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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2)화 (13/149)

chap.3 팀블레

날이 밝았을 때 포세이돈은 다시 그의 신전으로 걸음 했다.

지난밤 그랬듯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에게 언질 한번 하지 않은 조용한 방문이었다. 곧장 신전의 내실로 향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뒤,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포세이돈의 기척에도 해인은 깨어날 기색 없이 깊게 잠들어 있었다.

포세이돈은 침대 맡에 앉아 자식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잠든 얼굴을 보니 정말 그 자신과는 새삼스럽게도 닮지 않았다. 그가 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해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더라면 해인이 그의 자식임을 금방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포세이돈은 본 적도 없는 해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넘겨주었다. 그래도 머리카락의 색과, 지금은 눈꺼풀 뒤로 숨겨져 있는 눈동자의 색은 그와 완벽히 같았다. 시간을 들여 찬찬히 뜯어보면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제외하고 포세이돈과 닮은 곳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크로노스가 말한 운명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해인이 원래 시대로 돌아갈 때까지 옆에 끼고 보호하며 귀여워했을 테니, 겉으로 닮은 곳 말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의 신은 해인이 무사히 원래 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인 포세이돈의 곁이 아니라 웬 사내놈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납득하기 싫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해인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

혀를 차며 포세이돈은 미리 챙겨 왔던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잠의 신 히프노스로부터 받아 온 ‘수면’이었다. 포세이돈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꺼내 들어 해인의 얼굴 근처로 내려놓았다. 이미 잠들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더 깊이 잠들도록 만들어 한동안은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 목적이었다.

“그래도 낮쯤에는 깨어나겠지…….”

작게 중얼거리며 포세이돈은 이불로 해인을 돌돌 말아 감싸고 그 위로 어젯밤 주었던 히마티온까지 덮었다. 순식간에 자식을 천 뭉치처럼 보이게 만든 포세이돈이 그대로 해인을 일으켜 안아 들었다.

기원전, 이 시대에는 평범한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 반신들 대부분이 키가 훌쩍 크고 체격도 좋았다. 인간들의 평균 신장이 작은 탓에 신과 피가 섞인 반신들이 특히 눈에 띄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들의 평균 신장이 늘어나 반신이나 완전한 인간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어진 것과 다른 점이었다.

덕분에 현대에서는 평균보다 약간 큰 정도에 불과한 해인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어지간한 인간 남자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시대이던지 신에 비할 바는 못 되는 것이다. 특히 신들 중에서도 큰 편인 포세이돈 앞에서는 인간 가운데 키가 크다 한들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해인은 키만 컸지 정작 몸은 얇고 가느다란 편이었다. 덕분에 천으로 두껍게 감싸 놨어도 포세이돈이 해인을 들어 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들어 올린 자식이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는 신전 밖으로 나와 전차에 올랐다.

어두운 밤보다는 밝은 아침이 전차를 몰기에 더 적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잠든 자식이 함께 타고 있는 데다 그리 기쁜 마음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속력을 내지도 않았건만 팀블레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직 고도를 낮추지 않은 채, 저 멀리 보이는 숲을 응시하며 포세이돈은 미간을 찌푸렸다. 크로노스가 직접 아킬레우스를 미리 불러내 놓겠다 말했으니, 이제 잠시 후면 그와 다시 조우해야 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아카이아 연합군이 승리하여 트로이를 멸망시켜 버리길 바라는 입장에서 아킬레우스와 같은 명장이 내심 기특했었다. 아킬레우스는 사실상 연합군의 승리를 이끄는 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단순히 큰일에 휘말려 길을 잃은 것뿐이던 그의 자식을 냉큼 주워 가 제 것인 양 하려던 양심 없는 놈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이 다시 착잡해졌다.

‘……정말 안전한 게 맞단 말인가?’

운명이란 놈은 왜 이렇게 늘 제멋대로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한숨과 함께 그는 저 멀리 보이는 공터에 전차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서서히 전차의 고도를 낮춰 몰았다.

