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33)화 (133/134)

[외전2.]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가운데로 모시겠습니다.”

뭐야? 피로연 다 끝났는데 왜 또 불러?

사회자 아까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정말 중요한 밤이 남아 있는데 또 춤을 시키려 하다니 매우 쳐야겠어.

잔뜩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옅은 주황빛이었다.

“왜 하늘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올려다본 하늘은 까만 밤빛이 아닌 저녁 노을빛이었다.

옆에 선 나일 역시 하늘을 확인하고 한가득 의문을 품은 얼굴이었다.

“나일, 이거….”

“피로연이 시작할 때로 돌아왔어요.”

우리를 기다리는 사회자와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피로연이 시작되고 사회자가 커플댄스의 순서로 가장 먼저 우리를 불렀을 때, 그 때 그 장면이었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와 나일을 바라보았다.

“일단, 일단 나가요.”

그의 손에 내 손을 얹고서 무대 중앙으로 걸어났다.

가면서 본 여자 들러리 측 테이블엔 파베라와 알렉스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알렉스의 연분홍빛 드레스에서 와인 얼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확실해. 돌아왔어.’

한 번 겪었던 시간을 돌아와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이미 겪었던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나일뿐인가?

추었던 춤을 다시 추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얼굴에 의문을 품은 자는 보이지 않았다.

“피비.”

“네.”

“일단은 티내지 말아요.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이 주위에 있을 게 분명하니까. 우릴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스텝을 밟았다.

한 바퀴 턴을 돌며 주변 인물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우리를 향해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뿐 수상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데….

일단 이 춤이 끝나 사람들의 관심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이 주변을 자세히 둘러봐야지.

누구 짓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내 밤이 오는 걸 막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

‘찾아야 가만 안 두지.’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가운데로 모시겠습니다.”

또다.

또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일과 나는 10번째 이 상황을 반복 중이었다.

피로연이 시작된다.

사회자가 기다렸다는 듯 우릴 호명한다.

나가서 춤을 춘다.

춤이 끝난 후부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

예를 들면 황제 폐하나 도움을 줄만한 지인들에게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럼 지인들은 우릴 돕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밤, 그 후 다시 피로연의 순서였다.

그와 함께 나와 나일을 제외한 모두의 기억은 리셋됐다.

“….”

“….”

사회자의 호명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 춤이라니, 토할 지경이었다.

다행인 건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체력도 리셋된다는 점이었다.

“피비, 춤은 여기까지.”

“네? 아니 그래도.”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내 손을 낚아챈 그가 갑자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나일 어디가요?”

“수영이나 하죠.”

무대로 오지 않고 뒤돌아 뛰기 시작한 황태자 부부를 향해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일은 신난 얼굴로 호수를 향해 뛰었다.

“나일, 아 이건 아니죠오!”

호수 앞에서 대뜸 나를 안아든 그가 풍덩, 망설임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덕분에 물에 빠졌다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얘들아?”

황제 폐하를 포함한 사람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황태자 부부의 이상한 행동에 놀란 수십 개의 눈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기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로연에서 예복 차림으로 갑자기 물에 뛰어든 신랑 신부라니.

물에 쫄딱 젖어 날 바라보는 나일을 보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풉.”

“푸훗, 푸하하하.”

“아, 시원해서 살 것 같네. 멍청이들은 여기 나두고 우리 둘이 수영이나 하죠. 가요.”

놀란 엄마 아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일을 따라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미안.

어차피 조금 지나면 까먹게 될 거야.

그 이후로 우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돌아다녔다.

남들이 우릴 어떻게 보건 몇 시간만 지나면 리셋이었으니까.

뭔가 이 상황을 해결할 작은 실마리라도 찾는다면 애써 볼 텐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헤집고 다녀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피비, 이 남자는 재무대신의 비서관 훙켈 남작이라고 하는데 제가 저주로 힘들어 할 때 저를 대놓고 무시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저주에서 풀려나 번듯한 황태자가 될 줄 몰랐던 거죠.”

“화, 황태자 전하?”

“흐음, 그렇군요.”

네가 그랬던 말이지.

나일은 훙켈 남작 앞에서 마치 그가 없는 것 마냥 얘길 했다.

배가 나오고 이중턱이 두툼한 중년 남성은 그런 나일의 태도에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저, 전하 제가 언제 전하를 감히.”

“남편님, 그렇다면 제가 응징해드리겠습니다. 에잇.”

“으아악.”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남편이 기분이 나빴다잖아악.

나는 그렇지 않아도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는 그의 머리의 한 부분을 쥐고 비틀었다.

손에 가득 움켜진 머리카락이 투두둑 뜯겨 나오는 소리가 살벌했다.

“내, 내…! 머리가악!!!”

한 움큼 뜯겨져 나온 머리카락을 허공에 휘날리자, 훙켈 남작이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보며 울부짖었다.

