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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6)화 (17/149)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다지 감탄스럽지도 않고 내키지도 않은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 부관들 중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대를 혼자 둘 수 없는 상황에서는 파트로클로스를 곁에 붙여 놓고 갈 테니 기억해 둬.”

말투와는 별개로 전부 진심 같기는 했다. 파트로클로스는 힐끗 아킬레우스를 보더니 마침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거 영광이군.”

그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설명할 게 남았다면, 그 일을 내게 맡기고 너는 밖으로 나가 할 일을 마저 하는 게 좋겠는데……. 잠깐 다녀온다고 해 놓고 돌아오지를 않으니 내가 찾으러 온 거잖아.”

그러고 보니 이 방에 들어올 때의 파트로클로스는 꼭 도망친 사람을 잡으러 온 것 같은 어투를 썼었다. 게다가 어제 포세이돈과 크로노스의 말을 떠올려 보면 아킬레우스는 장군이라고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느긋하게 앉아 있을 시간은 없을 법도 했다.

“하…….”

과연 아킬레우스는 인상을 쓰기는 했지만, 이내 파트로클로스의 말에 수긍했다. 다수를 책임져야 하는 지위를 가진 이상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다음 순간 해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아킬레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잠시 해인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누가 듣더라도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파트로클로스에게 물어봐도 되고, 아니면 해가 질 때쯤 돌아올 테니 그때 이야기해.”

그 목소리를 들은 파트로클로스가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 같은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먼저 나가 볼 테니 좀 챙겨 줘.”

정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방을 나가기 직전 파트로클로스에게 건넨 말도 해인에 대한 염려일 정도였다.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이제 파트로클로스와 해인만이 남겨졌다. 똑같이 낯선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더 낯선 사람과 남겨진 해인은 어색하게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직전까지의 놀란 표정을 수습하더니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대화를 나누시던 중 갑자기 들어와서는, 대화 상대를 없애 버리기까지 한 셈이군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군대의 일에는 지휘관이 꼭 필요한 때가 있기 마련이어서요.”

그 말투와 표정에서부터 파트로클로스의 사교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순식간에 상대를 부담 없이 만들 줄 알았다. 실제 성격이 그러한지, 아니면 꾸며 낸 모습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어색함을 깨트리는 데는 충분했다.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해인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감명 받았다. 귀하게만 자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생각 외로 까다롭지 않았다. 사정을 들어 보니 이쪽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로 심력 소모가 제법 있었을 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물론 겉보기가 괜찮다고 속까지 그럴 가능성은 낮았으니 파트로클로스는 의식적으로 차분한 말투를 썼다.

“이해해 주시니 고맙군요. 하지만 또 미안하게도, 아직 포로를 분류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아 당장 시중을 들어줄 만한 사람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것도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혼자 하는 쪽이 편할 것 같고요.”

이것도 진심이었다. 어제 만났던 사제부터 시작해 왜 이렇게 남의 시중을 드는 것에 신경을 쓰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현대인에게는 목욕할 때 곁에 붙어서 도와주는 것부터 이미 지나친 간섭이었다.

물론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파트로클로스는 알아서 그 뜻을 해석했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곁을 내어 주기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서로가 맞춘 초점이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사실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으나,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해한다면 다행이었다.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저희 군은 내일까지 이곳에 머물 겁니다. 계실 동안 이 왕궁 안의 시설은 좋을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은 아킬레우스가 이곳을 거처로 쓰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특별히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특히 이 방은 본인이나 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오지 않아요. 물론 이제는 아가씨까지 포함되겠죠.”

파트로클로스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해인이 미처 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가 궁금해할 만한 것을 전부 이야기해 주고 있었고, 그 덕분에 해인은 알아들었다는 의사를 표현하며 경청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왕궁 안은 대체로 안전합니다. 바깥에 병사 두엇을 시켜 보초를 세울 예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혹시 모르니 방 바깥으로 너무 자주 나오지는 마세요. 아직 날씨도 춥고, 혹시 모를 사고가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식사는 이따가 어린 병사를 시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옷가지 같은 것들도 마침 구하기 어렵지 않으니 함께 들려 보낼 수 있겠군요.”

“신경 쓰시느라 번거로우시겠어요.”

“전혀요. 이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니, 번거로울 것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을요.”

