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당할 가능성도 있음은 생각지도 않는 듯, 아주 당당한 요청이었다. 포세이돈은 딸의 이 신뢰 가득한 태도 역시 그녀가 있던 시간대의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고는, 그냥 웃어 버렸다.
말을 들은 그 순간 괘씸하게 여겨지지 않은 부분에서 사실상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자식이 원한다는데 해 주어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포세이돈이 크로노스를 돌아보았다.
“그와의 거래를 위한 대가로 무엇이 적당하겠습니까? 이 정도는 조언해 줄 수 있겠지요.”
성격이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포세이돈이었으나, 자식의 앞에서는 맑은 날의 잔잔한 바다와도 같음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된 크로노스가 빙긋 웃었다. 다른 건 아니고 그저 피곤한 일을 덜게 되어 내심 기쁜 탓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포세이돈 님께서 그를 수호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면 적절할 듯합니다.”
그 제안을 듣자마자 포세이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전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살펴보며 보냈다. 게다가 이제는 그의 힘없는 자식까지 그곳에 있게 될 테니 신경을 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반신 하나를 조금 더 주의 깊게 보다가, 위험할 때 도와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 연합군의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자였다. 거기에다 이제는 알 수 없는 운명에 엮여 해인의 근처에 있기까지 할 것이다. 계산을 끝낸 그가 흔쾌히 수락했다.
“뭐, 그 정도는 어렵지도 않겠군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다만 그 거래를 지금 당장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창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완전한 어둠으로 하늘이 물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크로노스도 동의했다.
“예, 지금은 밤이 깊었지요. 날이 밝으면 그때 팀블레로 향해 아킬레우스를 찾으시면 됩니다. 제가 그를 미리 불러 놓겠습니다.”
“좋습니다.”
포세이돈의 답을 끝으로 대화가 마무리됐다.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당사자와 그의 보호자에게 무사히 설명을 끝내고 동의를 얻어 낸 크로노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알려 줄 것과, 몇 가지 당부할 것을 정리하는 찰나였다.
[……저, 크로노스 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되짚다가 불현듯 문제가 떠오른 해인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여기로 오기 전 아버지와 있을 때, 아버지께 제 상황을 설명하다 트로이의 운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예언 능력이 없으니……. 미래를 마음대로 발설해 버린 격인데, 괜찮을까요?]
그 말에 포세이돈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전차 바닥에 앉아 트로이가 멸망했느냐고 물었던 딸의 목소리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 반응에 크로노스가 심각하게 물었다.
“늦은 밤이니 그가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무어라 말했지?”
[그곳이 멸망했느냐고 질문을 했었어요.]
“정확한 이름을 언급했나?”
[네…….]
크로노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 말의 예언 여부를 따져 보았다. 듣기에는 심각했으나 해석하기에 따라 피해 갈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었다. 빛이 세상을 채울 때는 아닌 것이다.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예언이라고 말할 만큼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군. 질문이 아니었더라면 빠져나갈 길 없이 예언이었겠으나, 그런 물음이라면 미래를 모르고 전쟁 상황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평범한 이가 꺼낼 만한 말이기도 하니…….”
“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지? 아폴론이 무어라 하거든 날 부르면 될 일 아니냐.”
포세이돈이 끼어들어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부르는 걸로 다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포세이돈이 아폴론보다 상위의 신인 것은 맞으나, 이것은 예언의 영역과 관련된 문제였다. 무작정 지위로 찍어 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로노스는 눈을 굴려 그를 힐끗 본 후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
“……그렇더라도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그편이 네게 좋을 것이다. 포세이돈 님께서도 부디 들은 것을 혼자만 알고 계셨으면 하고요.”
[네.]
“물론 그럴 겁니다.”
안심하며 답하고, 해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런 면에서는 어차피 트로이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잘 알았다가는 이번처럼 무의식중에 또 다른 미래의 일을 발설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수습이 힘들 만큼의 큰일은 아니었음을 다행히 여긴 크로노스가 차분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앞서 말했듯이 내게도 예언 능력은 없어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해인, 네가 할 일에 대해 말해 주어야겠군.”
그는 손을 뻗어 해인의 이마를 짚었다가, 이내 손을 떼어 냈다.
