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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9)화 (129/134)

129화

지하 연구 시설의 입구 중 하나는 파도가 치는 절벽을 향해 뚫려 있었다.

정신을 잃은 황녀를 안아 든 2황자와 그의 부하들이 입구를 향해 바삐 발을 옮겼다.

등 뒤로 펑 하는 폭발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연구 시설을 받치고 있던 기둥 몇 개가 사라졌을 테니, 나머지 기둥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할 테고, 그들이 여유롭게 지하를 다 빠져 나갔을 때쯤이면 연구 시설은 별궁과 함께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망할 것들, 실험체들과 함께 영영 땅속에 파묻혀 버리라지.

계집과 동제국 놈을 직접 손보지 못 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오는 정신을 잃은 황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걸음에 더 속도를 붙였다.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지만 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정박한 배 위에서 횃불을 들고 자신을 반기는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화물선으로 위장한 작은 군함 위에서 부하들이 사다리를 내렸다.

황녀부터 배에 올리고 테오가 잇달아 배에 승선했다.

“테나가 어깨를 다쳤다.”

테오의 말에,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부하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황녀의 어깨 위로 쏘아지는 신성력을 확인한 후에야, 테오는 잠시 참았던 한숨을 돌렸다. 

“정체 모를 배 한 척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어디냐.”

분명 그러한 보고를 들었는데, 주위를 얼핏 둘러보았을 땐 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부하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테오는 흠칫 놀랐다.

밤바다의 짙은 어둠 위로, 튀어나온 절벽에 반쯤 가려졌지만 분명 배 한 척이 있었다.

그가 눈을 작게 찌푸려 배를 길게 응시했다.

배는 유령선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이 어둠 속에서, 저 배가 사람이 탄 배가 맞다면 횃불 한두 개 정도는 흔들리고 있어야 했다.

헌데 저 어둠은 뭐란 말인가.

“계속 저 상태인가? 정찰은?”

“항해하는 동안 주위에 배는커녕 갈매기 한 마리를 보지 못 했는데, 무슨 유령선도 아니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다들 정찰가기를 꺼리는 바람에 아직….”

“….”

평소라면 밥값 못하는 놈들이라며 불같이 화를 냈을 그였지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순간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저 배 역시, 우리와 마찰을 빚기 싫은 마음에 조용히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며 테오는 배에서 시선을 뗐다.

쓸데없는 곳에 쓸 시간이 지금의 그에겐 없었다.

“폐하의 배라기엔 너무 초라하군. 그분이 배로 날 추격할 리도 없고. 폐하만 아니면 상관없다. 괜히 시간 끌 필요 없어. 닻을 올려라.”

한시바삐 이곳을 떠 새 정착지에 도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의 명령에 부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대에서 내려오는 흰 돛을 보며 그가 동생에게로 몸을 돌렸다.

“테나는.”

“상처는 잘 아물고 있습니다만, 아직 깨어나진 못 하고 계십니다.”

황녀의 감긴 눈을 보며 테오가 입술을 짓씹었다.

“옆에 있던 놈이 로건 후페이일 줄이야.”

“….”

험악해지는 상관의 표정을 보며, 좀 전의 일을 아는 부하도 모르는 부하도 주위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모든 소리가 어둠에 삼켜진 것처럼 정적이 인 순간이었다.

- 푹

“….”

황녀에게 신성력을 쏟아 붓던 부하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제 옆에 서서 황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2황자의 허리가 앞으로 푹 고꾸라진 모습을 부하는 멍청히 쳐다보았다.

테오 세리에가 왈칵 붉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화, 화, 황자 전….”

“다시 말해 봐.”

“….”

“누구라고? 로건 후페이라고 했나 방금?”

테오는 제 등 뒤에 붙어서 자신의 귓가에 대고 말을 속삭이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일 리베르였다.

“네 놈을 추적해 오면 둘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말해, 둘은 어디 있지.”

자신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은 주제에, 둘의 행방을 말하라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달고 부드러웠다.

그가 대답이 없자, 나일은 상대의 등에 박아 넣은 칼의 손잡이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악!!”

“….”

비명과 함께 2황자가 토해낸 피가 그 앞에 있던 황녀의 몸을 적셨다.

신성력을 쓰던 부하는 더 이상 황녀를 치료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얼굴로 2황자의 등 뒤에서 나타난 남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 나일의 얼굴이 2황자의 어깨 위에서 매력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 날, 그 방에서 널 죽이지 않은 걸 내내 후회했다. 하지만 네 놈이 내가 찾는 둘의 행방을 말해준다면 계속 후회만 하며 살아갈 수도 있어.”

“….”

“로건 후페이와 여자가 함께 있었을 거다. 어디야.”

