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2 필연
해인은 두르고 있던 히마티온을 추스르며 조심스럽게 전차에서 내려왔다. 발을 내딛는 곳마다 잔디가 가지런히 자라나 있었다. 불현듯 거센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 포세이돈은 친히 손을 뻗어 자신과 똑같은 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당분간 신전에서 지내거라. 지금쯤이면 이곳의 사제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을 테니, 씻고 옷도 갈아입으렴. 그동안 내가 크로노스에게 연락을 넣어 보마.”
[네, 감사합니다…….]
해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답했다. 포세이돈은 자식의 어깨를 신전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그 힘에 의해 해인이 어색하게 몇 걸음 떼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전차와 포세이돈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어?]
작은 흔적조차 없었다.
해인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절벽 위에 남은 것은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신전과 그녀뿐이었다. 해인은 잠시 가만히 선 채로 멈춰 있었다. 포세이돈과 대화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비현실감이 문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상황이 깨진 건, 닫혀 있던 신전의 문이 열리고 나서였다.
“거기 계신 분, 이리 오세요.”
해인은 갑작스레 들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포세이돈과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가 가능했기에, 그새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생경했다.
“손님이 올 거란 포세이돈 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을 잇는 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신전에서 나온 만큼 높은 확률로 사제의 지위를 갖고 있을 그녀는, 해인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손수 걸음을 옮겨 해인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해인의 코 근처까지 겨우 닿을 만큼 크지 않은 체구였고,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님?”
[저희 말이 안 통해요.]
해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상대는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말이…….”
자신을 멀뚱히 보는 해인을 보며 사제는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에 닿는 체온이 따스했다. 그 체온에 발목까지 차오른 것 같던 비현실감이 한순간 흩어졌다. 그저 기분 탓이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무심코 마음이 놓인 해인은 사제에게 이끌려 함께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커다란 신상과 그 앞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화롯불이었다.
사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해인은 신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현대까지 남아 있는 신전과는 여러모로 다른 것이 많았다. 하지만 해인은 현대와의 차이점보다는 유적이 되지 않은 청동기 시대의 건축물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흥미가 갔다.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화려한 벽을 보며, 해인은 현대까지 남은 고대 유적지 중 하나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을 무심코 떠올렸다. 무너져 부식되지 않은 신전은 지금처럼 대강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건축에 쓰인 재료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벽화를 그리기 전 건물의 주된 틀을 잡은 재료는 돌과 나무로 보였다. 고작 그 정도의 재료들로도 이만큼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놀라웠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욕조가 있었다. 물이 채워져 있고, 주변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작은 병들이 줄지어 늘어진 채였다. 사제는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손님이 온다는 말씀을 들은 지 얼마 안 돼서……. 씻으시는 동안 시중을 들어 드리려고 했는데, 옷을 아직 준비 못 했지 뭐예요. 이 신전이 바다가 바로 보이는 절벽에 위치하다 보니 마을과는 다소 멀거든요. 시간도 늦은지라 아무래도 대접이 미흡하군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이어 가며 사제는 바쁘게 몸짓으로 해인에게 설명을 시도했다. 욕조와 병들을 가리키고, 해인을 가리켰다가, 다음으로는 본인을 가리켰고, 마지막으로 방 한편에 있는 다른 문을 가리켰다. 어쨌든 동작만 보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충분히 직관적인 설명이었다.
해인이 알아들은 것 같은 표정을 하자, 사제는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자신이 가리켰던 그 문을 열고 나갔다. 혼자 남은 해인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았다.
[말이 아니긴 하네…….]
살면서 맨발로 바닥을 그렇게 많이 걸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로 신발이 없어서 그랬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해인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목욕하고 잠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흙바닥에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기에 씻을 수 있는 상황은 반가웠다.
반가움과는 별개로 그리 순탄한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해인은 어떻게든 씻는 것에 성공했다. 사실은 도중에 친절한 사제가 잠시 들어와 데운 물을 더 채워 주고 병에 든 것들의 정체를 몸짓으로 알려 준 덕분이었다. 정체를 알려 주다 못해 씻는 것을 반쯤 도와주기까지 했다.
현대인의 심정으로는 옷을 벗은 채 초면인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해인은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분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씻고 싶지는 않았으나, 몸짓으로 논리적인 거부를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빠르게 포기했다.
어차피 같은 성별이기도 했고, 상대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못해 당연하다고 여기는 표정이어서 그에 휩쓸린 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옷까지……. 도와주시지는 않으셔도…….]
“네? 뭐라고 하셨나요?”
해인은 입을 다물었다. 사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다시 손을 움직였다. 물론 입고 있던 잠옷을 다시 입으려는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옷을 입혀 줄 준비를 끝낸 사람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게 문제였다.
해인은 거대한 천이 사제의 손길 아래에서 영화 촬영 의상 같은 옷 모양을 갖춰 가는 것을 반쯤 해탈한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포세이돈이 해인에게 주었던 히마티온까지 야무지게 접어 부피를 줄여서 돌려주었다. 해인의 신장 세 배를 한참 넘을 만큼 긴 천이었음에도 다루는 실력이 아주 능숙했다.
