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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4)화 (5/149)

***

[아버지?]

“음?”

지중해의 깊은 곳에 위치한 그의 궁전에서 넥타르 잔을 기울이던 포세이돈은, 문득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색을 띤 자식의 목소리를 들었다. 깨끗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다만 그는 이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포세이돈이 들었다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이 틀림없는 바다 신의 자식임을 증명했다. 심지어 지금처럼 포세이돈에게 곧장 들리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그가 특별히 아끼는 자식들에게만 준 권리였다. 자식이라 해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낯설 이유가 없었다. 이건 꽤 이상한 일이었다.

포세이돈은 잠시 고민했으나, 그 시간은 짧았다. 그는 금방 잔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에 두었던 자신의 삼지창을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히마티온(고대 그리스의 겉옷)을 어깨 위에 대강 걸쳤다.

고민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대부분 괴물의 형태를 한 채 태어났다. 물론 아닐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문에 명성에 목을 맨 같잖은 인간 영웅들이 나서 그의 자식들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이는 일이 몹시 흔했던 것이다.

“전차를 준비해라.”

요정을 불러 지시를 내린 그는 망설임 없이 궁전 바깥으로 나섰다.

괴물로 태어나는 자식들이 늘어나자,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핍박받을까 봐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냈다. 실제로도 다치거나 죽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어느 사이 자식의 일이라면 저도 모르게 발 벗고 나서게 되고는 했다.

돌고래의 등에 올라타 바다 위로 향하며 그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장소를 확인했다.

사실 최근에는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있어, 인간들 가운데 그나마 영웅이라 불릴 법한 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 보니 자식들에 대한 우려를 조금 접었던 참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온 위치는,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자식들을 괴롭히던 인간 영웅들이 모여 있는 바로 그곳, 트로이의 근처였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낯선 목소리의 딸이 무슨 위험에 처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또한 이런 권리마저 가진 딸의 목소리가 왜 낯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위험의 종류나 자신의 의문을 따지기 전에 일단은 움직이는 게 옳았다. 자식을 지키는 건 그가 자신의 손으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점 따위는 자식을 안전한 곳에 옮겨 두고 해결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하여 단숨에 전차를 타고 달려온 팀블레에서, 포세이돈은 연합군의 일원인 아킬레우스의 등 뒤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의 소녀에게 단번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두운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는 그와 꼭 같은 색이었다.

틀림없는 반신의 눈이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처음 보는 생김새였지만, 얼굴이 낯설고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다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한 그의 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그의 자식이었다.

***

해인은 갑작스레 눈앞에 등장한 아버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현실성 부족한 가정이 사실은 현실성 있는 가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걸음 앞에 선 포세이돈은 해인과 눈을 마주하더니 몇 초 뒤 미소 지었다. 그 신의 얼굴은 분명히 익숙했다. 못 보던 수염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그 외의 요소는 해인이 아는 그녀의 아버지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맞춘 것만으로도 오싹한 긴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트리아이나를 든 그가 전신에 두르고 있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눈앞의 거대한 존재를 바라보며 해인은 비로소 확신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한 옷차림, 통하지 않는 언어, 현대에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건축 재료,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불빛, 그리고……. 눈앞에 있는 말 그대로의 신.

시간을 이동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머나먼 과거로.

흰색 말 네 마리가 이끄는 거대한 황금 전차를 보며 해인은 아주 작게 탄식했다. 지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는 존재는 분명 해인의 아버지였지만, 동시에 아직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끝나지 않는 불멸의 권태를 느껴 본 적 없는, 현대와는 달리 위대한 신의 힘을 마음껏 휘두르며 바다를 다스리고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는 신, 지중해의 진정한 지배자인 포세이돈이었다.

[아버지…….]

“그래, 나의 딸아.”

작은 부름이었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곧장 답을 돌려주었다.

“이 아버지가 널 찾으러 왔건만, 달려 나와 반겨 주지 않을 테냐?”

발음은 방금까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 언어와 같았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면, 어째서인지 포세이돈의 말은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인은 현대의 포세이돈과 묘하게 닮은 듯 다른 말투에 눈을 크게 떴다가, 자신이 그의 말을 알아들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등 뒤에서 벗어난 뒤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포세이돈의 앞에 섰다.

[아, 아버지. 저를 알아보세요?]

그녀는 방금까지 이곳이 과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라면 포세이돈은 해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와 해인이 부녀 관계인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은 해인의 어머니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놀란 기색의 해인을 내려다보며 포세이돈은 느리게 답했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네 어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는 없구나.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자식인 건 분명히 알 수 있지. 내게 네 목소리가 닿았고, 이건 내가 허락하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꾸며 낼 수 없으니까.”

