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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2)화 (3/149)

이쯤 되자 해인은 상황이 잘못되다 못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긴 것과는 별개로, 눈앞의 남자가 현대를 기준으로 하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보더라도 흰색 원피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입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짙은 파란색의 천을 망토처럼 걸친 채였다. 허리에는 가죽으로 된 끈을 두르고 검을 매달았고, 신발은 가죽으로 된 샌들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일반적인 게 없었다.

당황한 해인이 멍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기에 이런 곳에 있지? 아까 그 빛은 그대와 관련이 있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해인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듣는 언어였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를 위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수없이 오가며 자란 해인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가 내뱉는 말들은 비슷한 언어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말 거는 거 맞겠지?]

해인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대의 옷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이 두 가지의 요소에 아까 전 혼자 있을 때 떠올렸던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도 없었던, 지극히 현실성 부족하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가정이 불현듯 떠올랐다.

“……처음 듣는 언어인데.”

한편 아킬레우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약간의 당황을 느꼈다.

해가 진 뒤의 숲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는, 잠깐 보였던 그 찰나의 빛을 찾겠다며 뛰쳐나온 것이었으니, 돌아가면 파트로클로스가 기막혀하는 얼굴로 잔소리를 해 댈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그 어리석은 짓을 끝까지 행했으며, 그 결과 정말로 낯선 이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내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감각에 시달렸던 데다가, 그는 언제나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개척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직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얻어 낸 결과로부터 비롯된 고양에 약간 들떠 있는 상태였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나?”

[Can you speak english?]

서로에게 동시에 건네진 질문으로 두 사람 모두 확실히 깨달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그제야 조금 난처한 얼굴로 해인을 내려다보았다. 진정하고 자세히 살펴보자 눈앞의 여자는 생김새가 다소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앳된 얼굴은 남들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럽고 섬세한 선을 그리고 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아무 장식 없이 늘어트렸고, 눈동자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더없이 선명하게 빛나는 진한 파란색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나무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해인의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가만히 해인과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머리카락 탓에 해인의 얼굴이 반쯤 가려지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불현듯 눈앞의 여자가 이 날씨에 바깥에 서 있기에는 추운 옷차림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얼핏 보면 키톤과 비슷했지만 제대로 확인하자 낯선 형태의 옷이었다. 게다가 보통 여자들이 입는 것과 달리 무릎을 겨우 덮을 만큼 길이가 짧았고, 소재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얇았다.

사실 타인이 무엇을 어떻게 입고 있는지는 그의 알 바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상황 자체가 특이한 만큼 아킬레우스는 이번 한번쯤 호의를 베풀어 보고자 했다. 생각과 행동은 동시였다. 그는 입고 있던 클라미스를 벗으며 해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왜……!]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인은 크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움직임이 빨랐던 건 아킬레우스였다. 그는 물러나는 이의 어깨를 한 걸음 더 나서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낚아챌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도와주려는 거니까.”

낮게 속삭이며 그는 해인의 어깨 위로 옷을 걸쳐 주었다. 정작 본인도 미처 깨닫지는 못했으나 그가 이전에 본 적 없는 타인에게 이런 호의를 건넨 것은 거의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남들의 사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성정 탓이다.

이번은 일종의 특수성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종일 기묘한 기분을 느끼다가, 하루가 끝나기 전 발견한 빛을 따라온 끝에 웬 낯선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충분히 관심을 둘 법했다. 그 과정에서의 호의는 사실상 단순한 변덕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만으로도, 그를 아는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두 눈을 의심하며 신을 찾을 만큼 그 답지 않은 행동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그 변덕 같은 호의를 건네던 가운데 손끝에 잠깐 스친 목덜미의 체온은 서늘했다. 얇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상대는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갈수록 가관이군.”

[아, 옷을…….]

아킬레우스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뭐라고 말하는 여자는 줄곧 좀 당황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겁먹은 기색은 크게 내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상대의 정체를 고민했다.

어딘가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라고 단정 짓기에는 옷이 좀 얇고 신발이 없을 뿐,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오히려 귀한 아가씨 쪽에 더 가까웠다. 머리카락도 정성껏 관리해 기른 모양새였고, 사실은 그냥 대충 보더라도 곱게 자란 티가 났다.

하지만 애초에 말도 통하지 않고, 생긴 것 역시 남들과 다소 다른 만큼 팀블레의 왕족은 아닐 것이다. 또한 팀블레에서 살던 사람도 아닌 듯했다. 무너진 국가에서 병사들을 피해 도망쳤다고 하기엔 옷이 깨끗했고, 상처도 없었으며, 본인도 절망적이거나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짚어나갈수록 수상함이 커졌다. 그러고 보면 발견하게 된 계기도 묘했다. 아킬레우스는 아까 전 왕궁에서 보았던, 그 찰나에 반짝였던 빛을 다시 떠올렸다.

