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다가왔다. 해인이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는 손짓으로 침대 옆 스툴에 옷들과 함께 놓여 있던 히마티온을 가리켰다. 포세이돈이 해인에게 준 이후, 줄곧 그녀가 담요처럼 쓰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나갈까.”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손끝이 닿은 것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나가자면서 히마티온을 가리키는 걸 보면 역시 이것도 옷은 옷인 모양이다. 하지만 원래 주인이었던 포세이돈이 이것을 어깨 한쪽에 대강 걸치고만 있었기에, 어떤 식으로 입는 옷인지 감조차 잡지 못한 그녀는 머뭇거리며 히마티온을 집어 들었다.
히마티온은 입는 사람의 신장 세 배 정도의 길이인 긴 천이었고, 심지어 지금 해인이 들고 있는 것은 원 주인인 포세이돈의 키에 맞춰져 있었기에 해인에게는 다소 과하게 길었다. 바닥에 끌리는 천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그 찰나의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가 천천히 해인에게 손을 뻗었다.
“역시 옷 입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게 맞았군.”
그러고는 다짜고짜 정곡을 찔렀다.
해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태도를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자연스럽게 히마티온을 빼갔다. 해인이 굳어 버린 사이, 아킬레우스가 넓은 천을 펼쳐서 해인의 어깨 위로 둘렀다.
“무슨…….”
“어제 이걸 어깨에 걸치고 있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 남들이 시중들어 주는 것에 익숙해서 그러나 했는데, 이제 보니 아예 이 옷들 자체가 낯선 모양이야. 지금 입고 있는 키톤도 모양새가 어딘지 어설퍼.”
자신이 나름대로 멀쩡하게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던 해인은 어설프다는 표현에 입을 다물었다. 어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별말을 안 했던 것뿐임을 깨달은 이상, 무언가 변명을 꺼내는 건 오히려 악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옷 입는 방식이 완전히 다를 정도로 머나먼 곳이 고향인 모양이니, 하룻밤 사이 길을 잃었다는 것도 정말 단어 그대로의 뜻은 아니겠고…….”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도움으로 히마티온을 걸쳤다. 아킬레우스의 신분상 누군가에게 시중을 받았으면 받았지 자신이 시중을 들어 준 적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 만큼 결코 능숙한 손길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입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은 잘 알고 있으니 망설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바짝 붙은 거리에 숨결이 닿았다. 타인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다행스럽게도 옷은 점점 모양이 잡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팔 아래로 천을 한 번 감고 옷자락을 붙잡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으며, 거의 지척에서 아킬레우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정말 길을 잃은 것이었으면 지금 여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대 아버지의 전차를 빌려서라도 이미 고향에 돌아갔을 테니까.”
예리한 발언이었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조심스레 밀어내며 태연한 척 답했다.
“……그랬겠죠.”
미는 힘은 약했지만 아킬레우스는 기꺼이 밀려나 주었다. 다시 손을 움직여 해인의 머리 위로 천을 덮은 그가 여상하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서 왔지?”
그건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해인은 난처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온 곳은 대략 삼천 년 후의 미래다. 이 사실을 말해도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포세이돈은 그녀의 아버지였고 또한 신이었으니 무작정 말이라도 꺼내 본 것이었고, 다행히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그 개념조차 이해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아킬레우스는 대체 그 조건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무사 귀환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기까지 했다. 그런 상대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했다. 그렇다 보니 두 배로 고민이 필요했고 꼭 그만큼 골치가 아팠다.
해인의 반응을 본 아킬레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인가?”
해인은 천천히 수긍했다.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당장은 못 듣겠군.”
해인이 품었던 긴장이 무색하게도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납득했다. 관찰당하는 당사자가 모를 만큼 조용히 상대를 살피고, 그로부터 결과를 도출하고, 거기에 확신을 섞어 질문을 꺼냈던 사람치고는 정말 순순한 태도였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해인이 저도 모르게 약간 당황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히마티온은 해인의 머리 위를 덮어 얼굴을 가리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마 위의 천 자락을 살짝 끌어당겨 얼굴이 확실하게 가려지도록 한 아킬레우스는 방금 전까지 무슨 대화를 했냐는 듯 산뜻하게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나가자.”
***
왕궁 바깥으로 한 걸음 나서며 해인은 눈을 아슬아슬하게 덮은 천을 살짝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장소였다. 이 땅으로 떨어졌던 첫날, 이 시대의 포세이돈을 처음 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 앞이 안 보이면 손이라도 잡아 줄까?”
