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게 내 몸이야.”
마력이 깃든 건지, 은은하게 빛나는 대리석 위로 사람의 신체가 떠 있었다.
양 팔과 양 다리, 그리고 목 위가 없는 신체가 토르소를 떠올리게 했다.
아마 없는 부위는 그동안의 연구에 이용해서 그런 거겠지.
“여기서 이렇게 고통 받고 있었구나.”
과거의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었던 신체 앞에서, 벨라야는 혼이 빠져나간 듯 서 있었다.
“벨라야.”
한 걸음 뒤에서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급히 손등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훔치고 떨어지는 손등 위가 젖어있었다.
“응, 미안. 미안해요. 이제 됐어요. 이제 없애 줄래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시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줘요.”
벨라야가 물러나자, 로건이 나를 옆에 내려놓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간 한기가 잘린 신체를 얼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꽝꽝 얼 수 없을 만큼 얼어붙었을 무렵, 로건은 그것을 천장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으로 내려쳤다.
하나의 얼음덩이가 수백 개의 얼음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고마워요. 더는 걱정 없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
부서진 자신의 몸을 뒤로 하고, 씩씩하게 돌아서던 벨라야가 나를 보고 말을 멈췄다.
로건의 팔을 부여잡고 서 있던 내가 그만 힘이 빠져, 주르륵 미끄러진 것이었다.
“헉, 허억….”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것은 로건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로건의 손이 간신히 내 몸을 잡아 떠받쳤다.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아 말을 내뱉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 허억, 정말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금방 나가, 금방 널 데리고 나갈 테니까 조금만….”
“로건.”
그의 옷자락을 쥐고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시간, 정말 다 써버린 것 같아요. 한계야 나.”
“….”
“걱정 말아요. 죽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성물 챙겨왔죠? 그거 벨라야한테 줘요.”
로건이 작은 보석함을 벨라야에게 건네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벨라야, 당신이 말했던 성물이에요. 후… 지금 이곳에서 해줄 수 있어요? 여길 나갈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요.”
“….”
보석함을 손에 쥔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곤 보석함을 열었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까만 보석이 알알이 꿰어진 작은 묵주였다.
‘성물의 요건.’
벨라야의 손에 들린 묵주를 보며, 성물의 발동과 완성에 필요한 조건을 떠올렸다.
일단 저주의 실행자.
가장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번복의 묵주는 반드시 주문을 행한 자가 묵주를 사용할 때만 주문이 취소가 됐다.
그게 문제였다.
저주를 건 사람은 분명 벨라야였지만, 동시에 벨라야가 아니었다.
그 오래전, 저주를 건 벨라야와 지금의 벨라야를 번복의 묵주가 동일한 사람으로 인식해줄까?
‘만약 묵주가 벨라야를 실행자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제발, 제발.
묵주를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로 묵주의 보석들을 차례로 굴리는 벨라야를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이제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
여기서 벨라야가 저주를 풀지 못 하고 실패로 끝난다면, 난 나일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걸.
아, 갈수는 있겠지,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그러니까 제발.
- 우웅.
벨라야가 묵주의 모든 보석을 손안에서 굴렸을 때였다.
번복의 묵주가 붉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 하하. 된 거네요? 성공이죠? 그렇죠, 벨라야?”
기쁜 음성으로 묻자, 그녀 역시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응, 다행히 나를 실행자로 인식해 줬네. 발동은 성공이야.”
잠깐만, 발동은 성공이라니?
발동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나?
내가 무언가를 잊은 게 있던가?
“아.”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문의 취소를 이루어주는 성물의 조건 중 하나가 남아있었다.
‘제물.’
저주를 풀기 위해선 제물을 바쳐야 했는데, 이곳에 제물로 바칠 마땅한 무언가가 있던가.
여길 나가 안전한 곳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바쳐야 할 지 천천히 생각해 보려 했었는데, 생각해보자. 여긴….
그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는 내게로 주름진 손이 다가왔다.
벨라야가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제물은 나란다.”
“네?”
“현재의 생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 모든 생을 바칠 거야. 그럼 더 이상의 환생은 없겠지. 그러니 마지막이구나.”
“벨라야, 그게 무슨….”
생각지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치맛자락만을 꾹 쥘 뿐이었다.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고 너무 오래 살았어. 충분해.”
“….”
“고생했다. 어린 애가 힘들었지.”
벨라야가 살가운 손길로 목을 끌어당겼다.
나는 로건에게 기대있던 몸을 그녀가 당기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주련.”
“흐으으… 고마워요, 벨라야.”
감싸 안은 내 뒤통수를 톡톡 다독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마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해볼까. 집중해야 하니까 조금 거리를 벌려주렴.”
로건이 나를 안아들고 뒤로 빠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앞으로 사라질 그녀를, 돌로 만들어진 벽 가까이 서서 지켜보는 일이 다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돌바닥에서 미약한 흔들림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로건, 나만 흔들리는 거 아니죠?”
“곧 무너질 모양인가 봐.”
