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에필로그
동제국 황실로 귀환한 지도 어느덧 3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엉망이 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기에 3개월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고, 때문에 지난 3개월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으아.”
아무도 없는 빈 건물 정원 한가운데에 홀로 앉아 기지개를 켰다.
현재는 아무도 머물지 않는 옛 황자궁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 이거지, 내가 원했던 건 이 조용함이라구.
“오늘의 주인공께서 혼자 도망 나와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입구에서 익숙한 은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찾아.”
로건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좀 봐줘요. 어차피 곧 끌려갈 예정인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오늘은 동제국의 새로운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많은 이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날이니까.
나일은 어제 황태자 자리에 올랐고, 오늘은 어제 갓 황태자가 된 그의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내 결혼식이기도 했고.
“시녀들이 화가 단단히 났던데.”
마지막 웨딩드레스 피팅을 앞두고 시녀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몰래 숨어 있는 나를, 로건은 약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웨딩드레스 피딩 한 번 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아요? 최고의 드레스 핏을 뽐내야 한다나 뭐라나. 드레스가 완성됐을 때부터 피팅만 대여섯 번 한 거 같아요. 그리고 오늘 또 한다는 거죠. 내 몸무게가 무슨 고무줄인 줄 아나 봐요. 맨날 입어봐야 똑같은데 뭘 자꾸, 아… 그만, 그만.”
지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옆에 앉은 그에게서 은은한 미소가 올라왔다.
결혼식이 시작되기까지는 2시간쯤 남았으니, 로건 역시 아직은 편안한 셔츠 차림이었다.
“나일은요?”
“바빠서 혼이 나간 것 같던데. 아마 나일이 식장 안으로 들어섰을 땐 빈껍데기만 남았을 수도 있어.”
“풋.”
실없는 그의 농담에 작은 웃음을 터트리자, 로건 역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을바람을 타고 나는 새들의 날갯짓만이 간간이 적막을 채웠다.
나는 로건이 앉아 있는 왼편으로 고개를 틀었다.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편안해 보여 좋았다.
나 역시 편안했으니까.
무서워했던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진 우리의 관계에 만족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기분이 어때.”
톡, 톡, 톡 의자 손잡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던 그가 말을 꺼냈다.
기분이라….
“두근두근 이랄까.”
“두근두근? 설렌다고?”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기분이에요, 그냥.”
“그렇군.”
참새 몇 마리가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 곁으로 날아와 앉았다.
로건의 시선은 어느새 그 참새들에게 가 있었다.
“나도 그래.”
“뭐가요?”
“기분이 이상하다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는 로건의 표정에 나는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니 님이 왜 기분이 이상하세요. 신랑신부세요?
그러나 입을 비죽거리는 그의 표정에서 사뭇 진지함이 느껴져 나는 황당함을 감추고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친구가 먼저 결혼을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
로건은 여전히 정원 바닥을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는 참새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 거겠지?”
대답과 함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 눈동자가 가을의 하늘색을 닮아 있었다.
마냥 무섭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저 눈동자가 차갑게만 보였는데, 이제는 가을 하늘색으로 보이네.
“그렇게 생각해야지.”
“….”
그런 거야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해야지는 뭐야.
“어차피 로건도 곧 결혼해야 하잖아요. 공작가의 대를 이으려면.”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선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떨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 같은 사람이 생기면.”
“네?”
“나일한테 너 같은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이잖아. 내게도 그런 사람이 생기면 한다는 소리야.”
“아.”
말을 오해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성격이 그래서 과연 생기려나.”
나는 구두 끝으로 땅을 톡톡 차며 농담을 쳤다.
그리곤 곧 들려올 그다운 거만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게.”
“…?”
“왜 그렇게 예상외라는 듯 보는데?”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라 성깔 죽여주는 건가?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요.”
대답하려 벌어지던 그의 입이 다물렸다.
건물 너머 우르르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들리는 소리가 황태자비님은 어디에 있나 였다.
그쪽을 바라보던 로건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맞아. 그리고 이제 주인공은 주인공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네.”
“아 안 돼요. 조금만 더 늦장 부릴래요.”
“안 되긴. 나도 예복으로 갈아입으려면 지금 가야 해.”
“네, 그럼 결혼식장에서 봐….”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가자. 너 걸으면 안 되니까 시녀들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가야겠다.”
왜 내가 걸으면 안 돼?
동제국 신부는 결혼식 날 걸으면 안 된다는 미신이라도 있어?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의미로 빤히 바라보자, 날 내려다보던 로건이 눈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너 저거 웨딩슈즈 아냐?”
“아, 맞네.”
내 발끝에는 하얀 실크에 화려한 보석이 더해진 웨딩슈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 그러네, 나 아까 몰래 도망쳐 나올 때 구두를 안 갈아 신고 나왔었지 참.
시녀들이 피팅 할 웨딩드레스를 가지러 안쪽으로 들어간 사이, 구두를 갈아 신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신고 나온 것이었다.
“여벌 구두 있어?”
“있을 리가?”
“카펫 위를 더러워진 웨딩슈즈로 장식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대로 안겨서 가.”
“….”
머쓱한 표정으로 조용히 품에 안겨 있자, 로건은 나를 안아 든 채로 걷기 시작했다.
