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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24)화 (124/134)

124화

“소식이 늦구나, 이해가 가. 남매가 아니면 누가 괴물이랑 대화하고 싶겠어. 폐하께서 동제국 사절단의 요청을 거절했어. 형님을 넘기는 대신 이것저것 다른 것들이 넘어가겠지.”

그 말에 붙어 있는 2황자에게서 동요가 느껴졌다.

황태자의 말을 2황자를 보호하겠다는 말로 이해한 것은 황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황태자가 들고 온 마나 전구의 빛 앞에서, 황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폐하가 오라버니를 보호해 주시기로 한 거야?”

“어?”

황태자는 황녀의 질문에 반문하고서, 그녀의 질문을 비웃듯 자지러지게 웃어보였다.

조용하기만 했던 방안이 남자의 웃음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아하하하,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우리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매 맞아? 어떻게 그렇게 폐하를 몰라.”

“그게 아니면? 거절했다면서.”

침대에 걸터앉은 황태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서제국의 황족이 동제국에 끌려가 멋대로 다뤄지게 폐하가 둘 것 같아?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바엔, 우리 손으로 처리하는 게 낫지.”

“….”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물론 동제국엔 영영 못 찾은 걸로 알려지겠지.”

“말도 안 돼….”

“테나 네가 믿든 안 믿든 명령은 떨어졌어.”

내 손바닥에 닿은 2황자의 얼굴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가 조용히 몸을 떨고 있었다.

“….”

얼이 빠진 건 황녀도 마찬가지였다.

넋이 나가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그녀에게 황태자의 잔인한 말들이 이어졌다.

“사절단과 실랑이를 벌일 거라 예상했는데 일이 금방 끝난 모양이야. 폐하께서 모래 오실거야. 그러니까 넌 그 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어야 해, 알겠어? 난 내 일을 그르쳐서 폐하께 신임을 잃고 싶진 않아서 말야.”

“….”

“대답해.”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이건 부탁이 아냐, 테나.”

황녀의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방안이 그녀를 비웃는 황태자의 웃음소리로 넘쳐흘렀다.

“네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로 하면 그만이야.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을 쓰고 싶은 내 마음 좀 이해해주지 그래?”

“….”

“형님의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그런 모습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서 폐하가 좋아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너희 남매 서로를 눈물 나게 아끼잖아. 이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정보 아냐?”

“….”

황녀가 끝내 대답하지 않았지만, 황태자는 자기 말을 전한 것으로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가 방을 나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네가 이곳에 있던 목적을 말해.”

역시 범죄 경력직인 걸 속이질 못 하네, 이 자식.

먼저 옷장 문을 열고 나간 2황자가, 뒤따라 옷장을 빠져나가려는 내 목을 움켜쥐었다. 

*

“뭐야?”

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놀란 2황자가 재빨리 내 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의 목을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너 뭐, 컥….”

“이게 뭐냐구? 궁금한 게 참 많을 거야 지금?”

목이 졸려 컥컥 대면서 그가 입으로 주문 같은 것들을 외웠다.

허나 그게 발동이 되겠니?

네 생명력과 능력들이 내게로 다 빨려 들어오는 이 와중에?

“테, 테나….”

로건이 뭐라고 했었지.

나와 닿는 건, 온 몸의 기운이 닿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며,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어지는 상태라고 했었나.

마법이고 뭐고 제 힘과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자, 2황자가 제 동생의 이름을 애처롭게 불렀다.

“그, 그만하세요!”

그러나 몸만 괴물이지 속은 연약하고 마음이 무른 황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침대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나는 눈길을 다시 2황자에게로 돌렸다.

“짧게 말할 거고, 두 번은 없을 테니까 잘 들어 테오 세리에. 우선은 내가 왜 황녀의 옷장 안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황녀를 해칠 생각이나 적의는 없어. 오히려 난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황녀가 마법사에게 치료 받길 원하지? 그럼 입 다물고 얌전히 앉아서 내 말이나 경청해. 내가 그 마법사니까.”

“….”

좀 당황스럽긴 하겠지.

제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나를 여기서 다시 본 것도 웃길 텐데, 이제는 내가 마법사라고 하질 않나 제 동생을 구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질 않나, 나라도 황당하겠다.

“….”

그러나 마법도 봉인 되고 생명력도 졸졸 빨려 본 경험이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모양이었다.

격렬하게 반항하던 그의 몸짓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서제국의 황제가 직접 행차까지 해서 딸을 구해달라는 데 별수 있나, 바빠도 와야지. 근데 이 황녀님께서 무슨 일인지 계속 치료를 거부하네? 내가 언제까지 이 별궁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야.”

황녀 쪽을 슥 보자, 그녀는 찔리는 눈치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난 황제에게 막대한 보상을 받기로 해서 말야, 치료를 해야 하는데 계속 거부를 하고 만나주지도 않으니 어떡해. 그래서 잘 때 몰래 사람 만들어 놓을까 싶어 들어온 거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마, 알겠어?”

“….”

반항은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의심은 풀리지 않았는지 2황자는 연신 눈을 부라렸다.

