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7)화 (18/149)

***

파트로클로스가 나가고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 때, 문 바깥으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이 어린 티가 물씬 나는 앳된 목소리였다. 거기에 바짝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했다.

“……들어오세요.”

해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후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인 것은 누가 봐도 열다섯이 채 안 된 소년이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어린 병사를 시켜 식사를 비롯해 이것저것 전해 주겠다고 말했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어린 병사라고는 했지만 저 정도로 어릴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한 해인은 놀란 눈을 했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병사 쪽이었다. 존경하는 부지휘관은 누구라고 알려 주지는 않고, 다만 식사와 짐을 들려 준 뒤 정중하게 그것들을 전해 주라고 얘기했을 뿐이다. 심지어 가야 할 곳은 지휘관의 처소였기에 그는 두 배로 겁먹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전쟁과는 조금의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여자다. 잠시 혼란스러웠다가,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불현듯 새삼스럽게 깨달은 병사는 홀로 지레짐작하고 삐걱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그, 실례하, 실례하겠습니다.”

어린 병사는 방 안의 테이블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팔에 끼고 온 보따리는 해인에게 건네주었다. 그 모든 동작들이 지나치게 어색하여 해인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자 어린 병사는 오히려 더 허둥지둥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사에 답하고, 그는 문가로 뛰듯이 걸어갔다. 어색하게 힘 들어간 동작으로 방을 나간 병사가 문을 조심히 닫아 주었다. 해인은 미묘한 기분으로 그것을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에서 지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싶은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곳은 현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뒤따라 떠올랐다.

“하긴, 이 시대 기준으로는 저만한 나이도 어른으로 쳐 주…….”

무심코 혼잣말을 하다가 해인은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특별히 예언 같은 발언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처럼 남들이 들었을 때 위화감이 느껴질 법한 단어도 사용을 지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숨을 쉬며 해인은 건네받았던 보따리를 풀어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파트로클로스가 말했던 대로 옷가지 몇 벌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 더 색이 선명하고, 짜임도 견고하게 보이는 천이었지만 크게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옷들을 치워 내자 그 아래 묻혀 있던 신발이 보였다. 옷보다는 당장 없는 신발이 반가운 것은 당연했다. 해인은 옷들을 침대 위에 대강 얹어 놓고 신발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맨발로 다녔으니 우선 씻고 신발을 신을 생각이었다.

왕궁 안으로도 어지간하면 사람이 다니지 않음을 확인받은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해인은 망설임 없이 또 복도로 나왔다. 여기저기 살펴보며 돌아다닌 끝에 욕실로 보이는 곳을 찾아낸 해인은 생각했던 대로 씻고 신발을 신었다. 어젯밤의 기억을 되살려 가죽 끈을 묶어 본 결과, 어설프기는 해도 발에 고정되어 걷기에는 충분했다. 신발 자체가 다소 크기는 했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신발이 생긴 김에 왕궁 안을 돌아보며 해인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 가운데 여기저기 어지럽혀져 있긴 했지만 생활감이 남은, 주인이 있었던 것 같은 빈방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기하기는 해도 굳이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지금은 죽었다는 팀블레의 왕족들이 이 방을 썼거니 싶어서였다.

너무 멀리까지 가 버린 탓에 해인은 길을 조금 헤매다 겨우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길을 잃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뜻과 같았다. 넓어 봤자 건물 안이었으니 정말로 미아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복도를 더 이상 헤매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부터는 방 안에 있어야겠다고 결심한 해인은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처음부터 관심이 가지 않았던 듯했다.

‘……왜지?’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해의 위치를 보면 지금은 정오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았고 방금 열심히 돌아다니기까지 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기원전의 음식을 내려다보며 해인은 당연한 생체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무심코 신발을 신은 발끝을 내려다보았을 때, 해인은 그제야 떠오른 것에 탄성을 내뱉었다.

“아, 시간 고정…….”

지난밤 크로노스는 해인에게 ‘네 몸의 시간을 고정해서, 변화가 생겨도 반나절 정도가 지나면 고정된 시간대로 되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니 어떠한 종류의 변화가 생겨도 몸의 시간이 되돌아가며,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불편은 없어지게 된 상황이었다.

“이건 정말 어디서든 유용한 것 같은데…….”

해인은 약간 질린 얼굴로 감탄했다. 뒤늦게 포세이돈의 신전에서 들었던 크로노스의 조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시간이 돌아가는 반나절 동안 죽음에 이를 만큼의 부상이라면 이런 조치도 소용없다고 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크게 다쳐도 반나절만 살아 있으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을 안 먹어도 되고, 물을 안 마셔도 괜찮았다. 어차피 반나절이 지나면 고정된 시간대로 돌아와 허기나 갈증도 느껴지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 대단한 건 크로노스 님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현대에서는 시간이야말로 드높은 가치를 지닌 것들 중 하나였다. 해인은 그저 온화하게만 보였던 크로노스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져, 이어지던 생각을 의식적으로 멈췄다.

