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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6)화 (126/134)

126화

황녀가 완벽히 치료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전혀 손쓰지 못 했던 만큼, 사람으로 반쯤 돌아온 모습도 충분히 놀라운 모양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내일 마저 치료하겠다는 말에도 황태자는 별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별 문제는 없었죠?”

밤, 다시 황녀의 방을 찾았을 때.

그녀는 준비가 끝난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없었어요.”

“가죠.”

내려가는 길엔 마주친 둘을 처리해야만 했다.

소리 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로건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지기는 어디 있죠?”

내 물음에 식당을 두리번거리던 황녀가 고개를 돌렸다.

“문지기가 식당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

“없어요.”

당황스러움이 황녀의 얼굴 위로 번져나갔다.

그도 그럴게, 우릴 기다리는 누가 있다 하기엔 불 꺼진 식당은 소름끼치도록 적막했다.

“시간이 어긋난 거 아니에요?”

황녀의 방에서 나올 때가 새벽 1시 반을 넘기고 있었으니, 내려오며 몇몇을 처리하면서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은 2시를 넘겼을 것 같은데.

“1시에서 3시 사이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연락 받았는걸요.”

뭐야, 그럼.

일이 틀어져간다는 생각이 엄습하자,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일이 잘못된다면 나한텐 시간이 없는데.

“문지기가 없으면 못 들어가나요?”

“열쇠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열쇠가 문지기한테 있으니까요. 입구는 들어 가보진 않았지만 들은 게 있어서 어디인지 알 것 같거든요.”

심각한 눈빛으로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던 로건이 말을 보탰다.

“그럼 일단 가보죠. 힘으로 열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러죠. 따라오세요.”

황녀가 식당 안쪽으로 소리 죽여 발을 옮겼다.

식당 끝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황녀가 멈춰 바닥을 살폈다.

“식당 끝 카펫 아래라고 알고 있어요. 이 아래 어딘가에….”

바닥을 살피는 황녀를 내려다보던 로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말을 꺼낸 건 그 다음이었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

누가 봐도 울룩불룩하게, 방금 누가 카펫을 만졌다는 티가 나는 카펫이 하나 보였다.

무심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간 로건이 발끝으로 카펫을 쳐내자, 손잡이가 안쪽으로 파인 문이 보였다.

바로 쭈그려 앉은 그가 손잡이를 잡아 올렸다.

“이거 열리는데.”

“….”

“….”

로건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황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녀 당신 오빠 말야, 이렇게 허술한 인간인가? 이 정도면 나 여기 있으니 들어오라는 거나 다름없는데.”

“원래 이렇게 열려있지 않을 텐데.”

“동제국은 이런 놈한테 피해를 본 건가?”

살짝 열었던 문을 아래로 내리며 로건이 계속 말을 이었다.

“2황자와 그 측근들이 허술한 게 아니라면, 누가 있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비밀 문이 이런 구조라면, 보통 한 명이 내려갔을 때 남아서 문 주변을 수습하는 다른 놈이 있었을 거야. 예정대로 문지기를 만났다면 우리가 내려갈 때 여길 수습할 사람은 문지기였을 거야.”

“….”

“근데 지금 봐. 문은 열려 있는데 그 주변은 엉망이야. 누가 혼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든가, 지하 연구 시설이 들통 나든 말든 상관없는 놈들이 내려갔다는 소리겠지.”

“….”

“있어야 할 문지기가 없는 것도 그 이유 같고.”

그 말은 2황자와 우리 외에 다른 누가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걸까, 엄습해오는 긴장감으로 침을 꿀꺽 몰아 삼켰다.

“어쩌겠어, 그래도 내려가야지?”

“….”

“이봐 황녀님, 입구가 여기뿐이야?”

“아뇨, 여기 말고도 입구는 있어요. 어딘지 모르지만.”

끼익, 스산한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들렸다.

“내려가자고. 앞장 설 테니 잘 따라와. 뒤까지 봐주는 건 못하니까.”

문을 열고 내려가는 로건의 등을 보며 그 다음으로 황녀를 앞장 세웠다.

내려가는 돌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경사가 어찌나 심한지, 아래를 내려다보자 현기증일 일 정도였다.

그나마 양 옆에 나 있는 녹슨 손잡이가 있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조금씩 계단을 밟아 나갈 수 있었다.

- 툭, 투둑, 투투투투.

계단을 밟다 발에 차인 돌멩이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가 하염없이 이어졌다.

“황녀님, 여기 깊어요?”

“지하 3층 이랬나, 그럴 거예요.”

“….”

투투투툭.

돌멩이 소리가 멈춤과 함께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오셨군요.”

푸른 로브를 입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자신을 2황자의 측근으로 소개한 그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

사람의 모습으로 반밖에 돌아오지 않은 황녀를 눈으로 훑던 그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잠깐.”

“….”

길을 가려 돌아서는 남자의 옷깃을 로건이 잡아챘다.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던데.”

“침입자요?”

“약속했던 문지기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하엔 아무 일도 없는 건가?”

푸른 로브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보시다시피 평온한 상태입니다만, 확인은 해봐야겠군요. 일단 안내하겠습니다.”

*

연구소로 탈바꿈한 지하 묘지는 흡사 개미굴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를 따라 이동하는 좁은 복도는 마치 동굴 같아서 걸을수록 숨을 조였다.

“후….”