“오, 오라버니.” 

“…?”

“맞는 거 같아, 마법사가 금발에 녹안이라고 들었어.”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황녀가 제 오라비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제 누이와 시선을 교환하고 나서야, 2황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컥, 커컥… 헉.”

“의심스러우면 네 형제한테 가서 내가 마법사가 맞는지 확인해. 형제가 너를 아주 반갑게 맞아줄 것 같던데?”

“….”

마지막 대사가 심히 악당스럽긴 했지만, 악당을 상대로 날린 터라 오히려 은근히 뿌듯했다.

에이 더러워. 놈의 목을 졸랐던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제 그만 이 방을 나가야 했다.

“우린 오늘 여기서 안 본 거야. 당신들이 잡히든 이곳을 잘 빠져나가든 그건 알아서 해, 내 알바 아니니까. 난 치료해야 할 사람을 치료하고 약속된 보상을 챙긴 후 떠나면 돼. 각자 알아서 잘 하자고.”

“….”

“황녀, 내일 얌전히 치료 받을 거지? 당신 오빨 본 사실을 눈감아줄 테니 당신도 나를 본 건 발설하지 않아야 할 거야. 그리 알고 가지.”

로건이 아직도 창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얼음 계단 다 녹은 거 아냐?

창문 틀 위로 발을 올리는데, 뒤에서 2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난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돌아서자, 졸린 목을 매만지며 2황자가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모르겠어? 난 당신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 무가치하니까.”

“내가 너한테 했던 일을 기억할 텐데,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그건 가치 있는 일 아닌가?”

“….”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잔머리를 귀에 꼽으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전혀. 넌 죽일 가치도 없어.”

“….”

*

대망의 날이라 그러한가.

얼마 자지도 못 했건만 이른 아침부터 눈이 반짝 떠졌다.

그리고 날아든 것은 예상했던 소식이었다.

- 황녀님께서 늦은 점심 식사 후, 방에서 치료를 받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매번 오늘도 치료를 안 받겠다 하십니다, 라는 말만 전하러 왔던 시종의 표정은 처음으로 활짝 피어 있었다.

예상했던 전갈에 나와 로건의 표정 역시 밝게 피어났고, 벨라야에게 소식을 전한 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 똑똑

시종이 두 번째로 방문을 두드린 것은 예고했던 한낮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네, 갑시다. 황녀님을 치…?”

“….”

오전에 왔던 그 시종이 밝은 얼굴로 서 있을 줄 알았는데.

힘차게 문을 열자 그 뒤에 서 있던 것은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였다.

“매번 보던 시종이 아닌데 무슨 일로….”

굳은 얼굴로 하녀가 제 치맛자락을 뒤적였다.

그리고 꺼내 내민 것은 작은 쪽지였다.

지나가는 이가 없는지, 문 앞에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하녀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2황자님의 전갈입니다.”

“….”

“2황자님께서 꼭 보셔야 할 내용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하녀가 뒤를 돌았다.

그녀가 내 손바닥 위에 남기고 간 접힌 쪽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로건이 말했다.

“안 봐?”

“….”

어… 왜 이렇게 펴 보기가 싫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자, 보다 못한 로건이 쪽지를 채갔다.

“하.”

“왜요.”

“어제 너한테 그놈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든 처리했어야 했는데.”

로건이 거칠게 쪽지를 넘기고 방을 나갔다.

그 안엔 정갈한 글씨체로 몇 문장이 적혀 있었다.

- 황녀를 치료 후 오늘 밤 그녀가 지하로 올 수 있도록 도와. 너도 지하로 와야 할 거야, 이곳엔 네 일행이 있으니까. 지하로 오는 문지기는 테나가 알고 있으니 그녀에게 묻도록 해.

“….”

방심했다.

아비에게서 버림받은 처량한 도망자 신세이니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여겼는데 오판이었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놈이 더 무서운 건데.

달려 나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로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벨라야의 방에 아무도 없어.”

벨라야가 납치되었다는 걸 별궁에 알리고 지하를 수색하면? 벨리야는 살 수 있을까?

벨라야가 없으면 저주를 풀어줄 사람도 사라져.

치료 후, 성물을 받고 황녀를 지하로 데려가 벨라야와 교환한다, 이것 말고 더 좋은 수가 있나?

“벨라야가 없으면 황녀를 치료 하고말고 모든 게 의미 없어져요.”

“….”

“분하지만 일단 그의 뜻대로 하죠.”

로건의 주먹질에 방벽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어제 뭐요? 놈이 여기 있는 걸 알았을 때 그를 죽이려고 별궁 사람들을 다 깨우고 난리치는 거요?”

“…하아.”

- 똑똑

닫혀 있어야 할 방문이 열려있자, 이제는 얼굴이 익어버린 그 시종이 문 대신 벽을 두드렸다.

“모시러 왔는데….”

“….”

“혹시 지금 가실 수 없는 상황인가요?”

기민하게 우리의 기분을 눈치챈 시종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분하지만 지금은 놈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어.

“아뇨, 가죠. 갑니다. 황녀님을 치료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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