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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3)화 (4/149)

손이 닿은 순간 아킬레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해인의 손을 낚아채 잡았다. 동의를 얻었으니 거칠 게 없어진 셈이었다. 직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그는 별달리 힘을 들이지 않고 해인을 말 위로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 속에서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앞에 앉혀졌다. 말의 등 위에 앉은 몸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허리에 감긴 팔뿐이었고, 그 가운데 균형을 잡는 건 당연하게도 어려웠다.

승마를 해 본 적은 있었으나, 안장과 등자를 똑바로 달고 있는 훈련된 말을 타고 바르게 앉아 트랙을 달리는 것과 지금을 감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해인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아킬레우스는 상대가 뜻을 알아들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낮게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 잘 잡아. 혀를 깨물지 않게 조심하고.”

아킬레우스의 손끝이 해인의 턱과 입가 근처를 스치듯 건드렸다. 무슨 뜻인지 본능적으로 이해한 그녀는 알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고삐를 잡는 커다란 손을 보자 해인은 내밀어진 손을 잡았던 것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했다. 말 등이 보기보다 높은 걸 모르지 않았지만, 이런 위험한 자세로 안겨 있자 그 사실이 더 뼈저리게 다가온 탓이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을 단단히 안은 뒤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말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덜컹이며 크게 흔들리는 시야에 해인은 다급히 아킬레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생존을 위한 반응이었다.

안장도 현대만 못할 뿐더러, 등자가 없어서 기수는 다리 힘과 균형 감각으로만 말 등에 올라타 있어야 했다. 그 마당에 해인까지 붙잡고 있었으니 떨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수의 실력과는 별개로, 반쯤 매달려 가는 해인에게는 지옥 같은 순간에 불과했다.

입이라도 열었다가는 정말 혀를 두 동강 낼 것 같았기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거센 바람이 뺨과 머리카락을 거칠게 스쳤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해인은 눈을 감지 않았는데, 그것은 주변 풍경을 조금 더 확인해서 스스로의 현실성 부족한 가정을 평가해 보려는 한 줄기의 이성 때문이었다.

길 같지 않은 길을 얼마쯤 달리자 반쯤 무너졌으나 여전히 넓고 높은 돌벽이 보였다. 그 가운데 나 있는 허물어진 문을 통과하니 조금씩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돌, 벽돌, 아니면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전부 반쯤 무너져 있거나 불탄 자국이 선명했다.

늦은 시간인 것은 알겠지만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도 인적이 전혀 없었고, 흔히 있을 법한 네온사인 간판 같은 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인공적인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세상을 밝히는 건 오직 환한 달빛뿐이다.

고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입을 법한 옷, 통하지 않는 언어, 현대에서는 잘 쓰지 않는 건축 재료,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빛…….

아킬레우스를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떠올렸던 해인의 현실성 없는 가정 위로 조금씩 살이 붙었다. 현실감을 휘발시키고 있는 지금의 이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인은 말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생각도 한 조각씩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더 달렸을까, 아킬레우스의 팔을 붙잡은 손의 감각조차 희미해졌을 무렵 아까 전 보았던 것보다 높이가 낮은 돌벽이 나타났다. 무너진 벽의 잔해 위를 밟고 지나치자 주변의 풍경이 약간 달라졌다.

부서지거나 불타 있는 것은 방금까지 지나쳐 온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같았지만,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까 본 것보다 더 견고하고 화려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해.”

그때 해인의 머리 위로 아킬레우스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다음 순간,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말이 몇 개의 계단을 훌쩍 뛰어올랐다.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해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는 듯 말은 조금씩 속도를 줄였고, 얼굴을 때리던 바람도 서서히 약해졌다.

“아킬레우스!”

말발굽 소리를 뚫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어조였다. 해인은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떴다.

그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유난히 멀쩡한 데다 지금까지 말 위에서 봤던 것들 중 가장 견고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등불을 든 남자가 그들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방금 들렸던 낯선 목소리의 주인인 듯했다.

“파트로클로스.”

왕궁 바로 앞에서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멈춘 아킬레우스가 그를 보고는 마침 잘되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등불을 들고 서 있던 상대, 파트로클로스는 한밤중에 벌어진 지휘관의 기행에 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제멋대로인 성격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겪을 때마다 매번 새로웠다.

늦은 시간에 난데없이 방에서 뛰쳐나온 아킬레우스는 쫓아갈 틈도 없이 말을 타고 나가서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 일로 얌전히 앉아 검만 손질하고 있기에 불도 켜 주고 나왔더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증명해 주리라고는 예상 못 한 바였다.

