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1 과거의 땅
기원전 십이 세기.
트로이와 아카이아 연합군의 전쟁이 십 년째 이어지던 가운데, 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날이었다.
테티스 여신의 아들이자, 프티아의 왕자,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 아킬레우스는 그의 휘하에 있는 미르미돈 부대 병사들을 이끌고 팀블레를 공격하여 불과 며칠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팀블레는 트로이의 우방이었지만 도시의 크기도 작고, 뛰어난 장수도 없었으며, 자체적인 병력도 강하지 않았다. 그들도 주제를 알아 트로이에는 물자만 조금씩 지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승리를 폄훼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오롯이 한 사람의 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후…….”
파트로클로스는 한숨을 쉬며 한편에 놓인 팀블레 왕과 왕자들의 시체를 응시했다. 이는 성문이 열리자마자 선두에 서서 안으로 뛰어 들어간 그의 상관, 아킬레우스가 몇 시간 만에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저들 모두가 아킬레우스에 비해 무력이 한참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한 국가의 왕족들이었다. 이만한 전공을 세우고도 아킬레우스는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평범한 인간은 반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홀로 쓴웃음 지은 파트로클로스는 전투의 뒷수습을 시작했다.
원래였다면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는 온몸을 적신 피가 불쾌하다며 전투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 버렸다. 물론 오늘따라 유독 피가 많이 튀어 정말로 꼴이 말이 아니기는 했고, 아킬레우스가 잘 싸우는 것과는 별개로 혈향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도 오늘만큼은 순순히 그를 먼저 보내 준 바였다.
팀블레 왕족들의 시체를 따로 한곳에 옮겨 장례식을 준비하고, 병사들에게는 본격적인 도시의 파괴와 약탈을 지시했으며, 잡아들인 노예를 분류하고, 거둬들인 전리품의 품목을 확인하는 등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참을 바쁘게 돌아다닌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느덧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 피가 번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석양을 바라보던 파트로클로스가 고개를 내리고 빛이 번지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곧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일을 이어 가기도 힘들고, 예정보다 이른 함락이었으니 필요 이상으로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부대장들을 불러 모아 오늘의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오늘은 이쯤 하자. 내일 아침까지 푹 쉬어라. 각 부대 소속 병사들에게 전달하도록.”
“예!”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이들이 크게 답했다. 그들의 들뜬 기색에 파트로클로스는 빙긋 웃었다. 부대장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에야 파트로클로스도 비로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팀블레 왕궁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왕족들이 지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차가운 시체가 되었으니 왕궁은 지휘관인 아킬레우스의 임시 거처로 그 용도가 바뀌어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왕궁 안쪽의 가장 좋은 방으로 향했다. 일부러 인기척을 숨기지 않고 복도를 걸어간 그가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반쯤 젖은 머리칼로 의자에 앉아 검을 손질하던 아킬레우스가 태연히 고개를 들고는 파트로클로스를 맞이했다.
“전후 처리는 잘하고 왔나?”
“그럼, 잘했지. 할 일 많아서 바쁘더라.”
파트로클로스는 한숨과 함께 대답하며 아킬레우스의 맞은편 의자에 자연스레 앉았다.
지휘관과 그의 부관이라는 상하 관계가 존재했지만, 그 이전에 그들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였다.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을 때는 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게 둘 모두에게 익숙했다.
파트로클로스가 앞에 자리 잡자 아킬레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처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물어 왔다. 어릴 때부터 늘 제멋대로였고 커서도 그런 성향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지휘관으로서의 의무 자체에는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이번처럼 본인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고 부관에게 맡기면, 그는 나중에라도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꼭 보고를 챙겨 들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파트로클로스는 지금까지 하다 온 전후 처리의 진행 정도를 익숙하게 정리해 말해 주었다. 그의 상관께서는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무난히 끝났군.”
짧은 감상평이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수긍했다.
“무난하다 못해 순조롭지. 전부 네 공이야. 어쨌든 사나흘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그동안은 팀블레에 머무르며 군을 정비하는 게 좋겠어.”
“좋아. 네 말대로 하자.”
곧바로 상대의 의견을 수용한 아킬레우스는 뒤이어 짧은 치하를 건넸다.
“오늘은 고생했어. 이제 너도 가서 쉬어.”
“그래야지.”
