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0 서장
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은 언제나 그랬듯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덕분에 다소 특이한 생김새를 가졌다 한들 눈에 띄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 속에서도 유독 타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가 하나 있었다.
입국장 게이트 근처였다.
그 곳에 서 있는 남자는 키와 체격부터가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그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존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근본적으로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우아한 낯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 체격 탓인지 몹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뿐만 아니라 서늘하게 푸른 눈은 기묘한 안광을 품고 있어서,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모든 요소들은 주변에 서 있거나 근처를 지나가던 이들에게 원인 모를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동시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진실을 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포세이돈. 그는 과거 지중해를 지배하던 존재로서, 고대인들의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위대한 바다의 신이었다.
비록 인간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현대에 이르러 굳건하던 믿음을 잃고, 과거와 같은 전지전능함을 휘두를 수는 없게 되었을지언정,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약간의 권능과 함께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을 소유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심지어 자신과는 하등 연관이 없을 공항 같은 곳에 와 있으니 잘못 맞춘 퍼즐 조각처럼 눈에 띄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듯,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국 게이트의 자동문과 시계에만 번갈아가며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때부터 눈을 가늘게 뜬 채 집중하던 남자는 이내 찾던 사람을 발견한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직전까지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이가 된 것 같은 변화가 일었다. 진심으로 아끼는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자연스레 나올 법한, 온화하고 따뜻한 표정을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해인!”
그에 막 입국장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그 이름의 주인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수많은 인파 속이었지만, 보통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높이 있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이름의 주인에게 있어 별달리 어렵지 않았다.
지중해를 지배했던 위대한 신의 딸, 나아가 현대의 반신, 이해인은 환하게 웃으며 캐리어를 끌고 달려갔다.
“아버지!”
펜스를 지나쳐 곧장 포세이돈의 앞으로 온 해인은 팔을 뻗은 아버지의 품에 익숙하게 안겨 들었다. 포세이돈은 딸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한때는 포세이돈의 자식 수가 과장을 조금 섞어 모래알만큼 많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른 지금, 이해인은 그의 유일한 필멸자 자식이었다.
끝나지 않는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지겨워진 신은 권태에 파묻혀 미쳐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순간의 충동으로 나온 바다 바깥에서 맺게 된 우연한 인연이, 심지어 자식마저 안겨 줄 것이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얻게 된 딸은 그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권태를 느낄 틈 따위는 없었으므로, 그 귀한 자식을 누구보다도 아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캐리어는 이리 주렴. 오랜만에 보는구나. 별일은 없었고?”
포옹을 풀고 포세이돈은 안부를 물었다. 익숙한 듯 짐을 넘기며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냈어요. 어머니도 잘 계시고요.”
“그래?”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흠.”
그 말에 포세이돈은 작게 침음하며 딸을 내려다보았다. 섬세한 얼굴 선 위로 어렵지 않게 딸의 어머니가, 한때 그가 품었던 여성이 겹쳐졌다. 얼굴을 직접 본 지는 제법 되었지만 생김새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녀와 해인이 많이 닮은 탓이었다. 해인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의 색은 포세이돈과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어머니와 상대적으로 더 비슷했다.
‘……여진.’
포세이돈은 새삼스레 딸의 어머니 되는 이의 이름을 곱씹었다.
이여진이라는 이름을 쓰는, 그리고 해인의 어머니라는 역할을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도 가지고 있을 그녀는 젊은 시절 몇 달에 걸쳐 유럽을 여행하던 도중 우연히 만난 잘생긴 남자와 즐거운 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워낙 잘 맞았던 탓에 남은 몇 달의 여행 기간 동안 연락도 몇 번 주고받았다.
그뿐이라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겠으나, 여기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 했던 두 개의 문제점이 따라붙고 말았다.