“할 일이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무기를 쥐고 전선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후방에서 전사들을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 할 일을 찾아 돌아다닐 필요도 없지. 그저 닥쳐오는 모든 상황을 진심으로 마주하렴. 꿈결처럼 느껴지더라도 엄연한 현실, 충실하게 헤쳐 나가면 어느 순간 네 운명의 원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마를 건드렸다가 멀어지는, 마치 대리석 같은 손끝을 시선으로 좇던 해인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 일을 말해 준다더니, 이것도 저것도 할 필요 없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 말은 심지어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까지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상태를 꿰뚫고 있기도 했다.
이곳으로 오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해인은 거의 대부분 현실감을 잃은 채로 표류하듯 존재했다. 그녀에게는 그저 신화 속 인물로만 여겨지는 이와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보면, 지금도 그런 비현실감 속에서 떠다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겠습니다…….”
머뭇거리며 답하던 해인이 멈칫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언어가 한국어가 아니었다.
“아, 말이……?”
“시간 속 흔치 않은 일에 엮인 네게 주는 내 선물이다.”
크로노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또한 네 몸의 시간을 이곳으로 오기 직전의 때에 고정했다. 네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 몸의 시간도 그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니, 변화가 생겨도 반나절 정도가 흐르면 고정된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갈 거란다.”
그 말에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크로노스의 말속에 들어 있는 정보를 알아들은 덕분이었다.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를 위해 몸의 시간을 고정해 둔다는 건, 해인이 귀환 조건을 완성한다면 이곳으로 이동당한 바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기원전의 땅으로 온 이후부터 줄곧 미래의 포세이돈을 걱정하고 있던 해인에게는 빛과 같은 언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나치게 함부로 몸을 던지지는 말거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예를 들어 반나절 동안 살아 있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입으면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눈을 반짝인 해인에게 크로노스가 당부하듯 덧붙였다. 살아 있지 못할 부상이라는 소리에 포세이돈의 눈이 잠시 사나워졌지만, 필요 없는 일에 과하게 나서지 말라는 조언으로 이해했기에 그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조언을 들은 해인은 이 순간 기묘한 신뢰감을 느꼈다. 그건 크로노스가 그녀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에서 비롯된 감정이었고, 동시에 논리적으로 얻은 확신이었다.
생각해 보면 언어가 통하게 된 것 역시 대단히 유용한 선물이다. 그러잖아도 아는 것 없는 이 시대에서, 남들과 말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 크로노스는 해인이 혹시나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로 방법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해인이 무사히 현대로 돌아가면 그가 관장하는 시간의 균열 역시 자연스레 메워질 테니, 크로노스는 해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크로노스 님.”
“그래, 그럼 이제 할 말은 모두 끝났군.”
해인의 인사를 듣고서 크로노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포세이돈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친히 맞이해 주어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포세이돈 역시 일어나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자식의 일이면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니, 여기까지 방문해 앞으로의 일을 설명해 준 그대에게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겠지요.”
“제 일이기도 하였으니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웃으며 말을 맺은 크로노스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인,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부디 잘 지내거라. 나 역시 종종 너를 살펴보마.”
인사와 함께 포세이돈과는 가볍게 눈짓을 주고받고, 해인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준 뒤 크로노스는 비로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
크로노스는 어두운 복도를 몇 걸음 걸으며 생각했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더라도, 사실 그는 아폴론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아폴론의 예언이 반드시 일어날 운명을 읽어 내는 것이라면, 크로노스가 보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불분명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확언할 수 없었다. 사소한 것마다 수많은 갈래가 있는 탓이다.
사실 해인을 숲에 떨어트린 건 크로노스가 한 일이었다. 아킬레우스를 숲까지 오게 만든 빛도 크로노스가 만들어 냈다. 시간의 균열을 보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그가 바랐던 것은, 숲으로 온 아킬레우스가 해인을 찾아내어 데려간 이후 그들이 쭉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깨어난 해인은 낯선 장소임을 알아차리자 바로 포세이돈을 부르는 것을 선택했다. 이어서 자식의 부름을 들은 포세이돈은 그 목소리가 낯섦에도 불구하고 팀블레까지 친히 행차하기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크로노스의 바람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고 말았다.
하지만 원래 그런 법이다.
그렇기에 끝이 정해져 있는,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따로 ‘운명’이라 칭하는 것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오게 된 해인의 경우도 그러했다. 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그녀의 선택에 따라 사소하게, 혹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해인이 미래에서부터 이곳 과거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정해진 것과 같았다. 해인은 수많은 갈림길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거듭한 끝에, 결국에는 운명에 닿을 것이다.
“재밌는 일이지……. 그러고 보면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로군.”
홀로 웃으며 작게 중얼거린 크로노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