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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32)화 (132/134)

[외전 1]

길고 길었던 교황 성하의 주례가 끝나고, 이제 막 부부가 된 신랑 신부가 입맞춤을 할 차례였다.

나일이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닿자마자 떨어지는 싱그럽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살짝 높은 눈높이에서 그가 행복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행복감이 차오른 나일의 까만 눈동자 뒤로, 막 탄생한 동제국의 황태자와 황태자비 부부를 향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 잘생긴 내 남편.

나도 미소 짓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주었다.

“황태자 부부의 퇴장이 이어지겠습니다.”

우리의 퇴장을 알리는 사회자의 말에 식장 내의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드디어 끝났다.’

서 있느라 죽는 줄 알았네.

많은 하객들의 시선 속에서, 길고 긴 주례사를 서서 견디는 일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끝이다, 끝!

이제 돌아서서 버진로드를 걸어 나가기만 하면 정말로 결혼식은 끝이었다.

나일이 내미는 손을 잡고 돌아섰다.

“와아! 새로운 황태자, 황태자비 만세!”

-펑펑.

양옆으로 폭죽이 터지고 화동들이 뿌리는 꽃잎이 흩날렸다.

“황태자 부부 만세!”

우리의 행복을 기원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부부라니.

아, 그래. 이제 이 말을 어색해하면 안 되겠구나.

진짜 부부인걸.

“부부….”

작게 부부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부부라는 말이 이렇게 입술을 쭉 빼서 발음해야 하는 단어였구나.

“왜요?”

“아, 그게….”

작게 발음하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버진로드 중간쯤을 걸으며 나일이 물었다.

“우리가 이제 진짜 부부구나 싶어서.”

“….”

“부부, 부부라는 말 귀엽지 않아요? 이렇게 입술을 오리처럼 쭉 빼서 발음해야 하잖아요. 부부.”

“….”

“근데 우리가 부부라니, 덩달아 우리도 뭔가 귀여워진 것 같….”

그 순간, 계속 이어지던 박수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찰나의 적막 후, 결혼식장을 뒤흔들 만큼 더 커져버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버진로드 중간에 멈춰 서서 진한 입맞춤을 시전 한 황족 부부 때문이었다.

‘아까 했잖아?’

분명 결혼식의 종지부를 찍는 신랑 신부의 입맞춤은 아까 했는데, 왜 또.

나일이 하객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 얼굴을 거머쥐었다.

자꾸만 위에서 아래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아까의 예의 바르고 수줍은 입맞춤을 했던 내 남편은 어디 가고 다른 놈이 내 남편이랍시고 와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툭.

가까이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한쪽 눈을 살짝 떴더니, 꽃잎을 뿌리며 따라오던 화동이 꽃바구니를 바닥에 떨구고 커다래진 눈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적당히 좀… 숨 막혀.’

나일의 가슴을 몇 번 콩콩 두드리길 반복한 후에야 그가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가 휘청이는 나를 재빨리 품에 안아들었다.

“미쳤어요? 왜 그래요?”

안겨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신부 부모석에 서 있는 엄마 아빠의 눈이 화동의 눈이랑 똑같았다.

나 민망해 죽어.

“엄마 아빠 다 보는데!”

“두 분도 다 이해하실 겁니다.”

그의 품 안에서 속삭이듯 물었지만 나일은 대답 대신 딴소리를 해댔다.

“전 죄가 없습니다. 빨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죠.”

그가 남은 버진로드를 나를 안고 뛰어나갔다.

*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

“큭.”

옆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춤추는 하객들을 바라보는 나일을 보다 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그는 어서 둘만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황족의 결혼식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끝내고 우리는, 멀리서 온 우리의 하객들을 위한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고위급 인사들을 빼고는 잠깐 얼굴만 비추는 게 다였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야지.

입에 경련이 일만큼 하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었고, 마지막으로 피로연만이 남아있었다.

본궁 호수 옆에서 열리는 피로연은 황족의 결혼식 피로연답게 호화로웠다.

붉게 노을 지는 하늘을 꼭 닮은 호수 위로 수만 가지 조명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물에 비친 조명들이 아직 뜨지 않은 별들처럼 아름다웠다.

모두가 즐겁고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입이 불퉁하게 나온 내 남편만 빼면.

“나일.” 

“….”

“저기 봐 봐요. 우리가 빠졌던 곳, 기억나요?”

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그가 고개를 돌렸다.

피로연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충동적으로 몸을 날렸던 호수, 그 장소였다.

“어떻게 잊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멍청이처럼 운 날인데.”

물끄러미 호수로 시선을 던지던 나일이 제 이마를 쓸어 넘겼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그가 미간에 세로줄을 세우며 인상을 찡그렸다.

“에? 멍청이라뇨. 너무 예쁘게 울어서 역시 이 남자다! 라고 생각한 날인데.”

“고작 그걸로?”

“고작이라니, 엄청 큰 건데. 막 눈물 콧물을 이렇게 왕왕 흘리면서 우는데 어찌나 보호본능을 일으키던지.”

처연하게 울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일부러 더 아득한 표정을 짓자, 나일은 정말 질색팔색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다 여기는지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쿡쿡거리며 한참을 재밌어 했다.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입니다. 부인.”

“….”

부인.

