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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1)화 (12/149)

“그래, 착하구나.”

어린아이를 대하듯 칭찬하며 그는 해인에게 손짓했다. 해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자 포세이돈은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먼저 내밀었고, 해인은 의아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대로 몸이 주르륵 끌려갔다.

“앗.”

위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당황스럽기는 했다. 눈 몇 번 깜빡일 찰나가 지나 해인은 아버지의 무릎에 앉혀져 있었다. 만 나이로나 한국식 나이로나 이미 스무 살은 훌쩍 넘은 나이의 자식이 아버지와 취하기에는 조금 난감한 자세였다.

현대의 포세이돈도 그녀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가끔 아쉬워하긴 했어도 이러지 않았다. 해인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애써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왜?”

“저를 무릎에 앉혀 두고 계시기에는 제가 이미 어른이 된 지도 꽤 지났어요. 이건 좀…….”

제법 진심으로 난처해하는 어투에 별생각 없이 어린 자식을 대하듯 하던 포세이돈도 약간 의아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들어 보지도 못했었다.

“몇 살이지?”

“스물한 살이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두 살이 될 거고요.”

“뭐?”

내려가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며 포세이돈은 놀란 낯을 했다. 그가 보기에 해인은 많아 봐야 열여덟 정도였다. 열여섯 내지는 열일곱쯤 되는 소녀의 모습인 아르테미스가 종종 제우스의 무릎에 앉아 이것저것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응석을 부리고는 했으니,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해인을 비슷하게 대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바, 그냥 자신도 자식을 데리고 이렇게 해 보고 싶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앳되게 생겼는데. 기껏해야 열여덟쯤 되었을 줄 알았다.”

“진짜예요……. 스물한 살.”

“음.”

인간에게는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사실 포세이돈에게는 열여덟과 스물하나 정도쯤이야 큰 차이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이미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신이다. 그가 지나온 세월에 비하면 해인은 몇 살이 되어도 언제나 어린 자식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해인의 바람을 슬쩍 모른 척했다. 나이를 알게 되자 떠오른 중대한 사항도 있었기에 말을 돌리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스물하나라면 결혼한 지도 꽤 되었겠군?”

기원전, 이 시대의 여성들은 보통 열다섯이 넘으면 결혼한다. 늦더라도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이 기혼자가 되고는 했다. 곧 스물두 살이 되는 데다, 포세이돈의 딸이며, 생긴 것도 아름다우니 해인이 남편감을 찾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해인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미래의 포세이돈 그 자신이 이 아이를 더없이 아꼈음이 티가 났으니,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에도 분명 관여했을 것이다. 과연 미래의 자신이 이 아이에게 어디의 어떤 놈을 짝지어 주었을지 하는 호기심과, 누군지도 모르는 사위에 대한 근거 없는 불만을 함께 느끼며 포세이돈이 눈썹을 까딱했다.

“네 남편은 어떤 놈이냐? 이름은? 누구의 자식이지?”

뜬금없이 들어온 있지도 않은 남편에 대한 질문에 해인은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조금 이상했다.

‘누구의 자식인지는 왜? 말해 봤자 그게 누군지도 모르시지 않나?’

게다가 아무래도 포세이돈은 해인을 내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억지로 탈출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포기는 빨랐다. 해인은 익숙하게 편한 자세를 찾는 동시에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뭐? 어째서?”

해인의 나이를 들었을 때보다 세 배 정도는 더 놀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해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결혼하기에는 이른 편이니까요. 물론 제 나이에 결혼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보통은 서른 근처에서 많이 하는 편이고…….”

“네 나이가 이른 편이라고? 서른?”

포세이돈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해인도 멈칫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고요함이다. 각자의 의문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부녀 중, 먼저 문제를 깨달은 것은 해인이었다.

“……아, 혹시 여기서는 일찍 결혼하나요?”

문제의 원인을 확인하는 동시에 시대가 아니라 장소처럼 들리도록 단어를 조절해, 예언이 되지 않게 피해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질문에 포세이돈도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아차렸다.

“여기서는 보통 여자들은 열다섯이면 남편감을 알아보지. 네가 있던 곳에서는 아니로구나.”

“네, 열다섯은 너무 일러요.”

“그런가. 그래서 네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건가…….”

결혼하여 가정을 갖는 것은 곧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과도 같다. 책임질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인데, 해인이 있어야 할 시간대에서는 그렇게 될 나이가 뒤로 한참 미루어진 모양이었다. 포세이돈은 대강 납득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있지도 않은 사위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알아서 흩어졌다. 그 대신 어떠한 깨달음이 불현듯 빠르게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포세이돈은 해인의 머리칼을 쓰다듬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깨달음은 그가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에 있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였다.