벽을 짚고 도중에 멈추자,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춘 로건이 물어왔다.

“왜 그래? 힘들어서 그래?”

“조금 답답해서요.”

“업힐래?”

“됐어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 그를 두고 걸어 나갔다.

푸른 로브의 남자가 저 앞에서, 멈춰선 우리를 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몸이 한계를 넘어서 그런가.

마치 꼭 벨라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앞으로 걸어가는데.

‘이 방….’

복도를 빠져나와서 바로 우측에 있는 방으로 온 신경이 집중됐다.

방의 붉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벨라야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봐요.”

“….”

“우리 일행은 어디에 있죠?”

붉은 문의 방을 신경쓰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푸른 로브의 남자가 그 방을 힐끔 쳐다봤다.

“2황자 전하와 함께 계십니다.”

“저 방은 아닌 거죠?”

“….”

표정이 살짝 굳어지지 않았나 싶었지만 남자는 곧 온화한 표정으로 얼굴을 갈무리했다.

“그럴 리가요. 2황자 전하께서 계신 방은 이 앞에 있습니다.”

“….”

근데 왜 이렇게 두근대며 울렁이는 거지.

아니라는 말에도 나는 그 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그럼 이 방은….”

무심코 문을 향해 뻗어 나간 손이, 푸른 로브의 남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방금까지도 온화한 표정이던 얼굴이 무섭게 돌변해 있었다.

그가 낚아챈 내 손을 거칠게 밀듯이 놓는 바람에 나는 뒤에 서 있던 로건의 가슴팍에 부딪혀야만 했다.

“지체 말고 가시죠. 이곳에선 어느 곳도 2황자님의 허락 없이 열어볼 수 없습니다.”

뒤에서 전봇대처럼 서 있던 로건이 살짝 내 어깨를 쥐었다 놓았다.

그가 작게 귓속말을 해왔다.

“일단 가자, 저런 놈 하나 없애는 거 어렵지 않지만 2황자를 만나기 전에 문제를 일으키면 골치 아파질 수 있어.”

“알겠어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서 로건이 날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 로브의 남자 앞에 선 그가 저보다 살짝 작은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알겠는데, 이 여자한테 함부로 대하는 것도 내 허락 없인 할 수 없어. 다시 한번 이 여자한테 손대면 그 손은 앞으로 못 보게 될 거야. 손이 사라지든지 네놈 눈이 사라지든지 할 테니까.”

“….”

“알아먹었으면 안내하던 길이나 마저 안내해.”

다시 걷기 시작하는 두 남자를 보며 나는 또 다른 복도로 들어섰다.

*

앞서가던 남자의 발이 멈춘 곳은 딱 보기에도 다른 문들보다 배는 커다란 문 앞이었다.

문 안쪽으로 신호를 보내자, 안쪽에서 문을 잡아당겼다.

방안을 향해 열리는 문 사이로, 가운데 소파에 앉은 2황자가 보였다.

“들어가시죠.”

푸른 로브의 남자가 문 앞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나는 옆에 선 로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기서 싸움 나면 압사 당해서 죽겠죠?”

“안 무너지게 조절해서 싸우면 되지.”

“그럼 가능하다는 말이네요?”

“힘차게 싸우는 건 어렵지만, 그렇지. 왜.”

“그냥 알아두게요.”

로건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들어서는 나와 로건을 훑어보던 2황자의 시선이 우리 뒤의 황녀에게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만히 제 동생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얼어붙은 표정이 가관이었다.

“내가 전달한 내용이 잘 이행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 좀 미뤘어. 원하면 지금 마저 치료해줄게.”

“….”

“내 일행은 어디 있어? 영원히 미룰지 지금 할지는 내 일행을 보고 결정하고 싶은데.”

내 말에 2황자가 제 곁에 있던 부하에게로 손짓했다.

그가 뒤로 가 안쪽 방의 문을 열자, 그곳에서 벨라야의 모습이 보였다.

“보다시피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멀리서 보기엔 잘 모르겠네.”

부하가 벨라야를 끌고 와 2황자 뒤에 세웠다.

“테나를 마저 치료해. 그 후에 네 일행을 넘기지.”

“먼저 넘겨. 아니면 황녀의 새로운 모습에 적응하든지.”

“….”

뒤에서 황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그렇게 해. 그렇게 하자.”

앞으로 한발 내디디며, 뒤에서 황녀가 나와 로건 사이로 몸을 빼냈다.

원래 얼굴을 많이 되찾은 황녀가 지그시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

그때, 닫혔던 문이 열리며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전하, 배가 정박했습니다.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2황자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곤 거칠게 벨라야의 팔을 잡더니, 우리에게로 떠밀었다.

“해, 이제.”

내게로 떠밀린 벨라야를 품으로 받아내자,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벨라야? 다친 곳은요.”

“아무 곳도, 미안하구나.”

“다친 곳만 없으면 됐어요. 괜찮아요.”

벨라야의 부축을 로건에게 넘기고, 서 있던 황녀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마저 할게요, 그럼.”

“….”

순순히 끌려 와 마주보고 선 황녀는 고개를 바닥으로 푹 꺼트린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내민 손 위로 제 손을 얹으며,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고마워요. 마법사님. 꼭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할게요. 어떻게든 오라버니를 말릴게요.”

“부디 그래 주길 바라요.”

닿은 손을 통해 이제는 익숙한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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