이제 자연스럽게 부인이라 부르는구나.

나도 어서 새로운 호칭으로 그를 부를 줄 알아야 하는데 영 부끄럽고 민망해 입에 잘 붙질 않았다.

“먼저 울려놓고 울었다고 놀리다니 너무하잖아요.”

“그게 내 잘못인가? 운 사람이 잘못이지.”

“그러니까 부인도 웁시다.”

“네?”

“오늘 밤에.”

“….”

처음엔 뜻을 이해하지 못 해 어리둥절해 있다가, 더 빨개져버린 그의 귀를 보고나서야 뜻을 알아차렸다.

“어머 미쳤나봐.”

“….”

결혼식 후 첫날밤에 울리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그의 눈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숙이자 나일도 자기가 말 해놓고 민망했는지 따라서 고개를 내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오른발로 그의 왼쪽 구두를 툭 쳤다.

“내 남편이 이런 저질 농담을 하는 걸 듣게 되다니.”

“어허 저질이라고 하다뇨, 남편한테.”

“그럼 왜 같이 빨개지는 건데요.”

“….”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계속 뭐라고 하면 더 민망하겠지.

여기서 대충 받아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귀가 터질 것 같았다.

“크흡, 큭, 흠흠… 기대, 기대가 되… 네요. 남편님.”

“그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부인. 큭큭.”

결국은 그도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는 그 얼굴이 귀여워 쳐다보다 하객들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엄마 아빠를 바라보았다.

피로연을 맡은 사회자는 제일 먼저 우리를 불러 춤을 시켰고, 그 다음은 황제와 황후, 지금은 엄마와 아빠 차례였다.

춤을 꽤 잘 추시네.

멋쩍은 듯 처음엔 좀 주뼛거리던 아빠는, 엄마의 리드에 따라 이제는 부드럽게 스텝을 밟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고 자리로 돌아가자, 사회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타자를 외쳤다.

“다음은 황태자 전하 측 들러리 한 분과 황태자비 전하 측 들러리 한 분께서 춤을 추시겠습니다.”

엥.

나일의 들러리면 로건을 포함한 귀족 영식이 여럿이었고 내 들러리는 딱 둘이었다.

파베라와 알렉스.

알렉스가 귀족 영식과 춤을 추는 건 상상이 안 가니 당연히 파베라가 나오겠지 싶어서 그녀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테이블엔 파베라가 없었다.

연분홍빛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한 떨기 은방울꽃처럼 청초하게 앉아 있던 사람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민트색 머리였다.

막 와인잔을 기울이던 알렉스는 놀라서 마시던 와인도 채 삼키지 못 하고 굳어 버렸다.

“어떡해.”

너무 재밌는 걸 보겠는데?

이제 알렉스가 뭐 씹은 표정으로 아무개 영식과 춤추는 걸 보게 되는 건가?

근데 쟤가 순순히 일어나려나?

역시나 알렉스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자기 대신 춤추러 나가 줄 파베라를 찾는 모양인데,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근처에 빨간 머리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테이블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황태자 전하 측 들러리 중 나와서 추실 분은….”

사회자가 춤 출 사람을 호명하려는 듯, 들러리를 섰던 귀족 영식들이 모인 자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때, 한 곳에 우르르 몰려있던 남자들이 좌우로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남자들이 비켜나 휑해진 테이블엔 로건이 홀로 앉아있었다.

그는 딴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이 상황을 모르는 얼굴로 사회자를 쳐다봤다.

누군가 그런 로건의 귓가에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풉.”

뭔가 마시고 있었다면 분명 뿜었을 거다.

여장한 알렉스와 로건 커플의 춤을 보게 되는 건가?

이건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장면이다.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간다.’

다른 영식들이 합심해 그를 지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로건이 터벅터벅 알렉스를 향해 걸었다.

제게 다가오는 로건을 보는 알렉스의 표정이 정말 볼만했다.

저승사자를 보는 눈빛이랄까.

물론 알렉스에게 다가가는 로건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 잡으러 가는 처형인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둘 다 저 얼굴로 춤을 출 생각인가?’

속에서 기대치가 쑥쑥 자랐다.

어서 둘이 끔찍이 싫다는 얼굴로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췄으면!

“이런, 미안하게 됐군. 알레나 영애.”

“앗.”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것은 사회자의 탄식이었다.

알렉스에게 다가간 로건은 실수인 척 연기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가 알렉스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손으로 툭 쳤다.

그러자 로건과 알렉스 사이로 떨어진 와인장이 와장창 깨지며 붉은 와인이 주변으로 튀었다.

둘의 의상이 와인으로 얼룩덜룩했다.

“아, 이거 두 분의 의상이 더러워져서 춤을 부탁드리긴 무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로건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실수로 잔을 깨트려서 어쩔 수 없다는 제스쳐였지만 그걸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뻔뻔한 놈.

옷을 갈아입으러 일어나는 알렉스는 대놓고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아쉽구만 아쉬워.

좋은 구경을 놓쳤어!

그래도 피로연은 마냥 즐거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친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으니까.

어느새 저녁이 훌쩍 지나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연의 예정 마감이 시간이 훌쩍 지나 모두들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

나는 내게 손을 내미는 나일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흐흐 드디어 밤인가?

그때, 이상하게도 이미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떠났을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가운데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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