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중요한 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을 보면 정신이 없긴 했던 모양이다. 불안한 기분이 든다고 해서 다짜고짜 방 바깥으로 나갈 생각 말고, 가만히 앉아 심호흡하며 상황이나 좀 더 정리해 보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상 포세이돈이 해인은 알 수 없는 계획을 세워 가며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준 것도 결국에는 눈앞의 이 남자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킬레우스의 곁에 있어야만 무사히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으니, 이 일에 필요한 요소 가운데 그가 제일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인은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의 높이는 달랐지만 어젯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행동이 호의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쉬웠고, 그건 고마운 일이 맞았다. 그러나 문제는 정말 잡고 내려가기에는 창문턱이 그리 높지 않아 머쓱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못 내려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올라가는 것을 이미 혼자 했는데 내려오는 것을 혼자 못 할 리가 없었다. 해인은 손으로부터 눈을 떼고 시선을 조금 올려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응시하며 고민했다.
그는 아마 그들이 여전히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해인은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먼저 반말을 써 왔으나, 해인은 불쾌함을 느끼기보다는 시대의 인식과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상대의 행동을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존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같이 반말로 받아칠 수도 있기야 했지만, 유교 국가에서 자란 나머지 친하지 않은 연장자에게는 도저히 쉽게 반말이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아킬레우스는 아무리 봐도 해인보다 최소한 두세 살 정도는 많아 보였다.
“네, 내려갈게요. 하지만 혼자 할 수 있어요.”
대답과 함께 아킬레우스를 똑바로 마주 본 해인은 그의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가는 놀란 기색을 확인했다. 어째서 놀라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크로노스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선물해 준 셈이었다. 그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해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이곳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요. 신께서 도움을 주셨거든요.”
“……잘됐군.”
잠깐의 침묵 끝에 아킬레우스는 겨우 답을 내놓았다. 그사이 해인은 정말로 혼자 창문턱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왔고, 그 모습을 보며 아킬레우스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해인과 대화가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인에게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말을 가르치려면 얼마나 걸릴지 따위를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그 모든 고민과 생각을 단번에 걷어 낼 만큼 선명하게 말을 건네 오는 또렷한 목소리는,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어젯밤까지는 분명 경계하는 기색이 없잖아 드러나던 얼굴 위로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해인의 입장에서는 크로노스가 보장한 안전을 신뢰할 뿐이었지만, 그 신뢰를 마주하는 당사자는 원인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무엇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을 등지고 앉아 웃어 보였던 그 찰나의 얼굴이…….
기묘한 감각을 들게 했다.
심장 깊은 곳의 어딘가가 내려앉듯 떨려 왔다.
밝은 빛 아래서 보자 정말로 바다 같은 눈동자였다. 해인의 아버지가 포세이돈이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당연하게도 그 눈동자가 신을 빼닮은 색채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신들 특유의 고압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게도 느껴지는 눈길과는 결이 달랐다. 분명 같은 색임에도 몹시 다르게 느껴졌다. 햇빛을 받아 잘게 빛나는 잔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저를 여기 데려다주고 가셨나요?”
그러나 해인은 눈앞의 상대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일렁이는 눈빛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찰나의 순간이 어긋나는 것은 언제나 흔한 일이었다.
해인이 물음과 함께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봤을 때, 아킬레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어내며 답했다.
“……그래, 그대의 아버지께서 내게 거래를 제안하셨지.”
그리고 그는 해인이 전혀 놀라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대도 이미 아는 모양이군.”
“맞아요, 알고 있어요. 제 일이니까요.”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하며 해인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물론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니, 해인 그 자신의 일이라 해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상황이 무려 두 신의 수고를 거쳐 만들어진 기회라는 것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눈앞의 아킬레우스는 그 자체로도 이 일과 엮여 있는 존재였고, 게다가 돌아갈 때까지의 신변의 안전을 그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니 가능한 호의적인 관계를 형성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의를 차렸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나긋한 어투였지만 그 속에는 태생적으로 타고나 자라며 지켜 왔을 당당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그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고 또한 침묵마저 다소 길어지자 해인이 웃음기를 거두고는 의아한 낯을 했다.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슬쩍 웃어 보이며 그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질문을 꺼냈다.
“그대, 이름은?”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이름을 이미 여러 곳에서 듣고 본 탓에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그조차 아닐 것이다.
포세이돈이 아킬레우스에게 거래를 제안하며 친히 해인의 이름을 알려 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아버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자식은 어렵지 않게 사실을 추측해 냈다. 해인은 수긍하며 바로 답해 주었다.
“해인.”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게 금방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이름이다. 아킬레우스는 그 이름을 입 속으로 몇 번 중얼거렸다. 짧게 끝나는 울림이었고, 어렵지는 않았지만 낯선 발음이었다.
“내 이름은 알고 있나?”
이어진 질문에 해인은 무심코 웃었다. 해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멈칫한 사이 해인이 고개를 들고 아킬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실은 저는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께서 여러 번 말씀하셔서요.”
아킬레우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좋은 뜻으로 여러 번 말한 것은 아님을 느꼈다.
자타공인 아카이아 연합군 최고의 장군임을 단 한 번도 부정해 본 적 없고, 실제로도 사실이 그러한,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공을 세워 언제나 명예와 함께하던 그였지만, 아침에 보았던 포세이돈은 그런 것들보다 그저 아킬레우스가 해인에게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모습뿐이었다. 그것을 떠올려 보면 빤한 일이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널 믿겠느냐는 질문에 아킬레우스는 그를 적당히 이해해주기로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헤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양자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네오프톨레모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는데, 아킬레우스는 그가 무엇을 한다 해도 딱히 건드릴 생각이 없었기에 더 그러했다.
아킬레우스가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눈가를 설핏 찌푸린 순간, 해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직접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은 포세이돈뿐만 아니라 크로노스도 몇 번 언급했기에 귀에도 익었지만, 사실 해인에게는 그보다 더 이전인 어릴 적 현대의 책 속 글자로 읽었던 이름이었다. 그렇다 보니 도저히 이름이 이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인에게 있어 아킬레우스는 그저 단어였고, 활자였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했다. 어두울 때도 비현실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밝은 곳에서 보자 한층 더 그렇게 느껴지는 얼굴이다. 장인이 열정을 다해 만들어 낸 조각상 같은 생김새는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도움이 안 됐다. 해인은 스스로의 현실감을 조금 더 일깨워 보고자 요청했다.
“그래야 소개의 의미가 있잖아요.”
아킬레우스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기본적인 눈치가 있는 자라면 어딜 어떻게 봐도 해인이 사감 없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의미 있게 들리는 말을 잘도 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킬레우스로서는 기껍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포세이돈이 어떤 설명을 덧붙여 가며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신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간에 정작 그의 자식은 당사자에게서 직접 이름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우습지만 이긴 기분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이름을 알려 주었다.
“아킬레우스.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는 어느 시대에서든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것의 진정한 주인인 아킬레우스 본인에게서 직접 이름을 듣는 것은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얻을 수 없을 기회였다. 해인이 스스로 그 기회를 바란 적은 없었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바 흔치 않은 경험이라는 감상은 들었다.
“……아킬레우스.”
아득한 과거를 살아가는 반신의 소개를 들으며, 그녀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살아 있는 주인을 가진 이름임을 의식적으로 분명히 새겼다. 살아 있는 주인을 가진, 살아 있는 이름이다. 마치 확인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서 이름의 주인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렇게 불러.”
복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 평소의 아킬레우스를 아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