해인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사정을 안다 해도 귀찮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부관이라고 했고, 그와 가까워 보였으며, 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 분명한 사람이 호의적이다 못해 이미 완전히 마음을 연 것 같은 태도를 보이면 나쁠 건 없었다. 상관이나 부관 둘 다 해인의 생각보다 호의적이니 오히려 눈치 볼 일은 줄어든 셈이다. 해인은 따로 말을 덧붙이지 않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파트로클로스는 마주 웃어 주며 이어 말했다.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아니요, 묻고 싶었던 것들은 이미 다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더라도 후에 알고 싶은 게 더 생긴다면 그건 아킬레우스에게 물어봐도 될 것 같네요.”

그는 방금 전 본 아킬레우스의 태도를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그와 함께 자랐던 파트로클로스도 생전 본 적 없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제가 잘난 것을 알아서 저보다 못한 것들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태도로 살아오던 아킬레우스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파트로클로스는 확신하며 덧붙였다.

“성의껏 이야기해 줄 겁니다.”

“네…….”

그것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인가 싶었던 해인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그럼 저도 할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겠군요. 괜찮겠습니까? 물론 이곳은 안전하니 혼자 계셔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네, 괜찮아요. 감사했습니다.”

“천만에요.”

끝까지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파트로클로스는 뒤돌아 나갔다. 해인은 그 뒷모습과, 조용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어쨌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파트로클로스는 이야기를 잘 끝낸 것에 대해 보람찬 기분을 느끼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는 원래도 남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중에서도 해인에게 특히 정중하게 군 것은 사실이다. 그건 아킬레우스가 포세이돈과 했다는 거래가 아주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 하나 지키는 대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세이돈의 수호를 얻는다면 그건 충분히 남는 장사다. 그러잖아도 아킬레우스는 끔찍하다면 끔찍하고, 불길하다면 불길한 예언을 받은 몸이었다.

「전쟁에 나가 영광을 얻으면 단명할 것이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아무런 명예 없이 장수할 것이다.」

일찍이 트로이와의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예언이 있었기에, 아들에게 내려진 예언을 들은 테티스는 당장에 아들을 붙잡아 여장 시키고는 스키로스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의 왕인 리코메데스에게 이야기해 그의 딸들 사이에 아킬레우스를 숨겼다. 영광이 없더라도 오래 살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 아킬레우스는 아직 성장기가 오지 않은 소년이었고 키는 컸지만 체격은 덜 자라 있었다. 게다가 테티스를 닮은 얼굴도 선이 굵어지지 않았을 때였기에, 잘 꾸며 놓자 놀랄 만큼 위화감 없이 공주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테티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아킬레우스가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 그 계획은 실패했다. 당사자의 협조가 없던 탓이다. 예언의 주인인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예언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강요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가 찾아와 부디 참전해 달라 부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오지도 않은 것이 두려워 무작정 숨어 있는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과 함께였다.

아킬레우스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쟁터에 발을 내디뎠다.

전공을 쌓아 올렸고, 영광을 얻었으며……. 십 년째 생존했다.

처음에는 테티스의 의견에 동의하던 파트로클로스도 이쯤 되자 아킬레우스의 주장에 조금쯤 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단명이라는 건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뜻이고,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젊다. 게다가 그는 영광을 이미 한가득 얻었다.

아직은 살아 있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주장하는 대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영광도 얻은 채 오래 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예언대로 죽게 된다면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쓰러지는 죽음만은 아니길 바랐다.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스스로 맞이할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죽음과,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포세이돈의 수호는 그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안전장치와 같았다. 그가 전쟁터에서 아킬레우스를 지켜 준다면, 만약 죽게 되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가족과 친지들의 가운데 누워 평화롭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파트로클로스에게는 해인의 존재가 달갑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아킬레우스의 말대로 되어서 오래 사는 게 더 좋겠지만…….’

그렇게 되어도 방금 전의 모습을 보면 나쁠 게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을 경험해 보는 것은 성장하는 것과 같다. 하는 행동을 보니 언젠가 아킬레우스는 분명 해인을 간절히 붙잡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때가 왔을 때 해인이 아킬레우스를 거절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고향에 돌아간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상실이다.

그리고 만약 아킬레우스의 설득이나 부탁이 해인의 마음을 울려,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킬레우스의 곁에 남길 선택한다면 그녀의 존재는 아킬레우스에게 있어 큰 의미가 될 것이 분명했다. 고작해야 어제 본 사람일 뿐이었으나 파트로클로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아직 머나먼 일이다.

왕궁 밖으로 완전히 나서며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추측하는 대신, 다시 눈앞의 일을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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