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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21)화 (22/149)

넓은 들판은 온통 푸른빛이었고 허리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모를 색색의 들꽃들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그 덕분인지 가끔씩 불어와 옷자락을 흔들고 가는 산들바람은 은은한 들꽃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둘러본 주변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만 마냥 감상만 하고 있으니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해인도 별수 없는 이십일 세기의 사람인 것이다.

그녀는 주변의 풍경을 사진 찍을 핸드폰이나 카메라가 손에 들려 있지 않은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뚱히 자리에 멈춰 섰다.

아주 한가로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다들 뭐 하고 지냈을까.”

지양하기로 했던 단어를 중얼거리며 혼잣말한 해인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 좋은 풍경인 것은 맞지만 계속해서 걸어가 봤자 이어지는 건 들판뿐이다. 또한 이 장소가 위험하지는 않더라도 낯선 곳이라는 사실 역시 바뀌지는 않아, 지금보다 더 멀리 아킬레우스와 거리를 벌리는 것은 해인으로서도 다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결국 방향을 돌려 다시 아킬레우스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나온 이후로 들뜬 기색을 한 채 저 멀리 가 있던 사람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돌아오는 것을 본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가까이 오자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왜?”

해인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냥……. 구경은 다 한 것 같아서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불과 방금 전 알아서 풀을 뜯어 먹도록 말을 전차에서 풀어 놓은 참이었다. 근처에서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말을 힐끗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이내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연회를 즐기는 편은 아닌지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더라도, 파트로클로스가 여러 번 저녁의 연회를 언급했으니 참석은 해야 한다. 다만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은 해인에게 쓸 생각이었는데, 그렇더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돌아가도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돌아가고 싶어?”

“음…….”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겠다는 어조에 해인은 곧장 답하지 않고 눈을 내리떴다. 막 나왔을 때 기분이 괜찮았던 것치고는 금방 지겨워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왕궁으로 돌아가서도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혼자 남게 되면 내내 혼자만의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그나마 의미 있는 것이라면 현대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인데, 팀블레는 이미 점령당한 지역으로 실질적인 전쟁터는 아니기에 보거나 들어서 확인 가능한 정보도 없었다. 아는 게 없으면 고민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시대에 대한 이해, 전쟁에 대한 이해 모두 부족한 해인이 떠올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전쟁터로 뛰어들고 싶고, 전쟁터가 앞에 있다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 나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팀블레 왕궁 안에서는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기가 어려우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트여 있기라도 한 바깥이 나았다.

“……아니요.”

“그래, 그럼.”

침묵이 이어질 때부터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짐작이 갔지만, 잠깐의 기다림 끝에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어투에 해인은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 희미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그건 어제 낮 창가에서 처음 대화를 나눴던 이후로는 처음 보는 웃는 낯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아킬레우스는, 그 깨달음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입을 다물고는 해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왜 그러세요?”

선명하게 닿아 오는 시선을 인지하고서 금방 표정이 바뀐 해인이 물어 왔다. 더 이상 웃지는 않고, 다만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눈을 마주한 그는 잠깐의 침묵 끝에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것도.”

왠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리 긴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겪어 본 적은 분명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순간 아킬레우스는 스스로의 낯섦을 불현듯 자각할 수 있었으나, 정작 그 낯섦을 만들어 낸 것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어 그만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서도 앞에 서 있는 이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다가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걷는 게 지겨워졌으면 근처에서 화관 같은 거라도 만들든가.”

“화관?”

뜬금없는 단어에 해인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주변에 꽃이 많기는 했지만 아킬레우스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조차 못 할 법한 단어였다. 게다가 화관은 해인에게도 그다지 친근한 물건이 아니었다. 생화를 꺾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배운 탓이기도 했고, 그냥 그녀가 들꽃이 만발한 들판 같은 장소가 없는 도시에서 자란 탓이기도 했다.

“문제라도 있나?”

아주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것 같은 표정에 아킬레우스가 물었다. 해인은 약간 당황하며 답했다.

“아니요, 그냥……. 해 본 적 없는 거라서.”

“왜?”

“……글쎄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해인은 어색하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다소 의아해졌다. 그로서도 뜻밖의 반응이기는 한 탓이었다.

그는 어릴 적 예언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스키로스에 반쯤 가둬지다시피 맡겨졌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여장한 채 지냈었는데, 때문에 별수 없이 스키로스의 공주들과 어울려 지내야 했다.

여신께서 친히 맡기고 간 어린 아킬레우스를 조심스럽게 데리고 다니며 공주들은 주로 베를 짜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아니면 화관을 만들며 놀고는 했다. 매일 그와 같은 일들만 반복해서 이어지는 일상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모든 것에 도저히 흥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공주들은 웃으며 즐겼으니, 여자들 입장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지냈나?”

“네? 설마요.”

“흠.”

포세이돈의 과보호를 떠올리며 물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말을 꺼낸 건 아킬레우스 본인이었으므로,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해인의 팔을 잡고는 그녀까지 끌어당겨 앉혔다.

“아, 무슨…….”

