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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8)화 (19/149)

방 안으로 들어온 아킬레우스는 창가에 서 있는 해인을 한번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가며 조용히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거기 있었나?”

창문을 두고 마주쳤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러기는 했지만, 해인은 우선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럼?”

“……불을 밝히고 싶어서.”

그 답에 아킬레우스가 보폭을 늘려 성큼 다가섰다. 순식간에 해인의 앞에 선 그는 해인의 손에 들린 등잔불을 빼냈다. 손을 뻗을 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정작 손이 스치듯 닿게 되자 아킬레우스는 저도 모르게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등잔불을 든 상대의 손이 너무 가늘다는 생각이 무심코 든 탓이다. 등잔불을 화로 근처로 가져가며 그가 물었다.

“어두운 걸 싫어해?”

“그렇지는 않아요.”

돌아온 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원했다는 대로 불을 켜 주었다. 해인은 그 방법을 유심히 살폈다. 방 안의 불을 모두 밝히자 실내는 그럭저럭 밝아졌다. 그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거의 손대지 않은 음식을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식사는 거의 안 했군. 입에 안 맞더라도 먹어 두는 게 나을 텐데.”

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죠. 신경 써 주셨는데 죄송해요.”

“사과하란 뜻은 아니었어.”

해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과가 아니면 무슨 반응을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됐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는 허리에 매어 두고 있던 검을 풀어 해인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에 있는 긴 의자에 던져두고, 그 옆에 걸터앉아 신발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해인은 그사이 창가에서 벗어나 침대 근처의 다른 의자에 앉았다.

해가 진 뒤의 밤은 고요했다.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소리, 혹은 소리 지르는 음성이 어렴풋이나마 들려오던 밝은 낮과는 달리 밤은 온전한 침묵의 순간들이었다. 그런 탓에 사방이 막힌 같은 공간 안의 또 다른 존재가 만들어 내는 소음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혼자 있던 방 안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으니 더욱 그러했다.

아킬레우스의 움직임을 무의식적으로 좇던 해인은 그가 불시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 오자 멈칫하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자신이 보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기에 반응을 꾸며 낼 틈도 없었다. 그 모습에 짧게 웃은 아킬레우스가 눈짓으로 근처의 침대를 가리켰다.

“낮까지 못 깨어났으니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잘 거면 그 침대를 쓰면 돼.”

그 말을 들은 해인은 불시에 아주 당연한 의문과 마주했다. 이 방은 아킬레우스가 거처로 쓰고 있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은요?”

“여기 있을 거야.”

아킬레우스가 가리킨 것은 검을 던져두었던 예의 긴 의자였다. 도저히 못 쓸 지경까지는 아니겠지만, 사용할 사람의 체격을 보면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해인은 잘 때까지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깨달음에 그녀는 다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 굳이 불편하게 있을 것 없이 제가 다른 방에서 자도 되는 일 아닌가요?”

자신이 쓰겠다던 의자에 앉은 아킬레우스가 아주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답했다.

“그래, 아니지.”

“……어째서요?”

“내가 그대를 지켜야 하니까.”

“네?”

“지금은 전쟁 중이야. 물론 여긴 내 부대가 점령했으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밤은 어둠에 숨어 몰래 움직이기 좋은 때니까.”

해인은 이미 이곳을 점령했다면서 누가 숨어들 수 있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킬레우스는 틈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정신 나간 포로 하나가 느슨해진 감시를 뚫고 비수를 숨긴 채 아무 방에나 잠입할지 어떻게 알겠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큰일이기는 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만약 해인이 다른 방에 있다면, 그리고 비수를 숨긴 이가 들어온 곳이 해인의 방이라면 거기서부터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낮잖아요?”

“일어나면 큰일이지.”

해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기에는 해인이 느끼는 아킬레우스와의 거리감이 넓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해인은 또 다른 문제를 맞이했다. 정말로 혼자 침대를 쓰기에는 양심이 아팠던 것이다.

“그럼 차라리 제가 거기서 자는 게…….”

어차피 처음부터 아킬레우스가 쓰던 방이고 해인은 어쩌다 굴러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 키도 체격도 더 큰 사람을 침대보다 좁은 곳에서 자게 내버려 두는 것은 해인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귀하게 큰 아가씨에게는 불편할 텐데.”

“그래도…….”

침대보다야 불편하겠지만 어차피 해인은 할 일도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랬다. 낮까지 자고 일어나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있던 사람과, 바깥에서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무언가를 하고 온 사람이 있다면 후자가 편하게 자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양심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해인이 말끝을 흐리자,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들고는 가만히 해인을 응시했다.

“……같은 침대에 눕고 싶은 게 아니면 이쯤 하는 게 좋을걸.”

