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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5)화 (16/149)

통성명까지 끝내자 대화 자체가 잠시 끊겼다. 그사이에도 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그녀로부터 문득 어젯밤과 같은 요소를 하나 발견했다.

“……또 맨발이군.”

시선이 떨어지지 않을 때부터 조금씩 부담을 느끼던 해인은, 마침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었기에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발에서는 거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을 계속 밟고 다녔고, 창가에 오래 앉아 있던 탓인지 몸의 체온 자체도 내려가 있는 탓이었다.

“그러고도 밖으로 나올 생각을 했다고…….”

어이없다는 듯 말끝을 흐린 아킬레우스가 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어젯밤에도 비슷한, 사실상 거의 똑같은 일이 있었음을 곧바로 떠올린 해인은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사양했다.

“괜찮아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안 되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양을 거절하며 아킬레우스는 어제와 같이 성큼 다가와 해인을 안아 들었다. 단번에 몸이 들어 올려지고, 해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짚었다. 만약 다음에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말이 아니라 몸부터 움직여 거리를 벌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미 겪어 본 바가 있기에 이렇게 된 이상 내려 주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닥을 딛을 수 없음은 쉽게 짐작 가능했다. 진심으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가요?”

“그대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해. 거래 조건을 위반하게 될 테니까. 내가 포세이돈 님과 거래를 한 것을 알고 있으니, 그 내용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해인은 내용을 아주 잘 알았다. 앞으로 나서 행동을 한 존재가 포세이돈이었을 뿐 크로노스에게 설명을 들을 때는 해인도 함께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토록 잘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이 정도로 아킬레우스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다치지도 않았지만 만약 다쳤더라도 그건 신발도 없으면서 굳이 밖으로 나온 해인의 책임이다. 무엇보다, 결국 그건 책임 문제를 떠나 알려질 이유도 없을 만큼 사소한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는 않으실 거예요.”

아킬레우스가 가볍게 부정했다.

“아닐걸.”

아침에 본 포세이돈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아주 사소한 상처로도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누가 잘못했는지의 여부는 어차피 그에게 있어 상관없는 문제일 것이다. 아끼는 자식을 피치 못한 사정으로 마음에 안 드는 사내와 붙여 둔 신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다만 그 자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니, 아킬레우스는 포세이돈 님께서 자식 앞에서는 제법 점잖게 굴었나 보다 짐작하며 품에 안은 몸을 추슬렀다. 그때까지도 기대지 않고 뻣뻣하게 들려만 있던 해인이 휘청하며 반사적으로 아킬레우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물론 아킬레우스의 진심을 말하자면, 포세이돈과의 거래는 핑계에 가까웠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돌로 만들어진 왕궁의 바닥에는 어딘가에 날카로운 돌 조각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방까지의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바닥을 밟게 내버려 둘 이유도 없었다. 갈수록 조금씩,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 참이었으니 흠집이라도 나면 포세이돈이 아닌 아킬레우스 본인부터가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안아 든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와는 별개로, 해인은 그냥 혼자 걷도록 두는 것이 편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어쨌든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고 방으로 돌아온 것도 금방이었기 때문이다.

방 안으로 들어와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의자 위로 내려 주었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도 선명히 닿아 오던 체온이 떨어지자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었건만 갑작스레 소름이 돋았다. 해인이 옷자락을 정리하는 사이 문을 닫고 돌아온 아킬레우스가 해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아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킬레우스가 느긋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게 묻고 싶은 건 없어?”

“……음.”

제법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면담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설명을 듣고 싶기는 했고, 그런 면에 있어 아킬레우스는 분명 적임자였으니 해인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게다가 불과 몇 분 전 이 사람과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는데, 상대의 태도를 보면 그것이 어렵지 않을 듯싶었다. 오히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저쪽에서 먼저 호의를 보이고 있다.

결과론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의문스럽기도 했다. 해인의 입장에서야 돌아갈 때까지 신변을 맡겨야 하는 만큼 상대에게 호의적일 이유가 충분했지만, 갑자기 사람 하나를 떠맡게 된 것과 다름없는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귀찮다고 여길 만도 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래가 마음에 들었나? 아버지의 수호가 내 생각보다도 더 가치 있는 대가인가?’

해인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사적인 의문을 정말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여기며 우선 넘어간 해인은 이 상황에서 필요한 정보부터 들어 보고자 입을 열었다.

“여기는 정확히 어딘가요?”

“팀블레라는 작은 도시이고, 그곳의 왕궁이야.”

돌아오는 답은 준비한 듯 빨랐다.