파트로클로스의 답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멈췄던 손질을 이어 가는 모습에 파트로클로스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말없이 방 안의 등잔불을 전부 차례로 돌며 불을 켜 주고 방 바깥으로 나갔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꽤 한참 동안 아킬레우스는 검을 손질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그가 비로소 고개를 든 건 해가 모두 지고 하늘이 짙은 어둠으로 물든 후였다.
파트로클로스가 불을 켜 주고 간 덕분에, 해가 떠 있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방 안은 제법 밝았다. 핏자국이 지워지고 말끔해진 검을 내려놓은 아킬레우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성벽 너머의 작은 숲에서 문득 빛이 반짝였다.
“……뭐지?”
아킬레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틀에 손을 짚고 빛이 반짝인 곳을 바라보았지만, 두 번은 없다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을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 무시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참 창가에 머물며 먼 곳의 숲을 응시했다.
사실, 오늘 그는……. 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인지도 모를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기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어딘지 허공에 뜬 것 같기도 했고, 바닥 깊이 짓눌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이유 없이 들뜬 감각이 지나치게 낯설어 불쾌할 지경이었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좀 나아질까 싶던 차에 마침 팀블레의 성문이 무너졌다. 그는 일부러 생각을 지우고 검을 휘둘러 모든 왕족들을 단신으로 죽이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러고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과하게 뒤집어쓴 피 때문에 불쾌함이나 가중되었을 뿐이다. 진정할 필요를 느껴 검 손질까지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이다. 한 번만 더, 무엇이든 해 보는 것이다.
그는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클라미스(고대 그리스 남자들이 주로 입던 짧은 망토)를 집어 들고, 막 손질을 끝냈던 검을 허리에 찼다. 옷을 대강 걸치며 그는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왕궁을 벗어났다.
***
해인은 불현듯 느껴지는 서늘한 추위에 잠에서 깨어났다.
별장 안의 온도가 따뜻했기에 얇은 잠옷 차림으로 잠들었는데, 드러난 목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확 들었다. 해인은 얼떨떨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실내에서 잠들었건만, 지금 그녀는 흙바닥에 내던져진 채였다. 심지어 시야에 보이는 건 낯선 숲의 풍경이다. 고개를 들자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뭐지?]
해인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맨발이었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맨발로 흙 위를 걸어 본 적 없던 해인은 혼란스러운 눈길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듯했다.
[뭐야.]
멍한 기분으로 옷이나 팔다리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해인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로 들어오는 밤공기가 서늘했다. 드러난 목덜미와 팔다리 위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해인은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달빛을 제외하면 빛이라고는 없었다. 심지어 그 달빛마저 커다란 나무들의 빽빽한 나뭇잎에 가려져, 희미하게 몇 줄기 비칠 뿐이다. 당연히 가시거리가 짧았고, 먼 곳은 암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일단 해인은 자신이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숲에서 아무것도 없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했다.
‘……몽유병? 납치?’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지, 이유라도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뭘 생각해봐도 하나같이 전부 논리적인 설득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기에는 환경이 안 좋았다. 일단 기온부터가 너무 낮았다.
[……아버지?]
해인은 주변에 그가 없음을 알면서도 괜히 목소리를 내어 불러 보았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속삭이듯 몇 번 더 포세이돈을 부르던 해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근처에 바다도 없는 것 같은데……. 들릴 리가 없겠지.]
포세이돈은 종종 필요한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자신을 부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바다 근처도 아닌 장소에, 핸드폰이나 하다못해 공중전화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의미 없을 뿐이었다.
‘연락 수단도 없으니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고……. 아버지가 실종 신고를 넣어야 구조가 가능하려나.’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해 본 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조받기 전에 저체온증으로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으나 이대로 한 시간만 더 지나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해인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런 탓에 그녀는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수풀을 헤치는 소리, 그리고 일정하게 걷는 발자국 소리.
해인이 겨우 그것들을 잡아냈을 때, 그 기척의 주인은 이미 근접해 있는 상태였다. 해인은 등 뒤로 느껴지는 타인의 인기척에 당황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직후, 눈이 마주쳤다.
“……잘못 짚은 건 아니었군.”
마침 상대의 금빛 머리칼 위로 달빛이 내렸다. 엷게 반짝이는 금발 아래로, 해인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녹색과 하늘색이 오묘하게 섞인 푸른빛이었다.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이 아름다운 남자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채로 그녀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