옛 황자궁을 나와 본궁 쪽으로 향하자, 조금씩 사람들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섞여 들었다.
터벅터벅 걸어 나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
“다 왔어요?”
“나….”
“어머 전하!”
로건이 뭔갈 말하려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녀들의 고함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결혼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황태자비로 불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저놈의 전하 소리는 들을 때마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전하 정말, 지금 식까지 시간이… 아니지, 말하고 있을 시간도 없네. 일단 가세요. 가셔야 합니다.”
로건의 품에서 나를 끄집어내린 그녀들은, 로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나를 잡아당겼다.
시녀들에게 끌려가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로건, 방금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아무리 보아도 할 말이 진득하게 있는 표정을 해놓고서 아니라고?
찜찜한 기분에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았다.
길 한복판에 멀거니 서서 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어서 가라는 손짓으로 손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왜 슬픈 표정을 짓고 그래, 이제 끌려가서 고생할 건 난데.’
뭐, 식 끝나고 물어보면 되겠지.
거센 힘으로 팔뚝을 잡아끄는 시녀들을 따라 나는 발을 옮겼다.
*
시끌시끌했던 신부대기실은 금세 사람들이 빠져나가, 신부인 나와 신부 측 들러리인 파베라만이 남아있었다.
벽 너머로 사회를 맡은 교황 성하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신부 입장의 순서.
대성당의 중앙홀과 연결된 신부대기실의 커다란 문 앞에 서자, 긴장감으로 목이 뻣뻣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1층과 2층에 대륙에서 초청받아 온 고위인사들이 가득 들어차 있겠지.
긴장을 풀기 위해 목을 돌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넸다.
“너무 세게 돌리면 베일 모양 잡아놓은 거 틀어진다.”
“알렉스?”
뒤엔, 내 베일을 소중히 두 손에 쥔 알렉스가 손에 반지를 낀 채로 파베라와 같은 들러리 드레스를 맞춰 입고 서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알레나라고 불러야 하나.
“들러리 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남자 쪽에 서는 거 아녔어?”
“내가 황태자 친구냐, 네 친구지. 근데 들러리는 동성만 된다길래, 후….”
“내가 불렀어. 6미터나 되는 베일은 적어도 둘이 들어야 하지 않겠니.”
알렉스의 옆에 똑같은 자세로 베일을 쥐고 선 파베라가 말했다.
연한 분홍빛으로 맞춘 들러리 드레스가 둘 모두에게 보기 좋게 잘 어울렸다.
빤히 바라보자, 오랜만의 여장이 무안했는지 알렉스는 볼을 붉혔다.
“왜 얼굴은 붉히고 그래, 잘 어울리는데.”
“망할 놈의 반지, 오늘 쓰고 나면 버릴 거야.”
반응이 재밌어서 킬킬거리는데, 문 너머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릴 테니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문이 열리기 전, 알렉스가 슬쩍 귓가로 다가왔다.
“마음 변하면 언제든지야, 고민 안 해도 돼.”
“너 지금 황태자비한테 추파 던지는 거야? 그러다 정말 감옥에 끌려가도 나 너 못 구해준다.”
알렉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때마침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리자, 문틈으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센 빛에 눈을 찌푸렸던 나는, 살짝 몸을 휘청였다.
금빛과 붉은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중앙홀은 가운데 길만을 비워둔 채였다.
꽉꽉 들어찬 양옆의 1층과 2층의 하객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침착하자, 침착해.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면 되는 거야.’
대성당이라지만 짧은 길인데.
고급스러운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이 멀게만 보였다.
입장한 신부가 멈춰 있자, 조금씩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피비?”
뒤에서 걱정스러운 알렉스의 물음이 들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발을 뗐다.
‘아….’
방금까지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가.
겨우 한 발을 뗐지만 그 이상 앞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었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나일이 기다릴 텐데.’
눈부신 조명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찾아 눈을 가늘게 좁혔지만, 나일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교황만이 침착한 표정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결혼식을 위해 빌론에서 동제국 황실까지 온 엄마와 아빠, 오빠.
그리고 황제와 황후, 로건까지.
‘뭐야, 다 있는데 내 신랑은 어디에….’
“피비.”
옆을 보니 까만 예복을 잘 차려입은 나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와, 내 신랑이다.”
“무슨 일이에요?”
“긴장해서 다리가 안 움직여져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자켓을 손으로 쥐자, 나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진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놀라서 뛰어왔잖아요. 또 어디로 붕 떠서 사라지는 줄 알았네.”
“끔찍한 말 말아요.”
내밀어 오는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자, 그가 웃으며 날 내려 보았다.
“같이 걸어 들어가죠. 이게 더 좋네.”
나일의 팔에 기대 두 걸음쯤 걸어 나가다가 우뚝 멈췄다.
그가 갑자기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멈춰 선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우리 언제나 함께 같이 걷는 거예요.”
“….”
“싫으면 지금 도망쳐요. 나중엔 기회 없으니까.”
나는 그의 팔 안쪽으로 집어넣은 손으로 나일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못 도망가요. 혼자서는 다리가 안 움직여진다니까요.”
“그럴 줄 알아서.”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춰왔다.
여기저기서 곧 탄생할 한 쌍의 부부를 보며 환호를 보냈다.
나일의 팔을 꼭 잡고서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갈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