약간 길다 싶은 침묵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 긴장하던 해인은, 그 발언에 정말로 멈칫 굳어 버렸다. 아킬레우스로서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는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더 사양해 봤자 서로 피곤하기만 하지, 안 그래?”

“……네.”

해인은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사실 심정적으로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지만 말해 봤자 통할 상대가 아닌 것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해인은 입을 다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사실 그녀는 아킬레우스가 해 질 녘쯤에 돌아오면, 잠깐 대화나 몇 마디 더 하고 또 다른 할 일을 하러 가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한다고는 짐작도 못 한 바였다.

뜻밖의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존재감 자체가 크게 의식되고 있었다. 해인은 일부러 아킬레우스 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게 주의하며 눈을 굴렸다.

‘거래 내용이 아버지의 수호를 얻는 대신 날 지켜 주는 것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설 것이라고는 짐작을 못 했다. 사실 해인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상황과, 호위가 생긴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기에 거래의 내용을 그저 단어 그대로 막연하게만 받아들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랬기에 아킬레우스가 저 정도로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겼다. 이쯤 되자 낮에 했던 생각이 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말 아버지의 수호가 내 생각 이상으로 더 가치 있는 대가인가? 내가 아버지를 너무 편하게만 생각하나……?’

잠깐 혼란스러웠던 해인은 이내 다른 쪽으로 생각의 흐름을 틀었다. 어쩌면, 대가가 가치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자아도취적인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걸 수도 있고.’

실제로 처음 만났을 때, 말도 통하지 않는 마당에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옷을 걸쳐 주고 왕궁으로 데려오는 등 호의적인 행동을 보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 낮 동안, 아킬레우스가 해인에게 친절하게 굴 때마다 기겁하는 눈길로 쳐다보던 파트로클로스의 반응이 정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해인은 문득 조용히 헛웃음 짓고 말았다. 혼자서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혼자 하는 생각이니 뭔들 못 하겠냐마는, 그럼에도 생각에서 한 발 빠져나오자 다소 머쓱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를 바탕으로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귀환의 조건을 찾아내 돌아가면 그만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더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해인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상할 만큼 컸고, 밝은 빛을 내고 있는, 기원전의 달이었다.

***

언젠가부터 일정하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살짝 꺾인 고개와 감긴 눈을 보니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든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해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으음…….”

“쉿, 괜찮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깊게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해인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깨려는 것 같은 기색에 그는 약간 당황하며 어색하게 해인을 달랬다. 침대에 눕혀 주고 가만히 지켜보길 몇 초, 찌푸려졌던 표정이 풀리고 잠에서도 깨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후…….”

아침까지는 그저 기분이 좋았을 뿐이다. 어쨌거나 갖고 싶었던 것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들어 가지고자 했고, 한 번 실패했었지만, 여러모로 일이 잘 풀려 상대 아버지의 동의하에 곁에 두게 되었다. 낮까지만 하더라도, 잠든 모습을 보며 그는 아름다운 보석을 어렵게 손에 넣은 것만 같은 성취감을 더 크게 느꼈다.

그러나 불과 반나절이 지난 지금, 고작 그게 전부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그저 성취감뿐이었다면 이미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해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었다는 성취감을 넘어 어딘지 묘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보석은 반짝이는 돌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알게 되고, 목소리를 듣고, 생생하게 움직이며, 눈이 반짝이거나, 표정이 변하는 것까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뜻밖의 흥미가 일었다. 햇빛을 등지고 미소 짓던 얼굴이 아직 뇌리에 선명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굴며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것은 태어난 이래로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나, 막상 하게 되자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아마도 본인이 내켜서 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내키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또한 본인이 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늘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침대 맡에 조용히 걸터앉은 아킬레우스는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드는 달빛이 비추는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아침에 그랬듯 흰 뺨을 쓰다듬자, 이번에는 해인이 고개를 틀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 왔다.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무의식중에도 남의 손을 타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하긴, 그렇게 싸고돌았으니.”

이제는 그만 떠올리고 싶은 포세이돈의 태도를 반추하며,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얼굴 위로 흐른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주었다.

해인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 자신의 곁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포세이돈이 친히 알려 준 만큼 아킬레우스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인이 완전한 자신의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고 말았다.

지켜보면 즐거울 것 같으니, 손안에 넣어 두고 싶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아킬레우스는 조용히 일어나 해인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등잔불을 차례로 꺼트렸다. 등잔불이 하나씩 꺼질 때마다 방 안은 점차 어두워졌다. 마침내 창문 틈으로 새어 드는 달빛과 작은 화로의 불빛만 남기고, 아킬레우스는 다시 침대 근처로 돌아와 이번에는 가까이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밤이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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