이른 아침의 숲답게 새소리가 요란했으나 포세이돈의 전차를 이끄는 말이 가까워지자 곧 조용해졌다. 전차는 이내 완전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떠나가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뒤로하고, 포세이돈은 제일 먼저 자식부터 살폈다. 히프노스로부터 받아 온 수면 덕분인지, 문제없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생겨 놓고 스물하나라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기는 했다. 얼굴의 선이 부드럽고 섬세한 탓에, 아무리 봐도 실제 나이보다는 더 어려 보였다. 천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인지 서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설마 자신의 자식들 중 이렇게 생긴 아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포세이돈은 괜히 그 뺨을 쓰다듬어 본 뒤 다시 천을 헐겁게 덮어 주었다.

때마침 저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토록 이른 시간에, 인적 없는 숲 방향으로 말을 달릴 만한 이는 하나뿐이었다. 누구든 큰 문제가 자신의 일이 되면 부지런해지는 바, 재빠르게 움직인 크로노스가 불러들인 아킬레우스일 것이다. 포세이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차 밖으로 나와서는 팔짱을 끼고 섰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햇살 아래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점차 가까워졌고, 이내 포세이돈을 발견한 듯 제법 먼 거리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선뜻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내를 포세이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생긴 것으로는 흠집 잡기 참 힘든 놈이라니까.’

아버지를 닮은 곳도 있긴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명백히 그의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수많은 신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았던 에게해의 네레이데스(바다의 님프), 티탄 신족의 테티스였다. 포세이돈 역시 한때 테티스에게 열정적으로 구혼했던 신들 중 하나였던 만큼 그녀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의 눈동자 색을 비롯해 전체적인 얼굴 조형이 테티스와 닮았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포세이돈 님.”

가까이 온 아킬레우스가 멈춰 서며 먼저 인사했다. 포세이돈은 상대의 무표정한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며 크로노스가 그에게 얼마만큼의 정보를 주었는지를 짐작해 보았다.

“……부른 이유를 대강 알고 왔군.”

짐작은 쉬웠다. 이렇다 할 표정은 없지만 그 아래로 여유가 있었다. 정확한 이유까지는 모를지라도, 신이 자신에게 해가 될 용건을 가지고 부른 것은 아니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여유일 터였다.

“신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니,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포세이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당당한 태도부터 이 상황까지 모든 것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다.

“좋다, 그렇다면 길게 설명할 것 없겠지. 내가 할 말은 이거다. 아킬레우스, 나와 거래하겠느냐?”

부른 이유가 거래인 것까지는 듣지 못했던 아킬레우스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어떤 거래인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간단하다. 너는 내 자식을 지키고, 나는 그 대가로 너를 지켜 주는 것이다.”

“자식……. 말씀이십니까.”

포세이돈이 인상을 쓰며 답했다.

“그래, 내 자식. 너라면 그게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모르는 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 아킬레우스는 그게 누구인지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고, 모르는 척할 생각도 없었다. 분명 지난밤 만났던 그 여자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꿈속에 나타난 정체 모를 누군가가 포세이돈이 그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부터, 이 부름이 그 여자와 연관이 아주 없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켜 주라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것도 무려 신께서 거래라는 이름마저 걸고 하는 제안이다. 그는 느릿하게 물었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 건 의외의 일이지 않습니까?”

포세이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크로노스가 꼭 아킬레우스여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고려조차 안 했을 것이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아킬레우스는 제일 우선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의외구나. 어제 보니 너는 내 딸이 꽤 마음에 든 눈치던데, 설마 지금 내게 이렇게 돌려 묻는 건가? 너를 믿어서 그런 제안을 하느냐고?”

아킬레우스는 별말 없이 웃었다. 그런 뜻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재차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정색했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널 믿을 리가 있겠느냐.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무슨 사정인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내 딸은 모종의 일로 길을 잃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당장 돌아갈 수 없기에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만 하는데,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자가 말하길 네 곁에 있어야만 아이가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

짧은 설명을 마치고 포세이돈은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푸른 물빛 눈동자가 짙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신은 못마땅하게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은 이걸로 끝이다. 받아들이겠느냐?”

잠깐의 침묵 끝에 아킬레우스가 답했다.

“……예, 어렵지 않은 일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포세이돈은 그 말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너는 늘 전쟁터 한가운데서 머물지 않느냐. 그런데도 이 일이 어렵지 않다고 확신하나?”

“제가 전쟁터에서 지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 거처나 막사는 어지간하면 안전할 겁니다.”

