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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23)화 (24/149)

문이 열리는 찰나에 잠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들어온 이는 아킬레우스였다.

이제는 보초까지 세워 두었을 왕궁 안으로 출입이 가능한 자는 거의 없고, 특히 이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해인을 제외하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뿐이라고 했으니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인으로서는 그가 늦게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했기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갈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걸어 들어온 아킬레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해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웃어 보였다.

“뭐 하고 있었어?”

그건 마치 지루하지는 않았냐는 듯 살펴 묻는 어조였다. 해인은 어색하게 답했다.

“쉬고 있었어요.”

“하긴, 그러고 싶다고 했었지.”

새삼스러운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문을 닫고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직도 창 바깥에서는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연회가 끝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일찍 돌아왔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인은 자신이 누리던 혼자만의 시간이 끝났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방의 주인은 애초에 저쪽이었으니,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별수 없었다.

다만 직전까지 생각하던 것이 있고, 또 후회하고 있던 일이 있던 만큼 약간의 심정적 불편함은 감수해야 했다. 때문에 해인은 그 불편을 잊고자 스스로에게 과제를 던졌다. 마침 아킬레우스가 일찍 돌아왔으니, 이렇게 되어 버린 거 아침의 질문에 대해 답할 겸 귀환 조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까 싶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생각하며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았다. 아침에 외출했을 때와는 달리 그는 보랏빛의 히마티온을 입고 있었다. 천의 끝자락에 수를 놓은 히마티온은 그 자체로도 이미 화려했지만, 걸친 사람 역시 만만치 않게 화려한 얼굴이었기에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히마티온을 입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듯 그는 해인에게 입혀 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얼굴을 덮지 않고 왼쪽 어깨부터 시작해 오른쪽 팔 아래로 느슨히 몸을 한 번 감고 있었다. 그조차도 단정하지 않고 반쯤 풀려 있었지만 오히려 그편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의식중에 아킬레우스를 감상하듯 보던 해인은 그가 히마티온을 풀어 근처 의자에 얹어 두는 것을 보고 침대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으실 거면 저는 잠시 나가 있을게요.”

해인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아킬레우스도 똑같이 하는 행동이었고, 해인 역시 남의 환복 과정을 굳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에 해인을 돌아본 아킬레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예상외의 말을 꺼냈다.

“밖은 추우니 그냥 앉아 있지 그래?”

“네? 하지만.”

“봐도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고개 돌리고 있어.”

“무슨…….”

황당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해인의 얼굴을 본 아킬레우스가 피식 웃었다.

“어제부터는 그대가 있는 방 안에서 계속 갈아입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저는 자고 있었잖아요.”

“뭐, 그랬지. 하지만 지금도 방 안은 어둡잖아.”

거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 없다는 듯 키톤의 매듭에 손을 댔다. 결국 해인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방 안이 어둡다는 건 맞는 말이기도 했다. 주변을 밝히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테이블에 올려 둔 등잔불과 방 한편의 작은 화로뿐이었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해인은 멍하니 딴생각에 빠졌다. 그와 대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옷을 다 갈아입으면 어떤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상황은 금방 잊혔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환복을 끝낸 아킬레우스는 그가 옷을 입는 내내 작은 기척도 내지 않았던 해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바로 앞에 등잔불을 두고 있었기에, 일렁이는 불꽃이 얼굴을 비춰 어렵지 않게 표정이 보였다. 나가지 말라던 말에 당황하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아킬레우스가 있는 방향에는 약간의 관심조차 없이, 다만 깊게 생각에 잠긴 낯이었다.

만난 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떠올려 보면 해인은 꽤 자주 저런 얼굴을 하고는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그는 천천히 해인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해인은 여전히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움직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의식조차 않고, 별다른 경계조차 않은 채…….

그 사실을 깨닫고 아킬레우스는 문득 멈춰 선 채로 두 번째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숲에서 만났을 때는 분명 그를 경계하던 해인은,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 아킬레우스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인 포세이돈과 아킬레우스가 거래를 나누었음을 알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는 않지.’

경계하지 않았으니, 오늘 아침 산책을 나갔을 때도 이런 귀여운 짓을 한 것 아니겠나 싶었다.

그는 아직 손목에 묶여 있는 꽃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복도를 걷다가 뒤늦게 그것을 발견했던 파트로클로스부터 시작해서, 연회 내내 그는 이 꽃 때문에 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기이하게 바라보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뜯어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다.

손을 들어 이미 거의 시든 꽃들을 보던 아킬레우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해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포세이돈과 거래를 했고, 아킬레우스 본인 역시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해인에게 있어 아군으로 존재해 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충동이 일었다.

