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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5)화 (125/134)

125화

시종을 따라 나선형의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 우선은 넓은 홀을 만나게 될 것이고, 홀을 지나쳐 중앙 복도로 빠져나가면 황녀의 방이 나올 예정이었다.

머무는 내내 별궁은 조용하기만 했기 때문에, 그날도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계단을 오를 때부터 위층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거슬렸던 만큼, 홀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따라오시면 됩니다.”

붐비는 홀을 보고 멈칫하자, 시종이 갈 길을 재촉했다. 

화려한 복장의 귀족들이 홀에 흩어져 제멋대로 서 있는 바람에, 마치 경사진 고갯길을 빠져 나가듯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 썼지만, 그런 내 행동을 배려해 시선을 거둬가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목을 빼고 기웃거리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었다 할까.

“생각보다 되게 어리네요.”

“저 마법사 말고는 아직 없다죠?”

쑥덕거리는 귀족 무리를 뒤로 하고 복도로 들어섰지만, 복도 역시 비어있지는 않았다.

의사의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처럼, 복도 양 옆으로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니까.

“황녀님,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시라 해.”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들어선 방에는, 어제의 그 황녀가 같은 모습으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뒤로 어제 내가 몰래 찾아들었던 황녀의 침실 문이 보였다.

“그럼.”

시종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상대편이었다.

“어서 오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문 앞에 그대로 서 있는 나와 로건을 향해 그녀가 손짓했다.

“황녀님 친오빠가 무슨 쪽지를 전달했는지 아시면서 편하게 앉으라는 말부터 하시네요.”

황녀의 얼굴은 사람의 부분이라곤 입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유독 입술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비꼬는 말에, 인사하며 올라갔던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가더니 일직선을 그렸다.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됐습니다. 변명 들으러 온 거 아니니까. 저는 황녀님을….”

말을 마저 꺼내려던 순간, 등 뒤로 문이 벌컥 열렸다.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황태자와 그를 필두로 한 귀족들이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벌써 치료를 시작하신 건 아니겠죠?”

“이제 하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일로….”

황태자를 따라 난데없이 들이닥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저들끼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당한 광경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황태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치료 받는 황녀를 응원 하겠다며 시간을 내어주신 분들이 이리도 많답니다. 마법사님은 신경 쓰지 말고 치료에만 전념해 주시면 됩니다.”

“….”

황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테이블을 짚고 일어선 그녀의 입술이 꽉 깨물렸는지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방 가운에 서서 바르르 몸을 떠는 반 괴물, 반 사람의 황녀를 귀족들이 신기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동의되지 않은 상황임이 분명했다.

“어머니, 저게 괴물이야?”

“어머, 어머나.”

황녀를 바라보며 무례한 질문을 하는 어린 공자 옆에서, 그 어머니 되는 사람으로 보이는 부인은 난감한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야, 황녀님이시란다. 죄송해요. 황녀님, 황태자님.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아닙니다. 공자가 어리니 그럴 수 있죠. 아이가 보기엔 착각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황녀가 받아야할 사과를 대신 받아 넘기는 황태자의 인자한 미소에, 방 곳곳에서 긴장 풀린 웃음소리와 말소리들이 새어나왔다.

하하, 그렇죠. 아이의 눈에는 그럴 수도. 하하하하, 아이의 눈은 순수하니까요.

주고받는 말들 속에서 수치스러움에 몸을 떠는 황녀만이 말이 없었다.

‘이게 뭔 상황이냐.’

짜증나는구만.

더러운 기분을 느끼건 나뿐만이 아닌지, 옆에 서 있던 로건이 얼굴을 귓가로 들이밀었다.

“이거 그거네. 희귀 동물. 귀족놈들은 희소한 걸 좋아하지.”

“….”

“치료해주고 나가자. 여기 있으니까 기분이 아주 개같아 지려고 한다.”

그래, 맞지.

나 또한 더 기분이 더러워지기 전에 할 일을 끝마치고 이 공간을 나가고 싶었다.

“전하, 잠시 방 밖에서 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황태자를 끌고 방을 나오자,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황태자와 세력을 같이 하는 측근들만 방에 들인 건지, 홀 쪽은 그때까지도 사람들로 붐비는 중이었다.

“전하, 황녀님을 치료하기에 앞서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어 방 밖으로 모셨습니다.”

“그러셔야죠. 성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바로 옆방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네, 끝나고 바로 사용해야 하니 성물은 먼저 받아가겠습니다. 그리고….”

“….”

“지금 방 안에 있는 이들에게 심심함을 재워줄 구경은 서커스에 가서 찾으라고 말씀해 주시죠.”

내 말이 의외라는 듯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저는 한 번도 이런 너저분한 상황에서 치료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치워주시죠.”

“귀족들이 몰려있는 상황을 너저분하다고 표현하시니 안타깝네요.”

