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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30)화 (130/134)

130화

방 안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여름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공기가 차갑기도 했다. 

피비는 방 한구석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

“….”

나일도, 로건도 선뜻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 했다.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을 때, 어쩌면 대답을 듣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일이 점점 빨라지는 제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낄 때쯤, 로건이 먼저 움직였다.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피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뭐해, 일어나.”

“….”

“네가 계속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왔잖아.”

“….”

웅크린 여자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자, 두 남자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피비의 어깨 위에 올린 로건의 손이 조금씩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나일은 여전히 말을 잃은 채, 피비의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서 나일이 물었다.

나일의 물음에 로건은 그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왜, 그게… 그러니까, 얘가 말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던 로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의 시선이 피비가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물건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건이 그것을 조심히 꺼내든 순간, 피비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일의 까만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건 그때였다.

“….”

땅으로 꺼지듯 주저앉아버렸던 그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엉금엉금 피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가온 나일이 피비를 제 무릎 위로 올렸다.

“피비, 일어나요.”

“….”

“피비, 피비, 일어나.”

“….”

얼이 빠진 표정으로 피비를 안고 흔드는 제 친구를 바라보던 로건은 제 손안에 들린 성물로 시선을 옮겼다.

성물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한 성물은 색이 달라져 한동안 쓸 수 없게 되었다가,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때쯤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결국 저 여자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저주를 푼 거구나.

나일도, 리베르 황족도 더 이상 저주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거야 이제.

이건 내가 원했던 상황인데,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거지 같냐.’

내가 왜 이러지.

성물 위로 똑똑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로건은 무심결에 제 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

이걸 바란 건 아닌데.

결국 언제부턴가 나는 저 여자가 살기를 바랐구나.

저 여자가 그만 아파하고 행복하게 웃기를 나는, 바랐는데.

“멍청하게 뭐 하는 거지. 가자.”

갑작스러운 나일의 목소리에 로건이 고개를 들었다.

피비를 품에 안아 들고 일어선 그가 방 입구 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어딜 간다는 거야, 정신 차려.”

새파랗게 얼어버린 친구의 얼굴에 놀라 로건이 손을 뻗자.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지. 멍청하게 시간만 버리고 있잖아 지금.”

“나일, 피비는 이제….”

상황을 자각하지 못 한 건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

나일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로건의 손을 쳐냈다.

“손대지 마.”

“….”

친구의 귀신같은 표정을 본 로건이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

피비, 피비.

누군가 내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운 목소리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그 목소리가 나일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이건 꿈이거나 천당 가는 길에 해주는 서비스 정도일 텐데.

그래도 좋아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건 역시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치켜드니 하늘이 드높고 푸르렀다.

위로는 깨끗한 하늘이, 사방으로는 너른 연둣빛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처음 와 본 장소인데 이상하게 낯설지는 않았다.

부는 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나는 긴 머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목덜미를 식히는 바람이 정말이지 기분 좋았다.

‘응?’

방금 누군가 날 부른 것 같은데.

누구였지, 나일의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넓은 벌판엔 다른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작은 목소리가 열심히 나를 부르는 걸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높게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를 부르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걸 손에 쥐고 있었지?

그것은 은은한 빛을 발하는 에메랄드빛 보석이었다.

‘어? 이거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였지, 언제였더라?

파베라가 만들어 주었던 보석 중에 이런 게 있었던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보석이 말을 건네 왔다.

뭐랄까 그건 말을 건넨다기보다 머릿속에 음성이 울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뭐라구? 잘 안 들려. 크게 말해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웅얼거리긴 하는데 알아듣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나는 보석을 들어 올려 눈 가까이에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슬쩍 보기엔 속이 투명한 초록빛 보석인데, 그 안이 까맣고 까맸다.

그리고 새카만 그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까만 우주에 홀로 빛나는 별처럼, 빛은 외로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이제 보니까 그거네. 파베라가 처음 만날 날 나한테 줬던 그거.”

보석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처음 보았던 연탄 빛깔은 분명 사라졌는데, 이걸 깨끗해졌다고 봐야 하나?

그렇다고 하기엔 보석의 안이 오히려 예전보다도 까맣게 변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내 안에 있으면서 한 번도 말 걸거나 한 적 없잖아.”

“….”

뭐라고 대답을 해주긴 하는데, 외계어처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쁜 말이나 욕은 아닌 것 같았다랄까, 느낌상 말이지.

“어쨌거나 이제 나는 정말 모두랑 안녕이네.”