경계하지 않는 것은 좋으나, 동시에 자신이 마냥 편하게만 여길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이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아킬레우스가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문득 아까부터 방 안이 무척 고요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든 해인은 제법 가까운 곳에 있던 아킬레우스를 뒤늦게 발견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음에 약간 당황한 해인을 보며, 다음 순간 아킬레우스는 약간 남았던 거리마저 좁혀 성큼 가까이 다가섰다.

가깝다 못해 거의 틈이 없어진 거리에 해인은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침대에 앉아 있던 탓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작은 등잔불의 불빛을 등진 몸이 만들어 낸 긴 그림자가 해인의 위를 덮었다.

“왜…….”

당혹해하며 용건을 물으려던 말조차 끊어졌다. 앞에 선 아킬레우스가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조심히 양손을 뻗어 해인의 얼굴을 감싸 올린 탓이다. 커다란 손이 뺨에 부드럽게 닿아 왔다. 고개가 뒤로 꺾이고, 시선이 맞춰졌다. 음영 진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고조차 없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인은 모든 움직임이 굳은 채로 그를 마주 보았다. 금빛 머리칼이 앞으로 살짝 쏟아져 해인의 이마에 닿았다.

어렴풋한 숨결 속에서 불현듯 희미한 주향(酒香)이 느껴졌다.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고개를 꺾으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나를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웃음기가 좀 섞인 어조였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위치한 선명한 눈동자는 어딘가 반응을 살피는 것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해인은 상황을 파악했다.

“취하셨나 보네요.”

사실 뺨에 닿은 손은 평소와 비슷한 온도였고 눈동자 역시 이성이 흐려진 티는 나지 않았다. 그다지 많이 취하지는 않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런 상황은 앞으로의 일에 있어 좋을 게 없었다. 해인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팔을 든 순간, 한쪽 뺨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지더니 해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움직임을 막았다. 해인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손목을 잡은 손은 금방 풀리는가 싶더니 위로 조금 올라와 이내 해인의 손을 마주 잡아챘다.

당황한 해인이 그쪽을 바라보는 찰나, 이번에는 여전히 뺨을 잡고 있던 손이 턱으로 내려왔다.

“잠깐…….”

턱을 붙잡은 손이 얼굴을 고정했다. 아킬레우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눈 피하지 말아 봐.”

“놓으세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잡고 계시잖아요.”

“음…….”

침음을 내며 잠깐 시간을 끌던 아킬레우스는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순순히 손을 놓았다. 하필 침대에 앉아 있어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기에 해인은 얼른 손만 뒤로 물렸다.

잡고 있었을 뿐 힘은 전혀 주지 않은 듯 느껴지는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덩치가 훨씬 큰 남자가 앞을 막고 서 있는 것에서부터 오는 위압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손을 놓아주며 거리도 조금 물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아킬레우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리고 방금 전도……. 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기에 이런 쪽으로는 전혀 모르는 건가 했더니.”

“아니까 좀……. 떨어져요.”

해인은 미간을 좁히다가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다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시도조차 못 하고 실패했던 직전과 달리 이번에는 아킬레우스도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사람이 멀어지자 주변이 환하게 넓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해인은 심장이 몹시 빠르게 뛰고 있음을 겨우 자각했다. 강제로 불 붙여진 긴장감 탓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킬레우스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그 끝에 입을 열었다.

“미안.”

사과 받을 일은 맞았지만 어쩐지 아주 뜬금없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해인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고 겁먹지는 마.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무슨…….”

“내가 동의 없이 그대를 취하려 했다가는, 포세이돈 님께서 날 반 토막 내러 오시겠다고 엄포를 놓고 가시기도 했고.”

담담한 어조 탓에 단어에서 오는 살벌함을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반 토막이라는 단어에 해인은 급격히 긴장감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순식간에 할 말을 잃은 해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은 아킬레우스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억지로 하는 취미는 없어서.”

거기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던 해인은 떨떠름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문득 코끝으로 닿는 어렴풋한 들꽃 향기를 알아챘다. 아주 흐리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옅었지만 아침에 맡았던 향기와 정확히 같은 종류였다.

“꽃이 왜 여기…….”

“뭐라고?”

무심코 작게 중얼거린 순간 아킬레우스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인은 그 꽃향기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를 알아차렸다.

“……아니요. 아무것도.”

저걸 아직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해인은 시선을 비껴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 그가 했던 행동이나 말들이 뜻하는 바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 속의 함의를 모를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오기 전까지 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하겠다고 생각했던 어제에 대한 후회, 그리고 자신을 의식하라며 온몸으로 이야기해 오는 것 같은 방금 전의 이 행동까지…….

모든 것이 합쳐지자 이제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공적이고 사무적인 관계.

과연 가능하기는 할지 스스로도 회의적이기는 했지만, 안 돼도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이미 해인의 손을 벗어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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