그가 요청에 바로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내놓지 않을 거란 건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제멋대로 희귀 동물을 귀족들에게 전시하면서 느끼는 우월감이 꽤 달달했겠지?

그러나 남들 눈에는 황태자의 자리를 굳힌 걸로 보이는 그가, 사실 황제의 신임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난 알아 버렸으니 말이다. 

“괴물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그 저속한 마음들은 잘 알겠습니다만, 전하께선 황녀님의 가족이 아니십니까.”

바로 전까지도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던 그가, 내 직설적인 말에 조금씩 입매를 굳혀갔다.

“혹여 이런 번잡한 상황 속에서 치료를 했다가 마력 운용이 뒤틀려 문제가 생길까 우려되어 그렇습니다. 저는 황녀님을 잘 치료하겠다고 황제 폐하와 약속했으니까요.”

그리고 황녀의 치료가 별 탈 없이 이루어지도록 관리하라고 너를 보낸 사람도 황제잖니.

일이 잘못되면 가장 곤란할 사람은 너 일 텐데.

미세하게 떨리던 남자의 얼굴 근육이 그제야 차분해졌다.

“마법사님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없죠.”

“감사합니다, 전하.”

그 즉시 방으로 들어간 황태자가 상황을 정리해 귀족들을 끌고 나왔다.

복도 벽 가까이 서 있는 내 얼굴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귀족들을 향해 웃어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귀족들을 내보내고 돌아온 황태자마저 방으로 들어오지 못 하게 막는 것은 조금 어려웠지만.

상황이 모두 끝나고 성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자, 로건이 제법이라는 얼굴로 웃음 짓고 있었다.

“아, 역시 내 편 일 잘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야.”

“….”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황녀가 침울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그녀가 앉아 있는 옆 자리로 가 앉으며 본론을 꺼냈다.

“황녀님 때문에 나가달라 한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제 해야 할 일이나 하죠. 전 황녀님과 납치된 제 일행을 교환해야 하니까요.”

“….”

죄스러운 표정으로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을 잡아 거칠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과 손에서 느껴지는 낯선 느낌에 황녀가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더 놀란 건 나였다.

빨려 들어오는 어두운 기운이 예전의 그것들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아, 시야가….’

들어온 기운이 몸속에서 날뛰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조금씩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황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반 이상 치료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의 손을 놓았다.

“…?”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며 황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난 지금 황녀님 완벽하게 치료하진 않을 거예요.”

“….”

“나머지 치료는 지하에 가서 벨라야를 넘겨받은 후에 할 겁니다. 황녀님을 완전히 사람으로 돌려버리면 우린 그쪽 오빠랑 거래할 카드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니까요. 지하로 내려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황녀님에겐 소중한 가족이겠지만 제겐 치 떨리는 범법자일 뿐이니까요.”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했다.

“2황자는 황녀님이 문지기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2황자는 혼자가 아닌가요? 지하엔 뭐가 있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궁을 세우기 전에 원래 이곳은 오래된 수도원이었어요. 사람들에겐 별궁을 지으면서 기존의 것들을 모조리 없앴다고 알렸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지하에 수도원 때 쓰던 지하 묘지가 남아있거든요. 몇 년 전 오라버니가 그곳에 연구 시설을 세웠고요.”

“….”

“별궁 안엔 2개의 세력이 존재해요. 기존 별궁 사람들 중에서 오라버니를 돕던 몇몇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문지기도 그들 중 한 명이죠. 내가 그 문지기를 알아요. 다만 저 혼자서 움직이기엔 잡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황태자가 끌고 온 세력이 기존 사람들을 계속 의심의 눈길로 지켜보는 중이라, 절 도울 사람이 마땅치 않거든요.”

“입구는 어디죠?”

“식당이에요.”

“좋아요. 쪽지에 적힌 대로 밤에 움직이죠.”

말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로건이 잡아 지탱했을 때, 속에서 와락 피가 쏟아져 나왔다.

“너 몸이….”

“….”

핏방울이 튄 입가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괜찮아, 아직 버틸 수 있어. 어차피 곧 끝나니까.

“괜찮아요. 오늘 밤이면 멀쩡해질 거잖아요?”

“….”

조용히 쳐다보다 입술을 짓이긴 그가 내게로 손수건을 던졌다.

“웃으려면 마저 닦고 웃어. 입 주위에 피가 다 번져서 무서우니까.”

로건이 날 번쩍 안아들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으로 향하던 그가 돌연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

“….”

“속에서 불이나 죽겠네. 진짜, 왜 이렇게 기분이….”

로건이 날 안은 채로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반쯤 사람으로 돌아온 황녀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 허튼 생각 하지 마. 밤이 오기까지 얌전히 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일이 틀어지면 너고 그 x끼고 할 거 없이 다 찢어발겨 버릴 테니까.”

“….”

“…로건, 그만하고 가요. 방에 가서 쉴래요.”

“….”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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