그제야 해인은 자신이 숲에 혼자 서 있을 때 포세이돈을 떠올리며 입 밖으로 도움을 요청하듯 그를 몇 번 불렀음을 상기해 냈다.

‘……바다가 근처에 없어도 들을 수 있으셨던 거구나.’

되짚어 보면, 그렇지 않고서야 이 순간 이렇게 보란 듯이 포세이돈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어째서 현대의 포세이돈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자신을 부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포세이돈은 손을 뻗어 해인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그는 관찰하듯 해인의 이목구비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어디 한 곳 빠지지 않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구나. 눈이나 머리색을 제외하면 나를 하나도 닮지 않은 것을 보니, 네 어미를 빼닮아 태어난 것 같고. 하지만 역시 낯설구나. 이런 얼굴의 여인은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내 자식 중 이렇게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아이는 흔치 않다. 그런 만큼 내가 너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잊었을 리가 없건만…….”

의아한 기색으로 혼잣말을 이어 가던 그는 이내 해인의 옷차림도 한번 훑어보았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고, 남성용 옷인 커다란 클라미스를 걸쳤으며, 그 아래로는 맨발이다. 정상은 아닌 행색에 포세이돈이 미간을 좁혔다.

“……뭐, 그런 이야기는 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 이 아버지가 너를 어떻게 도와줬으면 하는지 말해 보거라. 저자들이 널 해치려 했느냐?”

해인은 포세이돈의 눈동자가 한순간 기이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에요! 그, 오히려 도와주려고 하시던 것 같긴 했어요. 다만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고 이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어서…….]

“흠, 그러면?”

[분명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숲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아버지를 불렀던 거예요.]

허둥지둥 이어지는 설명을 유심히 들은 포세이돈은, 생각했던 최악보다 훨씬 가벼운 사유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 그랬군. 숲 한가운데서 눈을 떴다니, 납치인가? 어쨌든 그런 거라면 해결도 어렵지 않겠구나. 날이 밝으면 집으로 찾아갈 수 있게 해 주마. 지금은 우선 전차에 타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의 편을 들어주는 현대의 포세이돈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해인은 포세이돈의 도움은 일말의 의심조차 없이 아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옷을 돌려줘야 해서…….]

해인은 어색한 손길로 어깨 위에 둘러진 클라미스를 끌어내렸다. 몸에서 흘러내린 묵직한 천을 한 아름 끌어안고, 해인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아킬레우스의 앞에 다가갔다.

그는 고요하게 해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인데다 하필이면 역광이었기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해인은 클라미스를 아킬레우스에게 건넸고, 그는 잠시 가만히 서 있는가 싶다가 이내 천을 거둬 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감사를 전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던 해인은 고민하다가 작게 인사했다.

[……감사했습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해인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포세이돈에게 달려갔다.

클라미스를 벗자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차림이 된 해인의 모습에, 포세이돈은 비로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미한 의심을 지워 냈다. 그는 딸이 전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뒤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 딸을 찾으러 오는 사이 발견했던 모양이로군. 하지만 애초에 버려진 적 없는 아이였으니 찾아냈다 하여 거둘 이유는 없지, 그렇지 않느냐?”

아킬레우스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 역시 아킬레우스의 대답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 그대로 전차를 출발시켰다.

신의 전차를 이끄는 말들은 아주 빨랐기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입을 다문 채 침착한 태도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주변이 완벽하게 조용해진 뒤에야 아킬레우스를 돌아보았다.

“숲에 서 있는 분을 말 안 통하니까 그냥 무작정 데리고 왔던 거였어?”

“누가 그래?”

“방금 신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면 네가 그런 것 같은데…….”

아킬레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파트로클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등불을 고쳐 들었다.

“흰 말과 황금의 전차라, 포세이돈 님의 딸이셨군. 어쩐지 그 까다로운 말이 친근하게 굴더라.”

말을 이으며 그는 등불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등을 떠밀어 왕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킬레우스는 아까 전 해인이 건네준 클라미스를 그대로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밤중에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이런 일이나 벌이고 말이야……. 별일 없어서 다행이군. 아름답긴 했지만, 설마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글쎄…….”

농담처럼 건넨 물음이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파트로클로스는 등불의 불빛에 비친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했다. 마음에 들던 무언가를 뺏긴 듯, 명백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

파트로클로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아킬레우스는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 생소한 반응에,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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