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는 포세이돈의 다소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흠…….”
그는 다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야 설명을 시작했다.
“예, 우선 이것부터 말하는 게 낫겠군요. 함께해야 할 사람에 대해서입니다.”
해인이 의문을 제기했다.
[크로노스 님, 함께해야 한다는 건 일회적인 만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잘 말했구나. 네 짐작이 정확하단다. 그가 있는 장소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
크로노스는 반가운 듯 수긍했다. 하지만 해인은 특정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에 어쩔 도리 없이 불길함을 느꼈다.
‘……기원전에 여자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물론 하려면 무슨 일이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시대가 여성들에게는 편안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래, 지금 아카이아 연합군에서 장군의 지위에 있고.”
이번에 표정이 변한 건 포세이돈이었다. 아카이아 연합군과 같은 단어 자체가 낯설어 이해가 다소 느린 해인에 비해, 포세이돈은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몇몇 인간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카이아 연합군?”
포세이돈의 물음에 크로노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크로노스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예, 또한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무위를 가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자이기도 하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포세이돈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몇몇 인간들 중 단 한 명을 아주 간단히 추려 내고 말았다.
“뭐?”
그는 미간을 좁히며 저도 모르게 무례한 어조로 되물었다. 해인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별달리 당황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말한 놈이 설마…….”
“예, 뭐, 한 명뿐이지요.”
포세이돈은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되짚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도와 달라 청하는 딸의 목소리를 쫓아 도착한 장소에서 만난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금빛 머리칼과 푸른 물빛의 눈동자를 가진 젊은 반신.
프티아의 왕자,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포세이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해인은 그 단어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고, 잠깐의 고민 끝에 알아들었다.
아킬레우스, 그건 분명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반신의 이름이었다. 그는 신화에 관심이 없는 먼 미래의 사람들도 이름을 알 만큼 유명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에 관한 이야기가 워낙 널리 알려진 탓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테티스 여신은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에게 자신과 같은 불사를 주고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스틱스 강물에 담근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잡고 담근 탓에 그 부분만이 물에 닿지 않았고 이는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약점,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어, 발뒤꿈치의 근육을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후일담까지가 해인이 아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아까처럼 실제와 동일할까?’
의문이 떠올랐지만, 해인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살짝 눈을 굴려 포세이돈의 눈치를 살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이를테면 일종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해인이 이런 일을 겪을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도 이 일에 휩쓸린 것과 비슷하지요.”
운명이라는 단어에 포세이돈이 침음했다.
운명이란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흐름이다. 필연성을 관장하는 여신을 누이로 둔 크로노스가 하는 말이었기에 무어라 덧붙일 말도 없었다. 머리를 짚으며 포세이돈은 해인을 돌아보았다. 해인은 대화를 따라가며 상황을 파악하다가 자신을 보는 포세이돈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식의 얼굴을 본 아버지는 별수 없이 예민해졌다.
“……함께해야 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분명 그대가 말했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시간 선이 어긋났으니 돌아가야만 한다고.”
날 선 목소리에 크로노스는 난처하게 웃었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임을 알기에 불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 곤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어 그대로입니다. 어떠한 관계가 되기 위해 애쓰지는 않아도 됩니다.”
그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답했다. 안심시키려는 어조였다. 그러나 그 말투는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포세이돈은 직전에 비해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놈은 전쟁터에 있는데, 전쟁터에서 장군과 함께하는 여자는 밤 시중을 드는 노예뿐인 것을 당연히 알고 하시는 말씀이겠지요. 그 누구도 내 딸을 감히 그렇게 취급할 수는 없음은 아실지 모르겠군요.”
크로노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자각했다. 그는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해인을 곁눈질로 돌아보았다. 해인은 현대인의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단어에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음…….”
모든 시간대를 볼 수 있기에, 시간의 신은 해인의 반응을 이해했다. 기원후 이십일 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렇지만 크로노스도 실제로 밤 시중 노예 따위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습을 시작했다.
“귀한 아이를 그런……. 모욕적인 상황 속에 밀어 넣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와 거래를 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 드리고 싶군요. 사실 그 때문에 포세이돈 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거래?”
그제야 조금 진정한 기색을 한 포세이돈이 되물었다. 크로노스는 천천히 답했다.
“예, 그에게 어떠한 대가를 주고 해인을 지켜 달라 요구하면 어떻습니까? 대가를 받았으니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전쟁터일지라도 그리스 최고의 무위를 가진 장군이니 그가 보호한다면 어느 정도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해인은 이제껏 조용히 듣기만 했던 대화들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자신은 전쟁터에서 할 일이 있으며, 그것은 아킬레우스라는 유명한 이야기 속 이름의 주인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형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국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 거네.’
예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구구절절 길게 늘여 말했기에 요약하기도 어려웠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온 것과 같았다. 귀환을 위한 조건에 바탕이 되는 장소와 인물이 나왔으나, 그 두 가지 모두 가볍지 않은 무게였다. 해인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나머지 그만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타인의 일을 바라보듯 정리했다.
그 가운데 포세이돈이 침묵을 가르고 물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예?”
“진정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지 물은 겁니다. 전쟁터에서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가 내 아이를 완벽히 지켜 내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 살아오며 날붙이 따위를 본 적도 없을 아이가 전쟁터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견 해인을 무시하는 것 같았지만 악의가 없을뿐더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건 해인이 은연중 느끼던 의문점과 동일하기도 했다.
해인은 반신답게 신체 능력이 나름대로 뛰어나긴 했지만 살면서 무기를 만져 본 적은 없었고, 머리가 좋았지만 군사학 같은 것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비록 반세기 넘게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 국적을 두고 있긴 하나, 그렇더라도 해인은 전쟁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 과거에 대한 지식조차 다소 부족했다. 해인이 아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는 전쟁의 승패, 각각의 신들이 어느 쪽을 편들었는지, 그리고 주요 인물 몇 명의 이름까지가 전부였다.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음, 그건…….”
크로노스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려면 예언의 영역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는 입 밖으로 낼 수 없겠습니다. 다만 다칠 일은……. 해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 분명한 것은, 결국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겁니다.”
그 말에 어쩔 수 없음을 느끼면서도, 포세이돈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어 몇 마디 더 물고 늘어지려 했다. 그러나 미처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해인이 포세이돈의 팔을 잡아 온 탓이었다.
[저, 아버지.]
“……무슨.”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포세이돈은 해인이 먼저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에 한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적어도 이 시대에서는,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감히 인간이 먼저 손을 뻗어 신의 신체에 손을 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과 같았다. 신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이상 그것이 당연했다. 어릴 적부터 포세이돈의 손을 잡거나, 그와 팔짱을 낀 채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쇼핑을 하기까지 했던 해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아버지?]
미래의 자식은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하나다. 미래의 포세이돈, 그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누구도 해인에게 이를 무례라고 가르친 적이 없는 것이다. 포세이돈은 당황을 지나쳐 어이가 없는 나머지 그만 김이 빠졌다.
“너는……. 아니, 아니다. 왜 불렀지?”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지만 해인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여유가 없었다. 그런 건 체력이 남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로, 지금은 그저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게, 방법이 이것밖에 없음이 확실하고, 나서지 않으면 다칠 일도 없다고 하셨으니까……. 저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괜찮다고? 진심이냐? 전쟁터를 가 본 적이 없어서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그럴지도 몰라요. 가 본 적 없는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망설일수록 끝만 늦어질 뿐이고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빠르게 시작해서 얼른 해결해 버리고 싶었다. 해인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저를 도와주세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