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도 없이 그저 여기로 오겠다고만 하시더니, 그 흔하지 않은 일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잠자코 보고 있던 포세이돈이 불쑥 끼어들었다. 크로노스는 그를 보며 느리게 설명했다. 놀라지 말라는 듯 말의 속도가 느렸다.
“다른 시간에 속해 있는 존재가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을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이 아이지요.”
크로노스는 해인을 가리키며 말을 맺었다. 포세이돈과 해인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전차를 타고 오며 했던 이야기가 동시에 떠오른 덕분이었다. 포세이돈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쯤 이탈했지요? 한 삼천 년?”
그에 놀란 것은 크로노스였다. 그는 무척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게다가……. 상당히 정확한 숫자까지 말씀하셨고요.”
“내 딸이 추측한 겁니다. 본인이 미래에서 온 것 같다며, 인간들의 전쟁을 기준점 삼아 얼마나 거슬렀는지도 알아내더군요.”
때에 맞지 않게도 반쯤 자랑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포세이돈의 자식 자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여전히 놀란 낯으로 해인을 돌아보았다. 해인은 긴장과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마주했다. 크로노스는 대번에 칭찬을 꺼내 들었다.
“당황스러웠을 텐데도 그토록 정확히 상황을 파악했다니, 아주 영민하구나.”
[가, 감사합니다.]
“진심이란다. 솔직히 믿기 힘든 일이지 않느냐.”
크로노스는 아주 온화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포세이돈에게 고개를 돌렸다.
“헌데 포세이돈 님께서도 실례지만 의외로군요. 믿기 힘드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지만 아버지 된 자가 자식의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 준단 말입니까?”
그 대답에 크로노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포세이돈 님께서는 늘 자식을 아끼신다고 소문이 자자했지요. 그 말이 사실임을 이렇듯 알게 되는군요. 자식을 아끼시는 마음이 보기 좋습니다. 저 역시 설명을 좀 덜 수 있어서 기쁘고요. 모두 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뒤이어 그는 잠시 침묵하며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는 것 같은 기색에 해인은 바짝 집중했다.
“그래……. 해인. 알고 있겠지만, 시간은 늘 한 방향으로 흐른단다. 그리고 그것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지. 내 누이인 아난케는 불변의 필연성을 관장하니, 나와 그녀가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단다.”
포세이돈의 전차를 타고 올 때, 포세이돈도 크로노스를 설명하며 아난케라는 이름을 꺼냈었다. 해인은 비로소 그 이름이 뜻하는 의미를 알고는 속으로 납득했다. 불변의 필연이라면 과연 크로노스의 말대로 시간과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데 지금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시간 선에 오류가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지. 그것도 꽤 큰 오류가 말이야.”
“그렇다면 그토록 큰 문제가 하필 저 아이에게 벌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뭔가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포세이돈은 잠자코 있다가 또 아까처럼 불쑥 끼어들어 질문을 꺼냈다. 하지만 해인이 잘못한 것이냐고 묻는 어조에는 이미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이 가득 묻어 있는 채였다. 크로노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의 확신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큰 문제이고 정말 흔치 않을 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니까요. 운이 좋았다고 할지, 나빴다고 할지, 아니면 둘 다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해인은 표정을 관리하며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한숨과 함께 속으로 애써 삼켰다.
‘모르긴. 그냥 운 나쁜 일이지…….’
해인의 입장에서는 자는 중 뜬금없이 날벼락을 맞은 상황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살아오며 늘 스스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어쨌든, 시간에 문제가 생겼으면 고치는 게 내 일이지.”
크로노스가 다시 해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당연히 고칠 수도 있단다. 이 경우에는 네가 원래 속해 있던 너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게 제대로 된 해결책이겠구나, 그렇지?”
[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아니란다.”
[네?]
해인은 눈을 크게 뜨며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옷자락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건 미래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이 옷을 찢으면, 이후 헬리오스가 태양 마차를 몰고 갈 때쯤에는 이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해인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불길해졌다.
[그럼 제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미래에 영향을 주겠군요.]
“역시 영리하구나! 작은 단서만 듣고도 다 알아차리는군.”
칭찬을 들어도 기쁘지 않은 것 역시 처음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미래에서 여기로 오게 된 것이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단다.”
[그게 무슨…….]
“네가 이곳에서 어떠한 일을 했기 때문에, 미래의 네가 네 기준으로 과거인 이때로 오게 된 것이지. 알겠느냐? 원을 그렸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구나.”