“나일, 또 누구 뜯어줄까요?”

“정말 제 아내는 든든하군요.”

내 물음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사람들이 좌우로 멀어졌다.

곁에 선 내 남편만이 만족스럽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다음은….”

어딘가로 발걸음을 떼는 나일을 피해 사람들이 우르르 고개를 숙였다.

*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가운데로 모시겠습니다.”

저 말을 도대체 몇 번째 듣는 건지 이제는 감도 잡히질 않았다.

호수 바로 옆 잔디밭 위에 아예 피크닉 매트를 깔고 누운 우리는 노을 지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젠 노을도 지겨웠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당황한 사회자의 목소리와 수근대는 하객들의 웅성거림을 배경음 삼아 눈을 감았다.

그는 내가 편하게 베고 누울 수 있도록 팔을 아래 받혀주었다.

“나일.”

“네.”

“우리 이 상황을 빠져나가지 못 하면 어쩌죠. 그럼 내내 저녁만 보며 살아야 되는 걸까요.”

“두려워요?”

“조금요.”

그가 팔베개로 내어준 팔을 둥글게 말아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가벼이 다독이는 나일의 손이 부드럽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걱정 마세요. 해결할 방법을 더 생각하는 중입니다.”

“….”

실제로도 바삐 머리를 굴리고 있는 중이었겠지만, 그 말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계속 피로연을 반복하며 우리가 놀고 장난만 치진 않았으니까.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마법 아이템을 찾아낼 수 있는 물건을 황제의 개인 서고에서 가져와 이 일대를 수색했다.

그러나 나온 것은 없었다.

피로연이 시작되어 끝나기까지는 약 5시간 남짓.

그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불러와 그들에게 조사를 시킨 적도 있었다.

역시 나온 것은 없었고, 이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를 깰 수 있는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이도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당장 생각나는 모든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지만 소득이라곤 전무했다.

만약에 계속, 언제까지 해결하지 못 하면….

“2세는 못 만들겠네.”

“예?”

“계속 피로연만 하고, 계속 저녁이니까 언제까지 신혼 첫날밤은 오지 않을 거니까… 아.”

속으로 말한다는 걸 그만.

헤헤, 뭐 어때. 결혼도 한 사인데.

나는 머쓱해져 괜한 볼을 긁적였다. 

“헤헤.”

한동안 말이 없던 나일이 입을 열었다.

“오지 않으면 우리가 가면 됩니다. 부인.”

“예?”

그의 팔을 베고 누워 나일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어멋, 저거 뭐얏.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두 분 전하 뭐하십니까.”

“피비, 아니 황태자비 전하.”

로건과 알렉스였다.

“뭐하긴, 결혼 기념 애정행각 중입니다만.”

뻔뻔한 나일의 말에 로건의 미간에 줄이 갔고.

알렉스는 끔찍한 것을 본다는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너네 도대체 왜 이래? 무슨 짓이야? 얌전한 사람들 아니었어? 사람들 뒤에 놀란 거 안 보여? 귀빈들 다 모여 있는데 뭐 하는 거야?”

“….”

로건의 뒤로 남사스럽고 낯뜨거워하는 하객들이 여럿 보였다.

로건의 입장에서야 우리가 이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설명하기도 지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친구야.”

내게서 팔을 부드럽게 빼낸 나일이 몸을 일으켰다.

“가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나도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간다는 거야?”

“귀빈들을 배려해주려고.”

“야 나일, 피비!”

“아참.”

내 손을 잡아끌고 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로건을 돌아보았다.

“너 들러리로 불리면 춤 빼지 마라. 일부러 와인 쏟지도 말고.”

“무슨 소리야, 야 나일!”

*

피로연장을 뒤로 하고 뛰어온 곳은 우리가 첫날밤을 보내기로 예정된 곳이었다.

새로 탄생한 황태자 부부의 침실인 만큼 방문이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장식을 뽐냈다.

그가 시종을 협박해 빼앗은 룸 열쇠를 넣고 돌렸다.

-끼익.

열리는 방문 틈사이로 침실 내부가 보였다.

“왜 굳었어요.”

“아니 그게 저기 그니까… 아직 낮이고, 우리는 큰 문제를 해결도 못 했는데. 이런 거는….”

“이미 시도해 볼 건 시도해 봤잖아요. 다른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요.”

“….”

와, 나는 이제 결혼도 한 사이니까 자연스럽게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막상 닥치니까 그렇지가 않네?

안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 말이지.

뒤를 보니 아직도 노을이 붉었다.

수위를 전체에서 갑자기 19금으로 올리기에는 너무 밝고 붉은 거지 하늘이.

“나일 그러니까 나는….”

“엄마, 아빠.”

“??”

“???”

들려온 어린 남자아이의 미성에 그도 나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침실에서 멀지 않은 복도 끝에 처음 보는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엄마, 아빠.”

“???”

“어디가?”

“???”

“나 만들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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