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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세이돈은 해인과 함께 여전히 신전 안쪽 방에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떠날 이유가 없었을 뿐더러, 할 이야기도 남아 있었던 탓이다.
다만 방 안은 고요했다. 크로노스가 줄곧 차분한 태도를 고수하기는 했으나, 그가 가져와 풀어놓았던 용건들이 워낙 중대했던 탓에 부녀 모두 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소강상태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멍하니 눈을 내리뜨고 있던 해인은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까부터 이어지던 고요함을 뒤늦게 자각했다. 해인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보다 먼저 생각을 정리했던 포세이돈이 그 모습을 보고서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해인.”
“네?”
“아킬레우스에 대해서는 좀 아는 게 있느냐? 가능한 선에서만 말해 보거라.”
그렇게 묻는 포세이돈은 어딘지 묘한 표정이었다. 해인은 포세이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내키지 않아 하는 감정이 반, 그리고 흥미가 반 정도 섞여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은 머릿속에서 피곤을 몰아내며 잠시 생각했다. 몇 분이나마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던 덕분인지, 해도 될 것 같은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골라낼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생겼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만, 크로노스의 말을 떠올려 보면 예언이 되지 않게끔 애매하게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 듯했다. 크로노스도 그런 식으로 조언을 돌려 말하고 갔으니 보장된 사실이었다. 그러니 포세이돈도 가능한 선에서나마 자신이 아직은 모르는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 흥미에 불과하기보다는, 묻는 이유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해인은 생각 끝에 답했다.
“그의 이름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어떤 존재인지도 조금은…….”
해인은 말을 멈췄다. 아킬레우스에 대해 아는 것은 그의 죽음과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만이 사실상 전부인데, 고작 그 정도는 조금 안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이 사실인지도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이다. 잠시 고민하던 해인은 말을 고쳤다.
“아니, 어렴풋이는 알고요.”
“이름을 제외하면 잘 모른다는 뜻이군.”
“네, 사실 그래요.”
빠른 인정에 포세이돈은 잠시 웃었다.
“너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어떻지? 대부분의 이들이 그 녀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음, 아니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보다 더 많이, 자세히 아는 사람들도 있죠.”
신의 딸로 태어났으면서도 신화에 대해서는 제때로 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해인이, 그 무지의 원인을 제공한 과거의 아버지를 보며 덧붙였다.
“관심의 차이라고 할까요.”
딸이 혹시나 자신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과거를 들춰 볼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미래를 모르는 신은 수염을 쓸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관심이라, 그런가…….”
그는 잠깐의 침묵 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이름을 남긴 것은 사실이니, 놀랍다고 할 만하구나. 물론 지금의 인간들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난 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기는 한데…….”
말끝을 흐리던 포세이돈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직전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쯤 되자 해인도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뭐, 좋다.”
포세이돈은 불과 몇 시간 전 팀블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채 아킬레우스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던 해인, 그런 딸을 지체 없이 전차에 오르게 했던 자신,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킬레우스의 표정…….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지막 요소가 문제가 될 것 같았지만, 정작 이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크로노스는 그자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고 말했다. 포세이돈으로서는 그 안전의 기준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해인, 아까 전 내가 너를 데리러 갔을 때, 네 곁에 있던 사내를 기억하느냐?”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말씀이시죠?”
해인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질문에 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긴 한데요…….”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숲 한가운데서 눈을 뜬 이후 가장 처음 만났던 이 시대의 사람이었고, 심지어 현실감 없게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현대에서도 그만큼 균형적으로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진지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달빛을 받아 빛나던 금색 머리칼과 물빛 눈동자가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 정도로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해인은 그 순간 불현듯 이 대화의 행간을 읽어 냈다.
직전까지 그들은 아킬레우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포세이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였으니, 이 시대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포세이돈이 해인에게 아까 전 그 사내의 얼굴이 기억 나냐고 질문한다면, 맥락을 따져 도출될 결과는 하나뿐이다.
“……그 사람이 아킬레우스인가요?”
질문하면서도 해인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이 흐뭇한 동시에 허탈한 듯 미소 지었다.
“영리하군. 눈치도 좋고. 빠르게 알아채는구나.”