“하지만 멸망했으니 이제는 크게 의미 없는 이름이군.”

“네?”

“어제부로 이곳의 왕족들이 모두 죽…….”

무심코 말을 잇다 말고 멈칫하며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 행동에 해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 것인지 금세 짐작했다. 모두 죽었다. 멈추지 않았다면 그렇게 맺어졌을 것이다. 해인은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돌려서 답해 주었다.

“네, 이해했어요.”

“……그래.”

전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멀리서 접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말간 얼굴을 보자, 느껴 본 적 드문 죄책감 같은 것이 문득 파고들었다. 당당하게 거래에 응하기는 했지만 아킬레우스는 사실 자신보다 약한 것을 지켜 본 적이 없었다. 지킨다는 것이 꼭 신체의 안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앞으로 말을 할 때도 조금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아킬레우스가 환기시키듯 덧붙였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으니 여기서 머물며 군을 정비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었지. 내일까지 있을 거고 모레에는 테베로 떠날 거야.”

“테베?”

“테베. 거기서 연합군과 합류하기로 했거든.”

해인은 테베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물론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단순히 ‘트로이 전쟁’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 이곳도 앞으로 갈 곳도 정작 트로이는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약간의 혼란을 불러왔다. 역시 애매한 지식은 없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오히려 미래의 일을 덮어 두고 들으면 어려운 내용은 없었으므로, 해인은 적당히 납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트로이는 멸망할 것이고, 눈앞의 이 사람은…….

“너 여기 있지?”

이어지던 생각을 끊으며 닫혀 있던 문 밖으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도망친 사람을 잡으러 온 것 같은 어투였다. 해인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방 안에서는 아킬레우스가 잊고 있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잠깐 보고만 오겠다더니, 네 잠깐은……. 어?”

해인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과 의도치 않게 눈을 마주했다. 갈색 눈동자가 놀란 감정을 품고 확장됐다.

“이런, 깨어나셨을 줄은 몰랐는데…….”

해인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보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 두 가지 모두 어두운 곳에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환한 색이긴 했지만 얼굴은 낯익었다.

지난밤 봤었던 사람이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아킬레우스가 앉은 의자 곁에 선 파트로클로스는 가만히 응시해 오는 시선을 느끼고 약간 난처한 기색으로 해인과 마주 보았다. 그가 아킬레우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서 뭐 하고 있었어? 말도 안 통하잖아.”

아킬레우스는 힐끗 시선만 올려 파트로클로스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그의 질문에 답해 주지 않은 채, 하룻밤 사이 달라진 정보를 숨기며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인사해. 이쪽은 내 친우이자 부관인 파트로클로스.”

해명은 고사하고 다짜고짜 소개를 해 버리는 기행에 피트로클로스는 어이없는 눈길로 아킬레우스를 곁눈질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인은 우선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 잘 만든 조각상처럼 고요히 앉아 있던 이가 갑자기 웃어 보이자 파트로클로스는 당황하며 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은 그런 그를 마주하며 인사했다.

“처음 뵙는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러잖아도 당황했던 파트로클로스가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더듬거리며 답했다.

“……아, 어? 네, 그렇습니다만…….”

“어제는 못 알아들었던 게 맞지만, 이제 이곳의 언어를 쓸 수 있게 되어서요. 해인이라고 합니다.”

이름까지 듣고서야 파트로클로스의 당황이 조금 가라앉았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는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노려보며 깊이 숨을 한번 내쉬었다. 해인은 그 광경을 보며 어렵지 않게 그들이 아주 친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저런 장난을 치는 것도 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머리 위로 노려보는 시선이 꽂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이내 알아서 진정하고 표정을 바꿨다. 그가 침착하게 웃으며 해인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했군요. 저는 메노이티오스의 아들, 파트로클로스라고 합니다. 말이 통하게 되었다니 정말 잘된 일이네요. 아가씨의 사정에 대해서는 저 역시 대강 들었습니다.”

아킬레우스에게 격의 없이 말을 걸 때와는 조금 다른 온화한 목소리였다. 해인은 어쩐지 차분해지는 기분으로 적당히 응수했다.

“그러셨군요.”

“예, 부디 포세이돈 님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무사히 고향에 돌아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늘 전쟁터 한가운데서 지내느라 편안한 환경은 아니겠지만, 아킬레우스를 비롯해 저 역시도 당신이 다치실 일은 없게 노력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파트로클로스를 응시했다. 문장은 길었지만 매끄러웠고 친절을 드러내면서도 선은 잘 지키고 있었다. 어쩐지 박수라도 쳐 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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