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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3)화 (14/149)

***

왕궁의 안쪽 깊은 곳에 위치한 자신이 쓰는 방으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침대 위로 조심히 해인을 내려놓았다.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돌아왔기에 오는 중 깨어나지 않을까 했는데, 해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아마도 포세이돈의 것으로 보이는 히마티온을 걷어 내고 야무지게 감긴 천도 풀어내서 한쪽으로 치웠다. 드러난 얼굴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눈치챘다.

“무슨 수를 쓰셨군.”

그는 조용히 혀를 찼다. 포세이돈이 자신과의 거래에서 해인을 얼마나 철저히 제3자로 만들고자 했는지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신을 떠올리며 하는 행동이라기에는 무척 무례한 태도였지만, 일단 이 방 안에서 깨어 있는 존재는 아킬레우스뿐이었으므로 별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침대 맡에 앉아 잠시 잠든 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침이기에 주변이 밝았고, 덕분에 지난밤보다 더 선명하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치 감상하듯 움직임을 멈췄다가, 이내 조심히 손을 뻗어 혈색 도는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건 꼭 어렵게 손에 넣은, 깨지기 쉽고 귀한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사실 실제 감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난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으며 지금 이렇듯 힘들게 손에 넣었으니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던 것이다.

그가 뺨에 이어 긴 머리카락의 끝을 만지작거리던 때였다. 바깥 복도로부터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문 앞에서 멎었을 때 아킬레우스는 고개를 들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을 열어젖히며 파트로클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킬레우스, 무슨 일 있어? 왜 아직 안 나와?”

아킬레우스가 그를 보며 낮게 속삭였다.

“조용히 말해.”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그 말을 대강 흘려들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지금보다도 더 이른 아침 아킬레우스가 혼자서 왕궁을 빠져나간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기에, 다만 아킬레우스가 늦잠을 잤거나 어떠한 일이 생겨 준비가 늦어졌다고 생각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예상했던 어떠한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는 방 안의 광경을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잠깐만…….”

그는 몇 걸음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는 낯설지만 어디서 본 듯 익숙했다. 하루 만에 잊어버리기에는 뛰어난 미색이었으니 떠올리기는 쉬웠다.

“그 아가씨! 어제 그분이잖아! 너 또 언제 나갔다 왔, 아니, 애초에 이게 어떻게 된……!”

“조용히 말하라니까.”

작은 소리로 타박하며 아킬레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포세이돈의 히마티온은 대강 접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고, 치워 둔 천을 끌어와 해인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는 부디 아킬레우스가 포세이돈에게서 저 여자를 납치해 온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이불을 다 덮어 주고 나서야 태연한 얼굴로 파트로클로스를 돌아보았다. 파트로클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킬레우스, 너……. 대체 뭘 한 거야?”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네가 틀렸어.”

아킬레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파트로클로스의 부족한 신뢰를 이렇게 확인하게 되니 썩 즐겁지는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향하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늦은 건 맞는 것 같으니 우선 나가지. 설명은 밖에서 해 줄게.”

머릿속으로 온갖 상황을 떠올리던 파트로클로스는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열려 있던 문은 두 사람이 나가고서 굳게 닫혔고, 방 안으로는 짧은 소란 속에서도 깨지 못한 해인만이 남았다.

***

해인이 눈을 뜬 것은 포세이돈의 예상대로 한낮이 되었을 때였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인지 오히려 머리가 무겁고 잠기운도 잘 가시지 않았다.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쳐다보던 해인은 그것이 낯설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았고,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며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해인은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자 어제 잠들었던 그 신전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눈을 뜬 곳은 신전의 방보다 훨씬 넓고 화려했다.

“……아.”

낯선 풍경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 순간, 머릿속으로 몇몇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잠결에 들은 포세이돈의 목소리였다. 반쯤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들으려고 애썼던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그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해인은 멈칫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 무슨 결혼을 피하신다고…….’

분명 그랬다. 뒤이어 낯선 곳에서 눈을 뜨게 되고, 곁에는 자신이 없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고 말하던 목소리 역시 떠올랐다. 정말로 낯선 장소에서 깨어난 지금의 상황과 그 말을 연결시킨 해인은 겨우 진정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음을 확신한 덕분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된 건가?”

깊이 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해인은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침대 밖 바닥에 발을 내렸다. 일어나서 방 안을 조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내디딘 순간 그녀는 사소한 문제를 하나 깨달았다.

또 신발이 없었다.

