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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7)화 (127/134)

127화

앞에 선 황녀가 완전히 사람으로 돌아왔는지는,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기운이 온통 황금빛으로 바뀌었다는 걸 자각한 순간,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주저앉자, 재빨리 튀어나온 로건이 내 몸을 받혔다.

“끝났어요. 당신 가족에게로 가요.”

“….”

나와 손을 떼고서, 완전히 본래의 모습을 찾은 제 얼굴을 만져보던 황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가 2황자 쪽으로 걸어갔다.

“테나.”

“오라버니.”

감격의 상봉을 나누는 남매를 앞에 두고, 나는 바닥으로 후두둑 핏물을 쏟아 냈다.

‘아, 정말…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는 거야.’

입으로 핏물 대신 시커먼 저주를 토해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로건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일으켜 달라 요청하자, 그가 사뿐히 나를 앉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겨 흔들리는 팔과 다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자, 우리도.”

“….”

나를 안아든 로건이 등을 돌리는 순간, 뒤에서 2황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

“….”

“동제국의 유명한 누구를 닮지 않았나 했는데, 설마 로건 후페이일 줄이야.”

품에서 올려다본 로건의 표정은 너무나 예상한 전개라는 듯 구겨졌다가, 이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해결 할게. 눈 감고 있어.”

“….”

2황자의 부하들이 나가는 쪽으로 뛰어와 문을 막고 늘어섰다.

계획된 행동처럼 모든 행동이 착착 맞아 떨어졌고, 이 광경에 가장 놀란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황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오라버니!”

“….”

“이러지 마, 저쪽은 약속을 지켰잖아. 서로 약속한 걸 이미 다 주고 받았다고, 이제 그만 해! 이건 옳지 않아!”

“테나, 뒤로 물러나.”

“오라버니!!”

카랑카랑 울리는 목소리에 귀가 왕왕거렸다.

황녀가 이곳에 오기 전 숨겨 놓았던 작은 칼을 빼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녀의 뾰족한 턱 아래서 날카로운 쇠붙이가 빛나고 있었다.

“그거 내려놔, 테나.”

“아니, 오라버니야 말로 그만해. 아버지를 따라하는 짓, 그만하라고.”

“뭐?”

험악하게 구겨지는 2황자의 얼굴을 황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하를 그렇게나 혐오하면서, 폐하가 내게 한 짓, 누구보다 끔찍해 했으면서….”

“….”

“왜 따라한 거야? 왜 자꾸 폐하 같은 사람이 되려 하는 거야?”

“테나, 그건….”

“혐오스러워 오라버니, 오라버니를 누구 보다 사랑하지만 그래서 그 누구 보다 혐오해.”

“….”

막장으로 치닫는 광경에 우리 역시 잠시 시선을 뺏긴 상황이었다.

로건이 나와 벨라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때 나가자, 문 앞에 서 있는 몇 명 빠르게 처리하고 나가죠. 부인, 되도록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알겠어요.”

“남매 싸움은 우리가 없을 때 해도 충분하잖아?”

그러나 막장 쇼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자가 있었으니, 그는 탈출하려는 몸짓을 그저 두고 보지 않았다.

로건이 문 쪽으로 발을 뗀 순간, 푸른 로브의 남자가 다가와 문 앞을 막아섰다.

“못 나갑니다.”

“아, 저 새x… 아까부터 되게 거슬리네.”

그 덕분에 남매에게 집중되어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우리 쪽으로 넘어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의 말싸움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고 여겼는지, 2황자가 제 부하들을 불렀다.

“황녀를 보호해.”

“오라버니!”

“배로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테나야.”

“….”

2황자의 손끝으로 보랏빛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옅은 연보라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은 청보라빛으로 변해갔다.

마력의 일렁임은 문 쪽의 푸른 로브의 남자에게서도 느껴졌다.

로건의 시선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어디서 먼저 공격이 들어올지를 재고 있는 것 같았다.

‘문 쪽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용도고 아무래도 강한 일격을 날릴 쪽은 2황자 쪽이 아닐까.’

로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알렉스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그인 만큼, 2황자 쪽을 방어하는 일에 더 신경 쓰라고 귀띔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때.

“….”

내 허벅지를 받쳐 든 로건의 손에서 가느다란 선이 2황자 쪽을 향해 뻗어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황녀 테나 세리에의 쪽이었다.

“…으윽.”

어깨를 관통당한 황녀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그녀의 어깨를 뚫고 지나간 얼음 선이 파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테나!!”

“황녀님!!”

로건이 손을 내 드레스 자락 아래 숨기고 있던 탓에, 아무도 그가 먼저 공격을 시도할 거라 예측하지 못한 듯했다.

황녀가 땅바닥에 쓰러지고 그녀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2황자는 마력을 끌어 모으던 일을 내팽개치고 미친 사람처럼 황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이제 주시해야 할 곳은 한 군데였다.