생각의 주제를 돌릴 겸, 호기심에 근거하여 해인은 눈앞의 음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기원전이라고 해도 불을 사용해 음식을 조리하는 이상 특이할 것은 없었다. 병에 담긴 물과, 오래 끓인 포리지 같은 죽,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가루가 뿌려진 정체 모를 고기를 차례로 살펴본 해인은 컵에 물을 따르며 앞으로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 정말 먹지 않으면 처음에는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먹지 않고도 멀쩡한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크로노스가 그걸 가능하게 해 주었다고 구구절절 말해 봤자 간단히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믿게 만들려면, 크로노스의 이름을 운운하려면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럴 바에는 먹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낫지.’

결론을 내린 해인은 죽만 조금 입에 대어 본 뒤, 곧장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긴 것 그대로의 맛이었다. 원래도 입이 짧은 편이었기에 해인은 이 이상 무언가를 입 안에 집어넣고 싶지 않아졌다.

“후…….”

한숨을 내쉰 해인이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핸드폰도 없고, 그 외의 다른 놀 거리도 딱히 없으니 할 일도 없다.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끝에, 해인은 결국 또 창가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고 있는 모습이 꼭 탑에 갇히기라도 한 모양새인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보낼 만한 다른 일이 없으니 이쪽이 최선이었다.

아직 바깥은 밝았고,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제법 먼 곳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해인은 아득하게 보이는 들판과 맞닿은 맑은 하늘을 응시했다.

어젯밤에는 분명 날씨가 추웠는데, 낮인 지금은 몹시 따뜻한 것으로 미루어 이 시대 역시 그녀가 떠나온 현대와 얼추 같은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덥고 그렇지 않을 때는 추운, 전형적인 환절기의 날씨였다. 거기에 더해 나무의 색이 푸른 것을 보면 봄인 것이 분명했다.

“팀블레, 테베……. 트로이.”

평화롭게 봄볕을 쬐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무런 생각조차 않고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싫었기에 해인은 아까 전 들었던 국가의 이름들과 유일하게 원래부터 알던 국가의 이름을 되짚으며 창가에 비스듬히 기댔다.

지금 있는 곳은 팀블레이고 곧 테베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어제 포세이돈이 말하길 전쟁은 십 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트로이는 궁지에 몰렸으니 높은 확률로 올해가 가기 전 무너질 것이다.

‘최소한 멸망하기 전에 돌아갈 수는 있겠지. 전쟁터까지 왔다면, 전쟁 기간 중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테니까…….’

다만 만약 전쟁이 올해의 말까지 길게 이어진다면, 여름을 이 시대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해인은 조금 아득해졌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다른 것을 고민했다.

전쟁이 이어지는 도중 아킬레우스와 함께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크로노스의 말대로 이것저것 하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고 그저 진심으로만 모든 것을 대하면 그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질 때쯤 돌아오겠다던 아킬레우스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일이 많아 바쁜 것 같았으니 자신을 얼마나 상대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든 사람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잠시나마 덜 지루할 것이다. 해인은 시선을 들어 창밖의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자 때마침 누군가 짠 것처럼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굳이 자세히 보려 애쓰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였다. 해인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해가 질 때쯤이네.”

아주 작게, 본인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결코 들릴 리가 없는데도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아킬레우스가 꼭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말이 가까이일 뿐, 거리로 따지면 겨우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직시해 오는 시선이 선명했다. 그 모습에 의아한 듯 아킬레우스를 돌아본 파트로클로스도 이내 해인을 발견하고는 빙긋 웃어 주었다.

어느 사이 해가 졌다.

낮까지의 따뜻한 기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새 서늘해졌다. 어두워진 방 안에는 거의 꺼져 가는 불씨가 담긴 작은 화로만 아주 희미하게 타올랐다.

왕궁으로 오는 것 같던 이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쩐지 그들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 내키지 않아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이 어두우니 불이라도 밝혀 볼 생각이었다.

느낌상 화로의 불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았지만, 불꽃이 아주 작을뿐더러 어떤 도구를 써야 할지도 바로 감이 잡히지 않아 창가 근처에 놓인 등잔불을 들어 올려 살피며 고민할 때였다.

복도로부터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해인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발걸음은 당연하다는 듯 가까워졌고, 이내 해인이 있는 방 앞에서 멈췄다. 다음 순간 무거운 것이 바닥에 밀리는 것 같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희미한 화롯불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이의 금빛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딱히 낯설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 아킬레우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