자신들의 상관이 눈앞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지만, 테오의 부하 중 어느 누구도 섣부르게 나서지 못 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 옆으로, 공간이 위아래로 찢어지며 낯선 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말하면, 살려 주냐.”

“둘이 어떤 상태인지 봐서.”

“둘은….”

“살려 주겠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일은 밀어 넣었던 칼날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2황자의 등을 걷어찼다.

그리고 곧바로 쓰러진 2황자의 급소에 다시 칼날을 꽂자, 사위가 죽은 듯 잠잠해졌다.

“….”

“으, 으아아아!”

상관의 죽음을 목격한 부하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곧,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허공을 손바닥으로 짚어댔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때, 나일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알렉스가 옆으로 목을 뺐다.

쓰러진 2황자의 모습을 보던 그가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속닥였다.

“마무리는 좀 나눠서 하자니까.”

“….”

알렉스가 가둔 공간 안에서 2황자의 부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태였다.

그들을 보며, 알렉스 옆에 서 있던 파베라가 녹색 줄기를 뻗쳤다.

이제 부하들은 녹색 줄기에 허리가 감겨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꼴이었다.

허공에서 질러대던 그들의 비명은 나일이 입을 열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질문을 받은 놈이 죽었으니 다시 묻겠다.”

“….”

“로건 후페이와 여자는 어디에 있지.”

상관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나일이 말을 덧붙였다.

“대답하는 한 놈만 살려주지.”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지하 시설이 곧 무너질 거란 말이 나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나일이 모습을 감췄다.

*

나일은 절벽에 난 입구를 통해 지하 연구 시설로 들어섰다.

동굴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쩍쩍 갈라지며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곧 붕괴가 멀지 않아 보였다.

‘헤어진 장소가….’

부하가 설명한, 2황자 일행과 둘이 헤어진 장소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 둘이 반드시 그곳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붕괴되기 전에 최대한 그 둘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봐야 하는데. 

천장에서 떨어져 내라는 돌가루를 보며 나일의 마음은 점점 다급해져만 갔다.

‘뭐지?’

나일이 달리기를 멈춘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배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기이했다.

그가 달리기를 멈추고 제 상의를 들췄다.

“….”

사라지고 있었다.

배에 언제나 있던 문양이 점멸하며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던 나일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끓었다.

그때.

“너 이럴래! 뭐 하는 거야!”

더 깊숙한 안쪽 어딘가에서 로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너진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문 너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피비는 문을 잠갔다.

잠금장치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애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피비는 한 번도 대답해주는 일이 없었다.

어쩌지.

로건은 제 앞을 막아선 붉은 문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런 문쯤이야 쉽게 날려버릴 수 있으나 문제는 장소와 지금의 상황이었다.

능력을 사용해 문을 부쉈다가 자칫 그렇지 않아도 무너지고 있는 이곳을 더 빠르게 붕괴시킬지도 몰랐다.

“후….”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로건!”

“나일?”

문을 부수려는 찰나였다.

로건은 들려온 제 친우의 목소리에 옆을 보았다.

자신 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의 나일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로건을 발견한 나일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너 여길 어떻게.”

“수도에서부터 2황자의 끄나풀을 쫓았더니 여기로 안내하더라. 멀쩡히 살아있을 줄 알았다. 피비는?”

“이 안에.” 

“이 안?”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고서, 나일은 어쩐지 불길해 보이는 붉은 문 너머로 피비를 불렀다.

“피비!!”

쾅쾅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나일을 보며 로건이 고개를 저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계속 답이 없어. 방금 문을 부수려던 참이었어. 붕괴를 앞당길까 봐 걱정되긴 하는데 방법이 없네. 나일, 물러서 봐.”

“답이… 없다니?”

자신을 뒤로 미는 로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일이 물었다.

급격하게 창백해진 그의 얼굴이 백지장 같았다.

나일이 허둥지둥하는 손놀림으로 제 상의를 올려 로건에게 보였다.

“문양이 사라졌어. 둘이 저주를 푼 거야, 그렇지? 피비 역시 저주에서 풀려난 거지?”

“….”

깨끗해진 나일의 허리를 보며 로건은 말문이 막혔다.

저주가 풀렸어?

칼빈 부인은 성물을 발동만 시키고 중간에 실패했는데 어째서지.

칼빈 부인이 도중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성물은 그녀를 제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제물!’

시시각각 나빠지는 로건의 표정을 보며, 나일 역시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한 눈치였다.

로건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일이 왔던 곳에서 식물 줄기들이 매서운 속도로 뻗어져 들어왔다.

안쪽으로 침입한 줄기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벽과 천장을 메웠다.

“조금은 더 버틸 수 있겠네.”

말과 함께 쾅, 문짝이 찢기듯 나가떨어졌다.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을 새도 없이, 두 사람이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의 꺾인 곳을 돌았을 때, 구석에 웅크린 실루엣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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