천장에서 작은 돌가루들이 떨어졌다.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돌가루와, 바닥에서 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벨라야가 공중에 뜬 묵주로 손을 가져갔다.
눈을 감은 그녀의 입이 주문을 외는 것처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묵주가 띄고 있던 붉은 빛깔도 점점 짙어져 갔다.
그리고 웅웅거리는 소리 역시 점점 커진다고 느꼈을 때, 묵주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벨라야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 콰앙.
“…?”
무슨 일이지?
작은 폭발이었지 방금?
땅이 쪼개질 듯한 굉음과 함께, 방금 일어난 것은 분명한 폭발이었다.
뭉개뭉개 피어오른 매캐한 잿빛 연기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폭발과 함께 날아온 돌가루가 눈에 들어간 건지, 이물감에 나는 눈을 계속 껌벅였다.
그리고, 걷히는 연기 속에서 드러난 장면은 처참한 모습의 벨라야였다.
“벨라야?”
“….”
“로건, 가, 가까이 가요. 벨라야가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 말에 로건이 날 안은 채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모양인지, 벨라야의 몸은 군데군데가 훼손된 상태였다.
“이게 무슨, 어떻게….”
참혹한 모습에 당황해, 말을 더듬고만 있는 내 옆으로.
날 내려놓은 로건은 무언가를 확인하듯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를 만지고 냄새를 맡고 하던 그가,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놈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거야. 그래서 우릴 포기하고 보내준 거군.”
“….”
“마나 폭탄이야, 마력을 한계치까지 주입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터지지. 아마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칼빈 부인에게 폭탄을 달아놨던 모양이야. 정교하게 만들어진 폭탄이라 눈치 못 챈 것 같아, 미안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는 로건 옆에서, 나는 벨라야의 얼굴을 살폈다.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 했던 벨라야는 눈을 감지 못 한 상태였다.
손을 들어, 그녀의 눈꺼풀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이런 말 조금 그렇지만, 칼빈 부인은 원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사람이었잖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어차피 그녀는 죽었을….”
“제물로 바치지 못 했어요.”
“어?”
“그녀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전, 폭발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아직 저주는 유효해요.”
왜냐하면 아직도 내 안에 들어있는 그것들이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왼쪽 발목을 확인하자, 역시나.
“벨라야가 저주를 풀었다면 내 발목에 있는 문양, 없어졌어야 하는 게 맞겠죠.”
“….”
“근데 있네요, 아직도.”
정말이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구나.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깃털이 내려앉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저주를 푸는 게, 모두 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
“돌아가서 그가 내가 한 말을 이해해준다면 오래오래 그 옆에서 살고 싶었는데. 건강한 몸으로 언제까지나.”
“….”
“이제 방법은 내가 돌아가 나일에게 남아있는 한 가닥 저주를 흡수하고 죽는 건데, 나 그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 그럼 나도 죽고 그도 죽겠죠.”
마음 같아서는 소리 내 울고 싶었는데, 밖으로 소리를 내보낼 기운이 나질 않았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서 눈물만 흘렸다.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광대를 타고 귀로 흘러내렸다.
“누가 그래. 내가 너 나일한테 데려간다고 했잖아, 아직 도착 안 했어. 일어나. 갈 거니까.”
내 옆에 앉아있던 그가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내려다보는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화가 나 있고… 슬퍼하고 있네.
“처음에는 당신이 정말 무섭고 미웠는데.”
“야, 헛소리 하지 마라.”
“고마웠어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 해줄게요. 선심 썼다.”
“….”
“고마워요, 로건.”
“야, 들쳐 업고 갈 테니까 꾀병 그만 부리고 일어나.”
그는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로건이 날 일으키려 상체를 잡아 흔들자,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리는 와중에 붉은 빛이 보였다.
‘저거 뭐지, 죽을 때가 되니까 헛것이 보이나….’
그러던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벨라야의 시체 아래 깔려 여태껏 보지 못 했던 물건, 성물이 아직도 작게 웅웅거리며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도 발동된 상태인거야?’
벨라야가 아니었다면 켜지지도 않았을 성물이었다.
그리고 벨라야가 없는 지금, 실행자의 의지로 발동한 성물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설마, 바치려다 바치지 못 한 제물을 지금이라도 바친다면.
‘저주가 사라지면 나일은 살 수 있어.’
“로건.”
“….”
“당신 말대로 나 힘내 볼게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그렇죠?”
“이제야 제대로 된 말을 하네.”
“네, 약한 소리 안 할게요. 따라 나갈 테니까 잠깐만 방에서 나가있어 줄래요?”
“왜.”
나를 안아 올리려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혼자 살펴볼게 있어서 그래요. 내 몸을 살펴볼 건데, 같이 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그럼 꺾인 벽 뒤에 있을게. 나갈 필욘 없잖아.”
“와, 내가 당신을 그렇게까지 신뢰한다고 생각해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했더니 자존감이 어디까지 올라간 거야.”
내 말에 결국 로건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알겠어, 그럼. 문 밖에 서 있을게. 빨리 나와.”
“네.”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오해해서 미안했어요. 당신은 나일의 정말 좋은 친구예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