첫 번째는, 그 잘생긴 남자의 정체가 사람이 아닌 남의 나라 신이었다는 아무도 안 믿을 비밀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여진이 그 신의 자식을 임신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고향도 아닌 땅에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진은 당연하게도 몹시 황망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나긴 고민 끝에 그 존재를 기꺼이 책임지고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대로 피임하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일 뿐 생겨난 아이는 무고했으며, 공교롭게도 그녀는 예전부터 ‘남편은 필요 없지만 자식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종종 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여진에게는 자식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배경과 직업, 능력, 재력이 있었다. 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비롯된 땅을 떠날 수 없는 아이의 아버지와 결혼해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만은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 의사를 들은 포세이돈은 슬프기는 했지만 상대를 존중했다. 불멸자에게 숫자는 별 의미 없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포세이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해인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을 그때 그는 지금보다 무기력한 상태여서 여진처럼 확고한 의지를 지닌 상대를 설득하기가 힘들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사실 여진이 말없이 한국으로 돌아간 뒤 연락을 끊어 버리면 손해인 것은 몇 천 년 만에 얻은 자식을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 포세이돈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법적인 관계는 전혀 없이 그저 해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로만 남았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간혹 안부를 묻고 딸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로 지냈다. 해인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그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의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해인이 살가운 어조로 물었다.
“아버지는 잘 지내셨어요?”
그 말에 포세이돈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그처럼 가정의 형태가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식을 아주 훌륭하게 키워냈다. 실질적으로 여진이 칠할 정도의 역할을 하기는 했어도, 자신 역시 삼할의 역할을 하며 키워 내 잘 자란 자식을 따스하게 내려다본 포세이돈이 천천히 대답했다.
“잘 지냈단다. 널 너무 오래 못 봐서 쓸쓸하긴 했지만.”
“앗…….”
“네가 한국이 더 좋다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지…….”
포세이돈이 짐짓 슬픈 척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미소 지은 해인이 포세이돈의 팔에 팔짱을 끼며 가까이 다가섰다.
해인은 한국에 적을 두고 지냈으므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언제나 방학 때마다 유럽으로 와 포세이돈을 만나고는 했다. 대학에 들어가고도 그 암묵적인 규칙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지난 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낸 뒤, 평소라면 진작 비행기를 탔을 일월부터 삼월까지를 한국에서 보내다 사월이 다 되어서야 그리스로 온 상황이었다. 일 년이라는 일정의 여유가 보장되자 자신도 모르게 여유를 좀 과하게 부려버린 것이다. 지난여름 이후 거의 여덟 달 만에 만나는 것이었으니, 포세이돈이 서운해하는 것도 예상은 했던 바였다.
“한국이랑 그리스 둘 다 좋아요. 음, 그냥, 겨울일 때 한국에 있어 본 적이 없고, 이 시기에 그리스에 있어 본 적도 없으니까 새로운 걸 좀 겪어 보고 싶어서.”
바짝 달라붙은 딸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모습을 보며 포세이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본 적 없던가? 네가 어릴 때는 있었을 텐데?”
“기억 안 나니까 못 본 걸로 할래요. 언제 적이에요, 그게…….”
“이 아버지에게는 엊그제 같단다.”
“저 학교 입학도 안 했을 때가요?”
“나는 무엇이든지 잊지 않으니까. 그땐 네 키가 지금의 반 정도였었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자연스레 공항을 빠져나갔다. 복잡한 인파 사이에서 치일 만도 했지만 걸어가는 길마다 기묘하게도 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공항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였다.
당사자들은 눈치 채지 못 했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두 존재가 비로소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내뱉었다.
“짐도 대신 들어 줘? 저놈이?”
먼저 입을 연 것은 포세이돈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곱슬머리에 커다란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위엄 있는 얼굴 위로 새겨진 것은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한 미소였다.
“뭐, 숙부님이 옛날부터 자식들을 아끼시기는 하셨죠.”
그 곁에 있던 반짝거리는 금발을 가진 수려한 청년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청년이 언급한 숙부님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명백하게도, 청년은 물론이고 곁에서 태연하게 혀를 차는 검은 머리의 남자까지, 그들은 둘 모두 포세이돈과 동일한 불멸을 지닌 존재였다. 동시에 맞지 않는 퍼즐처럼 공항이라는 장소와 선명한 위화감을 자아내던 포세이돈과는 달리, 공항이라는 장소에 제법 자연스레 섞여들 수 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한때 위대한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하늘의 지배자, 천둥과 번개의 신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랬었지. 세월이 지나도 그건 변함이 없군. 저렇게 좋아할 거면 진작 자식 하나 만들든가 하지, 이천 년 넘는 동안 바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기에 아주 돌아 버렸나 했더니.”