“하, 그러니까 네 처소에서 지내게 하겠다고…….”

포세이돈은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차마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이익을 줄 수도 없는 못마땅한 반신을 바라보며 포세이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지만 이건 거래다. 나는 내 자식을 지켜 달라고 네게 요구했고, 그 대가로 너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호할 것이다. 그러니 내 딸을 감히 밤 시중을 드는 노예 같은 걸로 취급한다면, 나는 곧장 달려와 너를 반 토막 내 버릴 생각이다. 이해했느냐?”

발화자가 신인 만큼 웬만한 사람이 들으면 더없이 오싹할 말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여상하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포세이돈은 그 태연한 어투에 괜히 기분만 더 이상해졌다.

“……잠들어 있으니 직접 안아 옮겨라.”

이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우선은 옆으로 비켜 주면서도 포세이돈은 쌍심지를 켠 채 아킬레우스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서도 아킬레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전차 곁으로 다가왔다. 전차 안에는 과연 포세이돈의 말처럼 누군가 누워 있는 채였다.

사실 사람보다는 천 뭉치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그는 몸을 숙인 뒤 팔을 뻗어 조심히 상대를 안아 들었다. 천으로 감싼 몸은 깊이 잠든 듯 저항 없이 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킬레우스는 왜 포세이돈이 그에게 이 여자를 직접 안아서 옮기라고 말했는지도 깨달았다.

깨어 있는 이를 데려와 사정을 말하고 손을 건네준다면, 그건 꼭 결혼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처럼 포세이돈과 아킬레우스가 따로 거래를 한 형태라면 결혼식이 될 여지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신경 썼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런 것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지난밤 그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은 그럴 수 없던 사람임은 확실히 알았다. 마음대로 소유하고 말고 할 수 없음도 인지했다. 드물게 마음에 든 참이었으니 그 점은 확실히 아쉬웠고, 동시에 포세이돈의 반응도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었다.

결국 지금은 그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유는 원래 있던 곳으로의 귀환을 위해서라고 하나, 어차피 당장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결국 이 여자는 얼마가 될지 모를 기간 동안 그의 곁에서 지내야 했으니, 그 틈을 타 완벽하게 손에 넣으면 될 일이었다.

“아킬레우스.”

해인을 안아 들고 몇 걸음 물러난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본 포세이돈이 혀를 차며 그를 불렀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 아이는 돌아가야 할 몸이다. 이건 너를 위해 충고하는 것이기도 하니, 잘 기억해 두어라.”

“……그러겠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잠깐의 침묵 끝에 빙그레 웃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표정과 말투 모두 지나치게 그답지 않은 태도였고, 그랬기에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포세이돈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하여튼 사내놈들이란…….’

다른 인간이었더라면 이미 죽었거나 그 비슷한 꼴이 되었을 수준의 건방짐이다. 테티스가 아들을 아끼는 데다, 본인의 능력도 뛰어나고, 거기에 더해 이제는 해인에게도 필요하게 되었으니 차마 어떻게 해 버릴 수 없어 속만 답답해지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지금 저 못 믿을 놈에게 안겨 있는 딸을 다시 뺏어 올까 생각하다 애써 그 충동을 억눌렀다. 부디 해인이 어제 그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 스스로의 앞가림을 잘 해내길 바랄 뿐이었다.

“……후.”

포세이돈은 네 번째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해인에게는 어제 인사를 했고, 아까 전 얼굴도 다시 한번 보았으니 되었다. 전차에 오른 그는 아킬레우스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아마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대로 될 것 같지는 않구나.”

단순히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말이라기엔 상대가 신이었다. 무언가 알고 건네는 말처럼 들렸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포세이돈은 답을 듣지 않고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출발을 재촉했고, 그 기색을 알아챈 아킬레우스는 알아서 뒤로 조금 더 물러섰다. 동시에 포세이돈의 전차가 출발하여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미 아득히 멀어진 포세이돈의 전차를 응시하던 아킬레우스는 마침내 주변이 완벽하게 고요해진 뒤에야 자신이 안고 있는 천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안아 들고 움직인 탓인지 조금 흘러내린 천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꺼풀이 보였다.

지금은 감겨 있더라도, 그는 이 여자의 눈 색이 어땠는지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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