이어서 사제는 가죽 끈이 달린 샌들을 챙겨 주었다. 불편해 보이는 생김새였지만 일단 신발이 있음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해인은 끈을 어떻게 묶어야 할지 몰라 멈칫했고, 그것을 본 사제가 웃으며 끈을 매 주었다. 해인은 좀 숨고 싶어졌다.
“씻고 옷을 입으시니 아주 아름다우시네요! 마치 여신님 같으세요.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주무실 때 입을 옷은 그 방에 있답니다.”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느낌 상 칭찬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아차린 해인은 고민하다가 그냥 웃어 보였다. 사실 여전히 숨고 싶었다.
사제가 방을 벗어나며 해인을 돌아보았다. 해인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샌들은 생긴 것을 보고 불편함을 각오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예상 외로 나쁘지 않았다. 등불을 든 사제의 등을 따라 나온 긴 복도는 다소 쌀쌀했다. 히마티온을 끌어안은 채 사제를 쫓으며 해인은 들어왔을 때처럼 주변을 살폈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벽 앞으로 조각상까지 늘어놓아 장식한 복도는 열심히 관리하는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았다. 복도 끝에서 모퉁이를 돌자 또 문이 하나 보였다. 사제는 멈춰 선 뒤 해인을 돌아보며 그 문을 가리켰다. 해인이 문과 자신을 번갈아 보자 미소 지으며 친히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해인은 뜻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손님.”
해인이 알아듣지 못해도 칭찬임을 이해했던 것처럼, 사제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해인이 감사를 표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해인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문을 닫았다.
해인은 방 안으로 들어와 문에 기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씻고 옷을 입은 것뿐인데 두 배로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쉴 수 없었다. 모르는 언어가 익숙한 목소리로 들려온 탓이었다.
“생각보다 금방 왔군.”
[아버지!]
해인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포세이돈이 방 안쪽의 의자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사제에게 뭐라도 줘야겠어.”
포세이돈은 웃으며 손짓했다.
“이제 이리 와 앉으렴, 네게 해 줄 이야기가 있으니.”
해인은 시키는 대로 그의 앞에 다가갔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는 것 같은데, 어째서 신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고 인간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였다. 현대의 포세이돈과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대화했기에 느껴 볼 일 없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해인이 앞에 앉자, 포세이돈이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는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사실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내가 크로노스에게 전령을 보내려는 찰나 그의 전령이 먼저 내게 왔지 뭐냐.”
[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짐작했거나, 아니면 네가 이곳에 왔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별다른 설명은 없고 다만 이곳으로 방문하겠다기에 그러라고 했단다.”
말을 이으며 포세이돈은 자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아버지로서 자식의 말을 믿었음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 추측이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는 생각도 내심으로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움직임을 보면 딸의 추측이 제법 정확했던 듯하다.
정말로 시간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어린것이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고민하여 적절한 답을 내다니,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포세이돈이 흐뭇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이 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씩이나 걸렸으면 그동안은 초조함으로 잠도 이루지 못했을 터다. 게다가 시간의 신께서 이곳으로 손수 오겠다는 것을 보면 자신의 추측이 그리 틀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해인은 시간과 관련된 알 수 없는 문제로 인해, 과거로 오게 된 것이다. 확신하게 된 그녀는 약간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오는 방법이 있었으니 제가 여기 있는 것일 테고, 그럼 가는 방법도 당연히 있겠죠?]
“그렇겠지. 빨리 돌아가고 싶으냐?”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요.]
“누가?”
해인은 말없이 포세이돈을 바라보았다. 답을 대신하는 시선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래의 내가 염려된다는 이야기로군. 그럼 네 어미는 염려되지 않느냐?”
[물론 똑같이 걱정되지만……. 아버지께서 제가 없어진 사실을 먼저 알아채실 거예요. 없어지기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었거든요.]
알아차리는 순간 섬을 뒤집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 해인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렇다면 큰일이긴 하구나. 헌데 그럼 너는 네 어미와는 떨어져 자랐느냐?”
[아뇨, 어머니와 자라고 아버지를 만나러 자주 오갔어요. 어머니가 떠나고 싶지 않아 하셨거든요.]
“고향이 어디기에?”
[……한국이라고, 동쪽 끝에 있어요. 한참 가야 할걸요.]
그 대답에 흥미가 생긴 포세이돈이 몇 마디 더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포세이돈은 기민하게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알아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전령과 함께 출발하셨던 게 아닙니까?”
그 말에 들어온 이가 빙긋 웃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온화한 인상의 남자였다.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기묘하게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해인은 포세이돈의 말을 듣고 금방 그의 정체를 짐작했다.
당연하게도, 시간의 신일 것이다.
“이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닌지라, 저도 마음이 좀 급했습니다.”
그가 생긴 것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해인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제외한 신은 처음 만나 보는 탓에, 고개를 숙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해인은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자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떴다.
“고개 숙일 필요 없단다. 대신 얼굴을 보여 주겠니?”
사각사각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해인의 바로 앞에 선 그가 말했다. 해인은 어색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래. 말했지만 정말 흔한 일은 아니어서……. 사실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지. 그런 탓에 이런 일에 엮이게 된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었단다. 심지어 반신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오히려 납득이 되기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옅게 웃었다.
“나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란다. 어린 반신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해인의 짐작대로였다.
[……해인입니다.]
답을 하며, 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그가 직전에 한 혼잣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