃어 보였다. 해인은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자랑스러움을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사실은 굳이 곁에 다가와 소감을 물어보았다는 것에서부터 그가 갖고 있는 자부심을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던 해인은 칭찬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는 결론을 냈다.

“대단하네요.”

짧은 소감이었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들판을 가득 채운 장병들은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 많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오로지 아킬레우스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해인이 진심으로 답했음을 알아차린 파트로클로스는 활짝 웃었다.

그 가운데 이어지던 연설이 마침내 끝났다.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판 위를 채웠다.

진정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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