푸른 로브의 남자는 그 상황에서도 마력을 끌어올리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감히 황녀님께….”

푸른 로브의 남자의 손에서 쏘아진 빛줄기가 그 즉시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빛덩이에 질끈 눈이 감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식하고 웃는 로건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아든 빛무리와 로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이 공중에서 만나 힘을 겨루고 있었다.

두 힘이 모두 팽팽해 어느 한 쪽도 밀리지를 않았다.

“뭐해?”

푸른 로브의 남자가 외치자, 그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점점 빛무리가 커지고, 팽팽해서 멈춰있던 균형이 로건 쪽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푸른 로브의 남자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마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잔뜩 불안한 기분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그는, 하찮은 존재를 본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비웃고 있었다.

“피라미가.”

“….”

그 순간, 쩌저적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번쩍인 후, 방금 전까지 얼음을 잡아먹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던 빛무리는 산산이 조각나 공중에 뿌려져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굵은 얼음 줄기에 몸이 관통된 푸른 로브의 남자였다.

“어, 어어….”

죽음을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로브를 쓴 남자가 즉사하자, 그를 뒷받침하던 부하들이 혼비백산해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문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한 명 있었으니.

그는 달려 나가는 동료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한 번 놀라고, 문 앞의 즉사한 남자를 보고 두 번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제 할 일을 수행했다.

그가 우리 뒤, 황녀에게로 모여든 무리를 향해 외쳤다.

“황자 전하! 가셔야 합니다.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폐하냐?”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

2황자가 황녀를 안아들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그는 나를 안아든 로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 눈빛이 소름끼치는 구만, 너 괜찮아?”

“그쪽 말이 들리는 걸 보면 여기가 지옥인가요?”

“난 현실에 있는 데 무슨 소리야. 가자.”

2황자에게 시선을 겨눈 채로 로건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테오 세리에가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로건에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침내 방을 빠져나온 로건이 걸음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까 황녀가 말한 다른 입구가 저쪽일거야, 내가 한 번에 찾을 수 있길 기도하라고.”

“….”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불이 들어오길 반복했다.

정신이 자꾸만 꺼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로건이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란눈, 그의 시퍼런 파란눈이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어이, 정신 차려.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이 시체로 바뀌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벨라야 어딨어요, 벨라야랑 성, 성물… 챙겨요. 이제 빨리 저주를….”

“당연히 옆에… 어?”

주위를 두리번대던 로건이 벨라야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봐 칼빈 부인!”

“….”

“어디 가는 거야?”

눈을 끔뻑거려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야를 붙잡아두려 노력했다.

고개를 들자, 희뿌연 시야 속에서 벨라야가 이쪽을 향해서 등을 돌렸다.

‘오라고?’

저긴 아까 우리가 왔던 길인데.

그녀가 우리에게로 오라는 손짓을 해보인 후, 다시 가던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 여자 어디로 가는 거야.”

“혹시 저쪽에 우리가 모르는 입구가 있을지도 모르죠. 벨라야랑 헤어질 순 없어요. 빨리 가요.”

“하.”

로건이 그녀의 자취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붉은 문?’

벨라야가 멈춰선 곳은 오는 길에 보았던 붉은 문의 방 앞이었다.

“칼빈 부인,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급합니다.”

로건이 재촉했지만, 그녀는 가만히 서서 붉은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서제국에 죽임을 당하고 몸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고 얘길 했었지. 그래서 그 이후로 다신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문 너머에 있어, 내 몸. 느껴져.”

“….”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내 몸을 이대로 여기 두고 갈 순 없어. 악한 사람 손에 들어가면 또 다시 나쁜 일에 이용되고 말 거야. 사람을 마물로 바꾸는 약에 이용되었던 것처럼.”

“….”

벨라야가 이번엔 로건을 쳐다보았다.

“부탁해요, 부탁합니다. 내 몸을 파괴해 줘요. 이제는 정신이 빠져나간 고깃덩이에 불과하지만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요.”

저 멀리, 두두두두, 많은 이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던 로건이 벨라야와 나를 쳐다보았다.

“해야 한다면 빠르게 합시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들어가시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벨라야가 붉은 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 안쪽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벨라야가 복도에 장식되어 있던 초를 하나 끄집어 내렸다.

초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따라, 로건이 나를 안고 뒤를 따랐다.

방 안은 네모난 구조가 아닌 ㄱ자 모양의 구조인 듯 했다.

들어가는 입구는 깜깜했으나, 꺾여 들어간 공간 안쪽에서 허연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초를 든 벨라야가 가장 먼저 앞서 들어갔다.

“…이게.”

“….”

“벨라야의 몸….”

돌아들어가 마주친 장면에 우리 셋 모두가 얼어붙고 말았다.

그곳엔 조금씩 조금씩 깎여 쓰이고 남은 신체의 일부분이 흰 빛에 쌓여 허공에 둥둥 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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