그 말을 몇 번 곱씹고서야 해인은 뜻을 반쯤 이해했다. 그 직후 든 것은 누구나 할 법한 어쩔 수 없는 걱정이었다.
[크로노스 님, 그럼 그건 제가 시간 속에 갇혔다는 뜻이 되지 않나요? 이곳에서 제가 한 일 때문에 미래의 제가 여기로 왔다면, 그 일이 계속 반복되어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꺼낸 질문에, 크로노스는 걱정 말라는 듯 곧장 부정했다.
“아니, 네가 여기서 다시 미래로 돌아간다면 원이 완성되어 벗어날 수 있단다.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것은 원을 반쯤 그린 것과 같지. 또한 네게 벌어진 일은 벌어진 결과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구나.”
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단번에 알아들을 만큼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조금씩 이해가 됐다.
정리하자면 크나큰 문제인 것은 맞지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런 만큼 해결 방법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운이 좀 나빴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한 다음, 미래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무사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긴장 탓에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가 내려앉았다. 해인은 너무 꽉 쥐었던 탓에 저릿한 손에서 힘을 빼며 안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 돌아갈 수 있죠?]
“음……. 안타깝게도 여기서 문제가 조금 있는데.”
잘 해결될 것만 같던 일 끝에 갑작스레 초를 치는 발언이었다. 해인은 물론이고, 그녀의 뒤에서 보호자답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포세이돈마저 의아한 낯을 했다.
“그러니까……. 포세이돈 님께서는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만, 원래 신들은 각자가 관장하는 것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법이잖습니까?”
포세이돈은 이 상황에 그런 말이 왜 나오느냐는 표정을 했지만, 일단은 순순히 답했다. 크로노스의 말이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건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는 이는 지금껏 몇 없었지만, 사실 저는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시간을 관장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까지는 허락되지 않아서……. 제가 여기서 해인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려 주게 되면 예언의 권역을 침범하게 되어 버립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크로노스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해인을 돌아보았다. 해인은 아연한 얼굴을 한 채 시간의 신을 보고 있었다.
“아, 그런 것이라면 물론 저 역시 이해합니다.”
그때 포세이돈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해인과 크로노스가 그를 돌아보자, 포세이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른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은 암묵적인 규칙으로 금지되어 있음이 분명함을 압니다. 그러니……. 아폴론의 숙부인 제가 그를 여기로 붙잡아 온 뒤 정중하게 부탁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데려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붙잡아 오겠다고 했다. 게다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는 기색을 보면 그 방식이 정말로 정중하지는 않을 듯했다. 저 발언은 그를 납치해서 협박해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아폴론을 말이다. 크로노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해인의 미래를 볼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예언을 할 수 없듯 그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는데, 아이의 시간 선은 이곳과 다르니까요. 소용없는 일이니 부디 조카를 괴롭히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런…….”
포세이돈이 혀를 찼다. 물론 딸을 위하는 마음이 첫 번째이긴 했지만, 내면 깊숙이 들어가면 트로이의 편을 드는 아폴론이 못마땅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로노스는 다시 해인에게 눈을 돌리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그렇더라도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란다. 예언이 아닌 선에서 이야기하면 될 테니까. 직관적이지는 않겠지만 여기 온 이후 내가 본 너는 아주 총명한 아이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해인은 점점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긴장했다가,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긴장했다가, 이제는 귀환 방법까지 고민해야 한다니 갈수록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흘려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건 그녀 자신의 문제였다.
[……말씀해 주시면 숙고해서 행동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었다. 해인은 조금 해탈한 기분이 되었다.
“아, 그리고 이는 포세이돈 님께서도 조금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시간대의 장소와 사람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것은 포세이돈 님이실 테니까요.”
“좋습니다.”
포세이돈의 동의까지 받아 낸 크로노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부녀를 한눈에 담았다.
“예. 우선 방금 말했듯, 장소와 사람이 문제입니다. 해인은 이 신전에서 줄곧 있으면 안 되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포세이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신전과 내 사제만큼 안전한 것도 없을 텐데 말이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렇군요.”
유감스럽다는 말과는 달리 크로노스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해인은 그것이 한낱 인간의 곤란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고대의 신다운 면모인지, 아니면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앞으로 있을 일이 별다르게 유감스럽지 않을 만큼 안전해서인지 궁금해졌다. 포세이돈은 자신의 곁에 앉은 딸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약간 불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들어나 봅시다. 내 딸이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해야, 무사히 돌아가 미래의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