어제 신전에서 침대에 누울 때 무의식적으로 신발을 벗었고, 포세이돈도 미처 그것까지 챙기지는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옷은 어제 입었던 이 시대의 옷 그대로였다. 침대 머리맡에는 포세이돈이 주었던 히마티온도 몇 번 접혀서 놓여 있었다. 신발의 부재는 이미 한번 경험해본 만큼, 해인은 빠르게 포기했다.

“어쩔 수 없지.”

보온 기능을 떠나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의 안정을 주는 히마티온을 펼쳐 담요처럼 어깨에 두르며, 해인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나 감사하기로 했다.

일어나서 한 바퀴 둘러본 방 안은 역사적 관점에서는 신기했지만 그뿐이었다. 막 일어난 참이었으므로 해인은 거울을 찾아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어딘가에 있기는 하겠지만 예상컨대 현대와는 많이 다른 청동 거울일 것이다. 해인은 창가로 걸어가며 엉킨 머리카락을 대강 풀어내고 손으로 빗어 내렸다.

최소한의 단장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자 지난밤 말 등에 실려 오며 스치듯 봤던 무너지고 불탄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밝은 빛 아래서 훨씬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건물 사이사이로 바쁘게 지나다니는 병사들이 보여 모순적이게도 좀 더 활기차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바깥을 지켜보던 해인은 창가에서 물러나며 어깨에 두른 히마티온을 추슬렀다. 창가에서 몸을 반대로 돌리면 바로 보이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가 봐도 되나…….”

포세이돈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낯선 곳에서 깨어나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한동안 있으면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서 무엇이든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지금 당장은 안전하게 느껴지는 방 안에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고민하던 해인은 머뭇거리며 문으로 다가가 조용히 숨죽이고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이 건물 안에는 사람이 전혀 없는 걸까.’

망설이며 문에 손을 댄 해인은 천천히 문을 밀었다.

햇빛이 드는 방 안의 창가에 서 있을 때는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복도는 햇빛이 들 만한 창문이 없어서인지 꽤 서늘했다.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살펴본 해인은 인기척도, 사람의 그림자도 전혀 없음을 확인했다. 오히려 그 점이 약간의 안심을 불러왔다. 해인은 완전히 복도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복도 역시 방 안과 마찬가지로 어젯밤 보았던 신전보다 화려했다.

복도 가장자리를 장식한 조각상들을 구경하며 해인은 복도를 쭉 따라 걸어갔다. 집중하지 않으면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떠드는 소리가 저 멀리 어디선가 아득히 들려왔다. 아마도 건물 바깥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병사들의 목소리인 듯했다.

얼마쯤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 이번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복도가 나왔다. 햇빛이 길게 선을 그리며 창문의 맞은편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앞으로 향하자, 직전까지의 서늘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해인은 창문턱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깥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괜스레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해인은, 아예 창문턱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다리까지 올려 창문턱 위로 걸터앉았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

펼쳐진 풍경을 보며 익숙함의 이유를 생각하던 해인은 이내 그곳이 어젯밤 포세이돈이 전차를 세웠던 장소임을 알아차렸다. 건물 앞의 평지 너머로 보이는 계단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밤 말을 타고 올 때, 더 이상은 도저히 눈 뜨고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저 계단인 듯했다.

바깥의 풍경에 집중하느라 해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창문에 걸터앉아 몸의 반쯤은 이미 창밖으로 나와 있어서, 남들이 보기에는 저러다 자칫 잘못하면 떨어지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아킬레우스도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다.

불과 몇 분 전, 아킬레우스는 해인이 깨어났는지를 잠시 확인하러 왔다가 열려 있는 문과 있어야 할 사람의 부재를 확인했다. 예상 못 한 상황에 그는 곧장 뒤돌아 복도로 나와서 사라진 이를 찾아 나선 참이었다.

그러나 발견은 금방이었다.

‘도망이라도 친 줄 알았더니.’

사람을 놀라게 한 것치고는 멀리 가지도 않았다. 무사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반, 겁도 없이 창문에 걸터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어이없음 반으로 그는 헛웃음 지었다.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해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러다 떨어지겠어.”

발걸음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던 해인이 눈을 크게 뜨며 손이 얹어진 어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시야 속으로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아래의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해인은 자신이 정작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려와, 다칠지도 모르니까.”

눈앞에 있는 기원전의 반신, 아킬레우스.

귀환에 있어 가장 큰 조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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