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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9)화 (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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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시간이 멈췄다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어느 순간 잠들게 된다. 멈춘 것은 몸의 시간일 뿐, 뇌의 시간까지 멈춰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는 건 막을 수 없었으며, 애초에 수면의 정의는 뇌에 누적된 피로를 덜어 주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전날 깨어 있던 시간보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탓인지, 해인은 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다만 무난하게 깨어나지는 못했다. 이유도 모르게 꿈자리가 사나워 소스라치듯 잠에서 깬 것이다. 해인은 눈을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깨어나자마자 꿈의 내용을 잊어버린 탓에 본인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일어났군.”

“아…….”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으며 해인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막 허리띠 위로 차려고 했던 듯, 손에 검을 든 아킬레우스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옅은 색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빛나는 물빛 눈동자가 강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야말로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존재감이었다.

해인은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그 뚜렷한 존재감 덕분인지 내용 모를 꿈의 여파는 조금씩 흩어졌다. 그사이 해인의 반응을 살피던 아킬레우스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해인.”

갑자기 불린 이름에 해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킬레우스는 어느새 한쪽 무릎을 침대 위에 대고 몸을 낮춰, 일부러 시선의 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감에 해인은 약간 긴장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을 가만히 보던 아킬레우스가 이내 중얼거렸다.

“……편하게 잠들지는 못했나 본데.”

그 말에 해인은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기껏 좋은 자리를 양보 받아 놓고서도 불편해하며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변명하고 싶기도 했다. 해인은 머뭇거리며 부정했다.

“그렇지는…….”

그러나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끝을 흐리자 아킬레우스가 힐끗 창밖을 보더니 권했다.

“더 자도 돼. 아직 이른 시간이고 오늘 별일은 없을 테니까.”

해인은 얼른 거절했다. 이 이상 자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에요.”

“일어나 있어도 딱히 재미있는 일은 없을 텐데?”

“그건 잠들어 있어도 마찬가지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작게 웃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소 위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체격이었기에 거리가 멀어지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멀어지는 등을 힐끗 보며 해인은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누워 있던 탓에 끝이 조금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내며 바라본 창밖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시대로부터 삼천 년을 거슬러 온 과거의 세상이다. 아침 특유의 시리고 깨끗한 공기가 방 안으로 새어 들고, 약간 흐린 하늘 위로는 무엇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풍경은 현대와 얼핏 비슷해 보이다가도,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건물들로 하여금 과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해인의 옆모습을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는 건가 싶어 창밖으로도 시선을 돌려 봤지만 별다르게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제부터 계속 창가에 붙어 있더니, 오늘도 잠에서 깨자마자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뺏겨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어쨌든 해인이 밖으로 나가 보고 싶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해인.”

“……네?”

한 박자 늦게 반응하여 답하는 해인을 내려다본 아킬레우스는 침대 옆 스툴에 놓여 있던 옷들을 가리켰다.

“더 잘 생각이 없다면, 잠시 나가 있어 줄 테니 옷 제대로 입어. 세숫물은 저걸 쓰고.”

“아, 네. 고마워요.”

해인은 반사적으로 인사하다가 멈칫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이미 몸을 돌려 바깥으로 한 걸음 나서고 있었다. 어젯밤 침대를 뺏은 것에 이어 이제는 그를 방 바깥으로 쫓아내기까지 한 기분에 해인은 조금 이상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저렇게 먼저 나가 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을 것이다. 생각을 털어 낸 해인은 어쩐지 재촉당하는 기분으로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숫물은 어제 낮과 같은 모습으로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천을 물에 적셔 얼굴과 손을 닦아 낸 해인은 고개를 돌려 옷들을 바라보았다. 어제 나이 어린 병사가 가져다준 것을 한번 들춰 본 이후로 손대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이틀 전 밤부터 줄곧 입고 있던 탓에 이리저리 구겨지고 옷 형태도 조금씩 풀려 가고 있었다. 갈아입을 필요성이 있기는 했지만, 문제가 있다면 해인은 이 시대의 옷에 대해 여전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

해인은 약간 난감한 기분으로 옷들을 살펴보았다. 잘 확인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이틀 전 사제가 입혀 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형태가 비슷한 것이 몇 벌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건 하나다. 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에도 어색해 보이지 않게 옷을 입어야 했다.

사제가 도와주었던 기억을 되살려 천을 걸치고, 주름을 만들고, 허리 위로 끈을 묶은 뒤 해인은 옷자락을 정리했다. 전신을 비출 만한 거울이 없으니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했으므로, 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문 쪽으로 다가가서 살짝 문을 열었다.

아킬레우스는 바로 앞에 있었다.

“……들어오셔도 돼요.”

“그래.”

아킬레우스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표정에 해인은 잠시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아주 새삼스럽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킬레우스는 변함없이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해인은 먼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 문을 반 쯤 열어 놓고는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여기.”

“그래.”

분명 파트로클로스의 목소리였지만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해인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짧게 파트로클로스와 몇 마디 더 말을 나눈 아킬레우스는 이내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손에는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더니 해인에게 눈짓했다. 해인은 쟁반에 담긴 반갑지 않은 음식들과 아킬레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음식은 한 사람 몫이었다.

“……저만요?”

“난 그대보다 일찍 일어났거든.”

자신보다 늦게 잠들고도 일찍 일어난 사람을 앞에 둔 해인은 할 말이 없어졌다. 하늘의 색을 보면 지금도 꽤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일찍 일어났다면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일어났다는 소리다. 몇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름을 남기는 영웅은 아무나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허기는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고정된 몸의 시간은 여전히 그대로인 모양이었지만, 권하는 것을 무작정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안 먹겠다고 하면 꼭 음식 투정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다. 해인은 체할 염려는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제와 같이 죽만 조금 우물거렸다.

얼마 후 해인이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 한편에서 다른 일을 하던 아킬레우스가 소리를 들은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남은 음식을 힐끗 본 그는 어제도 이와 비슷했음을 떠올리고는, 해인에게 문제인 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 게 아니라 먹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는 것임을 대략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억지로 권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오늘은 밖에 나가도 돼.”

뜬금없는 주제였다.

그러나 혹할 만한 단어가 끼어 있었다.

“……밖이요?”

해인이 관심을 보일 것을 예상했다는 듯 아킬레우스가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별다른 표정 없이 담담하던 얼굴 위로 확연한 관심이 드러났다.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과연 흥미로워서, 그는 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바깥. 대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안 되겠지. 나와 동행해야 하고, 곁에서 떨어져도 안 돼.”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물론 그대가 원치 않으면 계속 왕궁 안에 있어도 되고. 어제처럼 말이야. 낮에는 밤과 달리 포로들의 감시도 삼엄하고 병사들이 보초도 설 테니, 누군가 들어올 일은 없을 거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따라 나올 것이라고 확신을 섞어 추측했다. 어제부터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복도로 나가 창밖을 보고 있었고, 해가 질 때도 창가에 있었다. 거기에 오늘 잠에서 깼을 때도 창밖에 시선을 주던 것을 떠올려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해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확인하듯 물어 왔다.

“정말 나가도 되나요?”

해인의 입장에서는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밝을 때 바깥을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처럼 해가 질 때까지 하릴없이 방 안에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어야 했다. 괜히 바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상대가 먼저 권해 왔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이제 전후 정리도 거의 끝났으니까.”

아킬레우스가 확답했다. 그렇게 당일의 일정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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