아킬레우스의 앞에 반 강제로 주저앉혀진 해인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정면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끌어당긴 아킬레우스도 지금 자신이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평생에 걸쳐 설마 자신이 이런 걸 남에게 가르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직전에 생각했던 대로 손은 움직였다.

그는 아무 꽃이나 몇 송이 꺾고는, 어릴 적 공주들이 만드는 것을 매번 곁에서 지켜봤던 터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던 방법대로 대강 엮었다. 방법이 기억이 난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릴 적에도 하지 않았던 것을 십 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하고 있었다. 그 지난 세월 내내 검을 잡고 피를 뒤집어썼던 손끝으로, 어딘가 어설프게 꽃줄기가 엮였다.

“……자. 이대로 쭉 엮으면 될걸.”

“아, 네.”

대여섯 송이의 꽃이 줄기가 엮인 채 해인에게 넘어왔다. 해인은 건네 오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그녀의 양손을 한 손만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크고 굳은살이 선명한 손이 꽃을 엮는 것은 몹시 안 어울렸지만, 동시에 그의 외모만 보면 또 그 이상으로 어울릴 수가 없어 이상한 광경이었다.

시선을 내려 손 위에 올린 꽃을 내려다보던 해인은 잠깐 시선을 들어 아킬레우스를 힐끗 응시했다가 조심스레 주변의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직전 그가 했던 대로 줄기를 잇고, 그 일을 몇 번 더 반복했지만 당연하게도 별다르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다만 저 사람이 이 정도로 안 어울리는 일을 할 만큼 신경을 써 주었으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줄기를 엮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기에 계속 하다 보니 관성이 붙은 것처럼 모양은 점점 더 괜찮아졌다. 하지만 그 길이가 한 뼘에 가까워지자 원래부터도 부족하던 흥미가 더 떨어졌다. 게다가 계속해서 꽃을 꺾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꽃에게 죄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점점 손이 느려지던 해인은 끝에 엮은 꽃의 꽃잎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꼭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도 지겨워?”

놀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아킬레우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손이 점점 느려지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가는 손끝이 서툰 듯 섬세하게 줄기를 엮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정말 뜻밖이지만, 예상외로 재밌었던 탓이다.

해인은 선명한 물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기껏 생각해서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 준 사람이었으니 예의상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막상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자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

아킬레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도 항상 재미없다고 생각했어. 누이들은 늘 그것만 하고 놀기에 여자들은 느끼는 바가 다른 건가 했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군.”

해인은 무릎 위로 만들다 만 화관을 내려놓으며 별생각 없이 질문으로 대화를 이었다.

“누이들이요?”

“아. 어릴 적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의 공주들. 그때는 그렇게 불렀지.”

“그랬군요.”

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가 어째서 굳이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 몸을 의탁해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한 사정까지 캐물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해인은 적당히 넘어갔다. 다시 시선을 슬쩍 내리고 무릎 위에 올려 둔 화관을 든 뒤, 길이를 가늠하다 몇 송이 더 줄기를 엮었다. 해인은 주변의 꽃으로 다시 손을 뻗다가 문득 꽃들이 거의 초토화되기 직전임을 깨닫고는 정말로 만들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두려고?”

“네…….”

결국 남은 건 한 뼘을 조금 넘은 꽃묶음뿐이다. 꺾은 데다 줄기를 이리저리 비틀기까지 했으니 몇 시간만 지나도 금세 시들 것이었다. 예쁘기는 하지만 무용한 그것을 들고 살펴보던 해인은 그것이 화관까지는 못 되더라도 팔찌 정도의 길이는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해인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에게나 맞을 법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잠시 고민하던 해인은 고개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은 표정에 아킬레우스가 이유를 물으려던 찰나, 해인은 머뭇거리는 태도로 손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자신에게로 가까이 가져간 후, 엮은 꽃들을 둘러 양쪽 끝을 매듭지어 버렸다. 해인은 반쯤 변명처럼 말했다.

“길이가 맞을 것 같아서요.”

어쨌든 안 어울리는 일까지 해 가며 챙겨 준 셈이었으니 나름대로의 선물인 셈이었다. 별 쓸모야 없겠지만 눈대중으로 짐작했던 길이만큼은 정확하게 맞았고, 최소한 얼굴과는 잘 어울렸다. 그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이번에야말로 꽤 당황한 채 말을 잃었다. 해인은 그 반응을 살피고는 물었다.

“혹시 이런 거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거나…….”

“……아니, 그런 건 없어.”

어릴 적 여장을 하고 지낼 때는 스키로스의 공주들이 저마다 아킬레우스의 머리 위에 화관을 얹어 주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이 정도는 약과였다. 물론 그건 어릴 적의 일로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고, 그가 이런 것을 하고 다니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황망해할 사람들이 많기는 했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아킬레우스는 불현듯 이 순간이 놀랄 만큼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스키로스에 있을 때도 그는 사실 그 섬을 탈출할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의 삶 속 평화로운 시기는 아주 먼 옛날 잠깐 존재했을 뿐이다. 평화라는 단어와 자기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나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헛웃음 지으며 손목에 감긴 꽃을 응시했다.

“고맙게 받지.”

그 반응을 마주하자 정작 해인은 약간 머쓱해지고 말았다.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결국 자신이 다소 들떠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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