이대로 여기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있지만, 막상 그러기에는 아까웠다. 무엇보다 빛을 따라온 끝에 발견하게 된 여자인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오늘 내내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어쩌면 이 순간을 예고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뭐, 정체가 무엇이든 찾아낸 건 나였으니…….”

너무 멀리 나갔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까지 생각하자 오히려 데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여자 하나일 뿐이다. 아킬레우스는 해인과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자세히 뜯어보니 생긴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 외로 마음에 드는 쪽에 가까웠다.

그 눈길에 해인이 의아함을 떠올리려던 찰나였다. 아킬레우스는 팔을 뻗어 그대로 해인을 덥석 안아 들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내려놔요!]

“쉿, 늦은 시간의 숲속에서는 조용히 해야 해.”

해인은 경악하며 아킬레우스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흡사 벽을 밀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들어 안듯 허벅지를 받치고 허리를 감은 팔은 쇠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단단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올려다봤던 푸른 눈이 이제는 시야 아래에 있었다. 힐끗 눈을 들어 자신과 짧게 시선을 맞추는 아킬레우스의 행동에 해인은 그만 어이가 없어져 할 말도 잊었다.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일지, 해인은 남자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을 보며 때 아닌 의문에 빠졌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잘못된 줄 알면서도 기묘하게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에 찬 검이나, 이상한 옷차림, 그리고 가까이서 보게 되자 신기할 만큼 아름답게 생긴 남자의 얼굴까지, 그 모든 게 하나같이 현실감을 깎아내리는 탓일지도 몰랐다.

[……여기는 어디예요? 그런 옷은 왜 입고 있어요?]

어깨 위로 걸쳐진 옷 덕분에 추위마저 한결 꺾이자, 이제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생생한 꿈 같기도 했다. 말이 안 통하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꺼낸 건 그래서였다.

“말을 가르치는 건 해 본 적 없는데…….”

[그 검 진짜인가요?]

“파트로클로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정말 끝까지 안 통하네…….]

아킬레우스는 해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대답하는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서로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할 말만 하고 있었다. 해인은 몇 번 더 아무 말이나 해 봤지만, 돌아오는 남자의 말은 변함없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였다. 해인은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인정하고 팔을 늘어뜨렸다. 발버둥 쳐 봤자 별다른 타격도 없기는 했지만, 이윽고 포기한 듯 순순히 기대 오는 몸의 무게에 아킬레우스는 어쩐지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도와주려는 것인지, 해를 끼치려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 해인은 어느새 숲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이상한 거 맞네.]

근처의 나무에는 말 한 필이 매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해인에게 더 심각하게 다가온 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그 자체였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해도 땅 위로는 지나칠 만큼 빛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은 밝았다.

기이하게 느껴질 만큼 환한 달빛 때문이었다.

그 달빛에 이끌려 올려다본 하늘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별이 선명했다. 별이 많은 하늘을 한두 번 봤던 건 아니지만, 말로는 설명하지 못 할 차이가 있었다.

“기껏 데려가겠다고 생각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해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이 아킬레우스는 매어 두었던 자신의 말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로 해인을 응시하다가, 그녀를 이내 바닥에 내려 주었다. 해인은 바닥에 다시 발이 닿자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아킬레우스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말을 묶어 둔 매듭을 풀더니,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뒤이어 손을 내밀었다.

동작만으로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하지만 해인은 바로 손을 잡는 대신 이번에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래도 키가 그녀보다 훨씬 컸고, 말의 등에 앉아 있으니 눈높이는 더 높아져 있었다. 꽤 아득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남자의 얼굴 뒤로는 밤바다 같은 검은 하늘이 펼쳐진 채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해인은 불현듯 아주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을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도망쳐 봤자 멀리는 못 가겠지.’

쫓아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쫓아온다고 가정하면 솔직히 등을 돌리자마자 잡힐 것 같았다.

“말이 안 통하는 건 꽤 답답한 일이군.”

눈앞으로 내밀어진 손은 크고 단단했다. 흉터 하나 없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단련된 사람의 손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는 해인에게 아킬레우스는 입을 열어 재차 권했다.

“잡아. 나와 함께 가자.”

그는 해인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숲속에서보다 더 밝은 달빛 아래에 선 여자는 숲 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특히 투명하게 빛나는 짙은 색의 눈동자는 보석과도 같았다. 파랗기만 한 눈은 많이 보았지만, 여자의 눈은 같은 푸른색이어도 그 깊이가 달랐다.

흔하지 않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치 있는 법이다. 놓치면 아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제로 힘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킬레우스는, 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런 방법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손을 내민 채로 해인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심지어 어딘지 초조해하고 있었다.

사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달빛 아래 선 두 사람의 주위로, 누군가에게는 길지 않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고요하게 흘렀다.

고민 끝에 해인은 거의 반쯤 상황에 떠밀려, 머뭇거리며 내밀어진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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