잠도 못 자고 왕궁 앞에 등불을 들고 선 채 전전긍긍하며 하염없이 아킬레우스를 기다리던 파트로클로스는, 비로소 돌아온 지휘관의 웃는 얼굴에 두통이 일었다.

“아킬레우스, 너 이게 무슨…….”

빠르게 다가서며 입을 열던 그는 아킬레우스의 품 안에 누군가가 안겨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말도 미처 맺지 못하고 아킬레우스의 품에 안긴 이를 당황한 듯 응시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에 아킬레우스가 선수를 쳤다.

“이 여자부터 받아서 내려 줘.”

“……진짜 이게 무슨.”

“빨리.”

나는 어쩌다가 이놈의 친우가 되었을까. 왜 운명은 나를 이놈의 곁으로 보냈을까. 의미 없는 고민과 함께 파트로클로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아킬레우스에게 등불을 건네고, 뒤이어 손을 뻗었다.

“하……. 아가씨, 잡으시죠.”

해인은 아킬레우스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여전히 허리에 팔이 감겨 있었고, 말은 멈춰 서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서 해인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파트로클로스의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려 주겠다는 뜻인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가 아니라 말에서 내려 땅에 서는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풀고, 파트로클로스가 그녀를 말에서 내려 주는 것을 한 팔만으로 도왔다. 해인이 땅에 완전히 내려서자 파트로클로스는 그녀를 데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것까지 확인한 아킬레우스가 자신도 말에서 뛰어내렸다.

등 위가 가벼워진 말이 투레질을 몇 번 하더니, 불쑥 해인에게 애교를 부리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해인은 얼떨떨하게 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제대로 반응할 만한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그녀에게 있어 낯선 일은 아니었다. 말들은 해인에게 늘 순종적이고 친근하게 굴었다. 말들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으로부터 피의 반을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뭐야, 이 까다로운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는 파트로클로스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아킬레우스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아쉬운 듯 물러났다.

“잠시 기다려, 들여보내고 올 테니까.”

“아, 그래……. 돌아올 때는 설명을 준비해서 와라.”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등불을 다시 넘긴 뒤 말을 이끌고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파트로클로스는 하얗게 질린 해인을 대충 훑어보았다.

아킬레우스가 입고 다니던 짙푸른 색 클라미스를 뒤집어쓴 여자는 거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고도 어딘가 곱게 자란 티가 났다. 아까 전 잠시 잡았던 손도 굳은살 하나 없이 가느다란 모양이었다.

그는 이런 데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누가 봐도 귀한 집 따님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시다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만.”

사정을 짐작할 수 없어 파트로클로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상대가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에 해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그보다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해인보다 대여섯 살 정도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까 전의 그 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이쪽 역시 상당히 준수한 생김새였다.

[저희 말이 안 통해요.]

어쨌든 해인은 침착하게 아무 말이나 했다. 돌아온 대답을 당연하게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파트로클로스는 당황했다.

“……말이 안 통하나?”

[English?]

“예?”

[역시 안 되네…….]

어색해지려는 그 순간 다행히 아킬레우스가 돌아왔다. 언어가 통하는 데다,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일 것이 분명한 이의 등장에 파트로클로스가 반색했다.

“이제 빨리 말해, 어떻게 된 거야?”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킬레우스는 눈짓으로 해인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간 파트로클로스는 해인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음을 그제야 알아챘다. 아킬레우스의 클라미스가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었기에 미처 못 본 부분이었다.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더 의문스러워졌다. 아킬레우스가 이런 사소한 것을 섬세하게 신경 쓸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탓이다. 친구 겸 부관의 의문 섞인 시선을 받으며 아킬레우스는 해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아까 전 숲에서처럼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불현듯, 허공을 가르고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쪽을 목적으로 두고 달려오는 무언가의 기척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바람 소리 같은 기척을 낸 존재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는 몹시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어느 사이 해인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은 그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네 마리의 흰색 말이었다. 그들은 황금으로 만들고 화려한 보석들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마치 예술품처럼 보이는 거대한 전차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 위로 검은 머리카락의 신이 존재했다.

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삐를 당겼다. 허공을 날던 말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와 마침내 인간들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전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신은 키가 몹시 컸고, 또한 기이하게 빛나는 짙은 파란색의 바다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의 색을 확인했을 때, 해인은 그 자리에 서 있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신의 정확한 정체를 알아차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감히 모를 수 없는 존재였다.

물의 지배자.

그리고 땅을 흔드는 자.

지중해의 신, 포세이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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