이 꿈이 끝나고 나면 나는 사라지겠지만, 결과를 다 알면서 한 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외계어만 지껄여대는 보석이랑 나누는 대화도 이쯤에서 끝내볼까.

이제 슬슬 가야 할 것 같으니까.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 보석을 집어넣으려는데,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이 더 커지는 게 아닌가.

“안 통하는 대화는 사절이라니까… 뭐?”

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이 저거였다.

가라니.

“네가 가라고 안 해도 어차피 가야 해. 그렇지 않아도 혼자 가는 길이라 쓸쓸한데 너무하네.”

라고 보석의 말을 받아친 순간, 내가 있던 공간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

눈을 감았다 떴을 땐, 강렬한 빛 때문에 하얗게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손대지 마.”

다시 들려온 나일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가까웠다.

바로 머리 위라고 느껴질 만큼.

고개를 들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이 없는 건 좀 아쉬웠지만 내내 그리웠던 얼굴이 아닌가.

시야에 그가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눈을 찔렀다.

“아야.”

“….”

“….”

눈을 몇 번 깜빡여 이물질을 빼내고 나자, 방금 전까진 없었던 둘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대충 내가 눈을 뜨기 전까지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당황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 않을까, 내가 좀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웃어야지.

어색할 땐 웃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으니까.

“짜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살아있었습니다!”

“….”

“….”

뭐든 좋으니까 반응이란 걸 좀 해주면 좋겠는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외쳤지만 둘은 반응이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설명을 차근히 덧붙여야겠지?

“저기, 그게 그러니까요….”

설명 중에 시야가 확 가라앉았다.

나를 안은 남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품에 안고, 쪼그려 앉은 채로, 얼굴을 내게 묻은 채 나일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바르르 떠는 작은 머리를 끌어안았다.

“너 정말….”

위에서 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둘 다 내가 돌아와서 기뻐하고 있는 거죠? 그럴 줄 알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역시 너무 고맙고 그런데.”

“….”

“….”

“우리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점점 늘어나는데?

천장을 올려다보자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녹색 줄기들이 보였다.

파베라가 와 있구나.

“지금 너무 슬펐다가 다시 너무 기뻐서 정신이 없는 건 알겠는데, 나가서 다 설명해 줄게요. 돌가루가 너무 떨어진다.”

그러자, 나일이 먼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일이 엉망이 된 얼굴로, 뒤돌아 서 있는 로건을 불렀다.

“가자.”

우리는 붉은 문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앞서 나가는 나일을 뒤따라오는 로건의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구조물을 빠르게 빠져 나가느라, 나일은 앞만 주시하며 달려 나가고 있었다.

나 살았어! 라고 덤덤히 말했지만 사실은 지금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살아있는 나도, 눈앞의 남자도.

흔들리는 품 안에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

그는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날 보지 않았다.

말을 걸어볼까, 그 날 수도에 테러가 일어났던 날, 혹시 내가 한 말 때문에 오해하고 있다면….

“있잖아요, 나일.”

“….”

로건에게 설명을 좀 들었나?

아무 설명도 듣지 못 한 상태라면, 그가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걸로 오해하고 있으면 어쩌지.

아니 오해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혹여 그 날 내 말에 상처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사과부터 해야 하나, 설명부터 해야 하나.

하지만 복잡해져만 가는 내 머리에서 나온 말은 사과도 설명도 아니었다.

“보고 싶었어요.”

“….”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앞을 바라보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나를 내려다보지는 않아서 조바심이 났다.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차근히 설명하면 이해해 주겠지.

나는 조바심 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재빨리 그간의 상황을 설명할 단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가볍게 남자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더 보고 싶었어요.”

“근데 왜 나 안 봐요?”

그러자 나일은 힐끗 나를 보더니 다시 시선을 뗐다.

“울 것 같아서.”

“….”

“잘했어요. 설명은 필요 없어요.”

“….”

“살아있으면 그걸로 된 거니까.”

말을 마친 나일이 휙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 입구야, 뒤처지지 마라.”

나일의 어깨너머로, 열심히 우리 뒤를 쫓아오는 로건을 쳐다보았다.

그가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뭔 표정이래.’

나일의 말대로 조금 더 달려 나가니 바다를 향해 나 있는 입구가 보였다.

나일의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서 달려오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베라가 보이고, 아. 살아 있었구나, 알렉스.

나 살아서 잘 돌아왔어요.

나는 그들을 향해서 팔을 흔들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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