여러모로 거침없는 말이었다. 곁의 일행은 이번에는 자연스레 답하지 못했다.
“그…….”
“응? 왜?”
“……아니에요, 아무것도.”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린 여행자들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제 아버지의 말을 머릿속으로나마 반박했다.
‘이제 자식은 만들고 싶으면 만드는 물건 같은 게 아니라니까…….’
속으로 혀를 차며 제우스를 보던 헤르메스는 다음 순간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지금 옆에 있는 건 그래도 신들의 왕이다. 심지어 내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제우스에게 자신의 불순한 생각을 들키지 않는 것에 가까스로 성공을 거뒀다.
***
한편 바다 신과 반신 부녀는 공항을 떠나 항구에 도착하고, 요트에 탑승한 뒤 약 두 시간에 걸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스포라데스 제도로부터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포세이돈 소유의 개인 섬이었다.
해인에게 있어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을 구경하는 것은 이미 어릴 적 수없이 해 본 일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 컸을 때부터는 늘 그랬듯, 이번 그리스 방문의 목적 역시 포세이돈을 만나고 몇 달이나마 평화롭게 휴식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의 별장만큼 괜찮은 곳은 없었다.
섬의 별장에서 해인은 바랐던 대로 평화를 누렸다.
어릴 때부터 종종 들렀던 별장이었기에 어디든 익숙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넓은 서재에는 해인이 어릴 적 읽던 동화책마저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해가 질 때까지 서재에서 시간을 보낸 해인은 저녁식사 후 선착장으로 산책을 나섰다.
해변에서 얕은 바다까지 쭉 연결된 선착장은 실용성보다는 아름다움을 신경 써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주기적으로 공사하는 만큼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나무판자를 이어 밟으며 끝에 도달하자, 마침 수평선 끝에 해가 걸려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구체는 하늘과 바다를 한꺼번에 핏빛으로 물들였다. 흔히 노을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릴 법한 색채보다 훨씬 더 짙고 선명한 빛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색이네.’
해인은 해가 느리게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끝까지 지켜보았다. 눈부시던 붉은 빛은 번져 오는 남색과 섞이며 서서히 흩어졌다. 그 끝에 하늘이 완전히 어둡게 물들었을 때, 해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해를 한참 정면으로 보고 있던 탓인지 눈이 시리고 빛이 번졌다. 눈가를 문지르며 속으로 고개를 저은 해인은,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서야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인상적인 색이었지만 기억에 계속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해인은 노을의 색이 어땠는지 따위는 자연히 잊었고, 어느덧 이른 밤이 되었다.
해인이 일찍 침대에 누워 부스럭거리며 침대 옆 협탁에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포세이돈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익숙하게 침대 맡으로 다가와 앉더니,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해인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이제 어른 된 지도 꽤 지났어요.”
“스물하나밖에 안 되지 않았니? 게다가 네가 몇 살이 되어도 내게는 늘 어린 자식이지.”
포세이돈은 웃으며 해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가볍게 넘겨주었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 것 같긴 하지만, 시차에도 적응해야 할 테고.”
침대 맡에서 일어나며 그가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잘 자거라.”
“네. 내일 아침에 봬요.”
“그래.”
다정한 어조로 답한 뒤 그는 불을 끄고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 별장은 해인이 어릴 적에도 종종 방문했던 곳이었고, 이 방 역시 이전부터 해인이 쓰던 장소였다. 늘 아무 일이 없었으니 수회에 걸쳐 안전함이 증명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포세이돈은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잠든 반신 한 명만이 존재하던 고요하고 어두운 방으로 인영 하나가 스며들듯 나타났다. 그는 소리 없이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 달빛 한 줄기가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양이었지만, 동시에 좀처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비로소 시작이자 끝이로군.”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잠들어 있는 반신의 이마를 스치듯이 짚었다.
“자, 이제 네 운명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또렷한 목소리가 흩어져 방 안을 채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방 안에는 직전까지의 풍경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