그때 해인이 얼굴을 덮은 천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을 본 아킬레우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해인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글쎄…….”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미덥지 않아 하는 기색을 애써 외면했다. 방에서부터 이곳까지 나오며 몇 번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한 이후로, 해인은 자신이 혼자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해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다. 아무리 왕궁이라고 하더라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바닥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으며, 모자도 아닌 천으로 시야를 가리고 있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주제는 금방 전환됐다. 기다리고 있던 파트로클로스가 가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 온 덕분이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데리고 나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별달리 놀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당연히 아킬레우스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해인이 뒤늦게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약간 당황한 것을 모르는 체해 주며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전차는 아우토메돈이 준비해 놨어. 저쪽이야.”
“알았어.”
“저녁에 연회 있는 거 잊지 말고.”
“그래.”
“참석해야 한다.”
“알겠다니까.”
오가는 대화의 내용을 가만히 들으며 해인은 그들이 상하 관계나 친우보다는 꼭 나이 차가 조금 있는 형제 같다고 생각했다. 아킬레우스의 답을 들은 파트로클로스가 해인에게도 배웅을 건넸다.
“조심하시고, 잘 갔다 오십시오.”
그 인사에 해인은 불현듯 멈칫했다.
‘잘 갔다 오라고…….’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새기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과 아킬레우스가 단둘이 외출하게 된 것임을 깨달았다. 일하는 사람들의 뒤에서 기원전의 도시를 구경하며 적당히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과였다.
“아……. 네.”
어떻게든 늦지 않게 대답은 했지만, 예상 못 한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눈짓하고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이끌었다. 얼떨결에 걸음을 옮기며 해인은 머뭇거리다 질문했다.
“……저, 그런데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없으세요?”
“오늘이 여기서 머무는 마지막 날인데, 마지막 날까지 일거리를 남겨 두지는 않지.”
그건 달리 말하자면 자유롭게 쉴 시간을 투자해 해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심지어 아까 전 파트로클로스가 말한 전차라는 단어까지 상기해 보면, 그저 왕궁 근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 바깥으로 멀리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본격적이었기에 해인은 금방 별수 없이 부담스러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고, 전차 앞에 도착해서는 해인의 허리를 잡아 가볍게 들어 올려 전차에 태웠다. 해인이 무어라 말을 덧붙일 틈도 없이 뒤따라 전차에 오른 그는 곧장 전차에 매인 말을 출발시켰다.
이틀 전 포세이돈의 전차에 탔던 적이 있으니 전차 자체를 처음 타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늘이 아닌 땅 위를 달리는 전차는 해인에게 있어 처음이 맞았다. 승차감이 아주 좋지만은 않았으나 아킬레우스가 그리 빠르지 않게 전차를 몰았기에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향한 곳은 무너진 성벽 너머의 넓은 들판이었다. 출발부터 줄곧 느껴지던 감정적 부채감에 다소 불편함을 품고 있던 해인은 막상 사방이 트인 넓은 장소에 도착하자 직전까지의 기분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이른 아침에는 약간 흐리게 보이던 하늘도 그새 화창해져 구름 한 점 없었다. 해가 완전히 머리 위로 떠 있지는 않아서 기온은 여전히 서늘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바깥을 산책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먼저 전차에서 내린 아킬레우스가 뒤따라 내려오려는 해인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해인은 당연히 이번에도 혼자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되는 호의를 무작정 거절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시야가 천에 의해 반쯤 가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해.”
혼자 걸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신뢰를 단단히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해인은 잔디 위로 발을 내디뎠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지금 서 있는 땅이 기원전의 것이라는 사실만 새삼스레 떠올려도 모든 것이 신기했다. 스쳐 가는 바람은 상쾌했고 사방은 모두 확 트여 있어서,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괜찮아졌다. 그 영향으로 성벽 안에서보다 조금 더 긍정적이 된 해인은 직전까지 느끼던 부담스러움을 호의에 대한 감사함으로 바꿔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상황을 즐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해인의 손을 놓아준 아킬레우스는 전차 곁에 선 채로 해인이 혼자 몇 걸음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아예 치워 버렸을 때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얼굴을 가리게 한 것은 아킬레우스 그 자신과 파트로클로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아직 해인의 존재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여기는 사방이 트인 장소였고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시야 안에만 두면 별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너무 멀리 돌아다니지는 마.”
“네!”
그는 문득 한마디 던졌다. 멀리 가지 않았기에 해인은 곧장 돌아보며 답을 돌려주었다. 돌아보는 해인의 표정이 왕궁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생생했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아킬레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