크로노스와도 이야기를 끝냈듯 내일 그는 미혼의 딸을, 아버지인 자신이 직접 데리고 가서, 다른 남자의 손에 맡겨야 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팀블레에서 보았던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을 때, 그가 포세이돈의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을 듯했으므로 사안은 몹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왜냐면 이것은 약식 결혼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무장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제우스의 손자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아들이자 프티아의 왕자이니 신분도 괜찮았다. 게다가 수많은 신들의 구애를 받았던 그의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생김새도 따를 자 없이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총평을 내렸을 때 그는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세이돈이 흔쾌히 자식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게 당연했다. 남자 측에서 먼저 굽혀서 구혼해 오는 것도 아니고 이쪽에서 먼저 손을 넘겨준다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울컥해서 생각했다.

‘내 자식이 뭐가 부족해서?’

물론 아킬레우스가 드높은 영광을 온몸에 두르고 있음은 알지만, 그렇기에 그는 단명할 운명이었다.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날뛰는 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앳되고 말갛기만 한 얼굴의 자식 곁에 세워 둔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해인은 어차피 이 시대에서 떠날 몸이었으니 결혼 같은 것에 발목이 묶여서도 안 됐다.

포세이돈은 꽤 한참을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 포기한 채 무릎에 앉아 있던 해인이 반쯤 졸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그나마 괜찮게 여겨지는 해결책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해인.”

“네…….”

누가 들어도 잠결에 답하는 목소리였다. 포세이돈은 그제야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애써 눈꺼풀을 들어 올리긴 했지만, 반이나 고작 뜨고 있었다. 자식을 아끼기는 했어도 그들을 품에 안아서 얼러 본 적은 몹시 드문 바다의 신은 잠시 굳었다가, 이내 어색하게 해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 다름이 아니라 내일 말이다.”

직전에 비해 한결 차분하고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네에.”

해인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자다 깨서 머리가 무거웠지만, 무엇인지도 모를 일을 한참 고민하다가 꺼내는 말이었으니 들어야 할 듯했다. 그녀는 애써 정신을 차려 보았다. 해인이 눈을 똑바로 뜨자 포세이돈이 얼른 입을 열었다.

“네가 미혼이면 내가 너를 데리고 그자에게 가서 너를 맡기는 것만으로도 약식 결혼식을 치르는 형태가 되잖느냐?”

“……그런가요?”

“그래, 하지만 그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 내 생각을 좀 해 보았단다.”

해인은 말이 이어지는 틈을 타서 자연스럽게 탈출을 시도했다. 포세이돈도 별말 없이 팔을 풀어 주었기에 비로소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선 해인은 이번에는 그의 무릎이 아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잠은 좀 깼지만 여전히 기분이 멍했다.

“하여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데, 이를 행하려면 네게 미리 당부해야 할 게 있구나.”

“무엇인가요?”

포세이돈은 답하기 이전에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해인도 일으켜 세웠다. 별 저항 없이 딸려 온 자식의 등을 가볍게 밀며 포세이돈은 그녀를 침대 앞으로 데려갔다.

방 한편에는 잠들 때 입을 만한 옷도 있었지만, 포세이돈의 계획을 실현하려면 지금처럼 옷을 어느 정도는 갖춰 입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새 옷일 테니 이대로 입고 자더라도 괜찮을 듯해, 그는 굳이 옷을 갈아입으라고는 권하지 않고 해인이 침대에 눕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 네가 피곤해 보이고, 이미 잠들 시간도 한참 지났으니 지금은 편히 자거라.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 가며 친히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해 본 적이 없는 듯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그래도 해인이 익숙한 미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해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포세이돈이 말을 이었다.

“다음 날 깨어났을 때, 장소가 바뀌어 있고 내가 없더라도 놀랄 것 없음을 기억하면 된단다.”

“……어째서요?”

“너를 외면하여 두고 가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이 아버지를 믿으면 된다. 어느 때고 위험해지면 내게 도움을 청하라는 것 역시 진담이었으니 꼭 새겨 두고.”

해인은 어떻게든 끝까지 말을 듣기는 했으나, 사실 침대에 누운 이후로는 긴장이 풀린 탓에 거의 잠결이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몇 시간을 보냈던 탓에, 해인은 포세이돈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속에 잠기듯이 잠들었다.

포세이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금 머뭇거리며 잠든 이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역시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다정한 동작이었다.

손을 거두고, 그는 마지막으로 해인이 잠든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신전 깊은 곳의 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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