확답이 떨어졌다. 듣고 난 직후에는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잠시 뒤 떠오른 생각에 해인은 약간 심란해졌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이곳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그는 해인을 데려가려고 했고 짧게나마 함께 있는 동안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옷도 걸쳐 주었으니 아마도 도와주려고 했던 것일 터다.
그러나 포세이돈이 해인을 데리러 왔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상대로부터 등을 돌렸다.
물론 그게 당연한 선택이기는 했다. 이름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남자와 낯선 것은 마찬가지더라도 자식을 알아보는 생물학적 아버지, 둘 중 고르라면 그 누구라도 후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내일부터 이 시간대를 떠날 때까지 함께 있어야 하는 이는 결국 아킬레우스였다.
“음…….”
해인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 얼굴로 침음했다. 포세이돈이 틈 없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게, 다른 건 아니고 그저 신경이 조금 쓰여서요.”
“무엇이?”
“도와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본의 아니게 무례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포세이돈은 침묵하며 해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끝없이 평화롭기만 한 발언에 기가 막힌 탓이었다.
그는 방금까지도 과연 아킬레우스가 진정 해인에게 있어 안전한 존재일지를 고민했건만, 당사자는 못다 한 감사 인사와 무례함 따위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말도 안 통했으면서 도와주려고 한 것일지는 왜 확신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쁜 사람이 맞으면 어쩌겠느냐? 그자만큼 성격이 나쁜 녀석도 드물 텐데.”
해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머릿속으로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헤어졌을 때까지의 짧은 순간을 떠올렸다.
‘……그렇게 나빴나?’
옷을 걸쳐 준 것은 해인의 옷이 얇았으니 호의였을 것이고, 그 외에 강제가 있었던 것은 숲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녀의 발로 걷지 못했던 것이 전부였다. 숲을 나와서는 다시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 후로는 선택지를 주겠다는 듯 손을 내민 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손을 잡았던 건, 다소 충동에 떠밀리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기원전이다. 여성의 인권 같은 개념이 확립되기에는 한참 먼 시대인 것이다.
그 점까지 전부 떠올려 보았을 때 이만하면 오히려 아주 친절한 편에 속할 듯했다.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안심하는 것은 물론 안 될 일임을 알지만, 직접 겪어 본 인상이 쉽게 사라질 수는 없었다. 심지어 크로노스마저 안전하다고 이야기하고 간 참이었다. 걱정을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어도, 그것이 포세이돈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해인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더라도 크로노스 님이 안전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분이 이 일을 제일 잘 아실 테니까……. 제가 별일 없이 제 시대로 돌아가야만 그분께서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러니 없는 말을 하시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그의 성격이 어떻든 제게 위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 튀어나온 건 크로노스의 이름만을 내세우는 핑계였다. 포세이돈은 이마를 짚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해인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크로노스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해인처럼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 거기까지 생각한 포세이돈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 네가 영리하니 스스로 앞가림 정도야 충분히 할 수도……. 있겠지.”
포세이돈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해인과 시선을 맞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머리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그의 기준으로는 해인이 순진한 면이 있다고밖에 설명이 안 됐다. 물론 이렇게 자라기까지는 미래의 그도 적잖게 영향을 주었을 테니 할 말이 없기는 했어도, 저 태연한 얼굴을 보면 절로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해인은 제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자신을 지킬 무기 하나 없는 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다. 괴물의 모습으로 태어난 자식들은 물론 안타깝지만, 동시에 괜한 놈들에게 핍박받지만 않으면 알아서 잘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만난 이 딸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 믿음이라는 게 생겨나지 않았다. 그는 심각하게 덧붙여 조언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아버지의 말은 새겨들어라. 너는 무사히 돌아가야 할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에.”
“그리고 만약 그자가 네게 원치 않는 일을 강제하려 하거든……. 아까 했던 것처럼 저어 말고 빠르게 내게 도와 달라 청해라.”
“네, 꼭 그럴게요. 너무 염려 마세요.”
해인은 빙긋 웃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버지는 미래의 아버지보다도 걱정이 많았다. 사정이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눈앞의 포세이돈과 만나게 된 지는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뭐, 시대와 상황이 가진 위험성의 차이겠지.’
그의 반응을 알아서 이해하며 해인은 익숙하게 포세이돈의 걱정을 달랬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돌아온 대답에 포세이돈은 그제야 조금 흡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